두 주 전에 모종의 수술을 하고 회복 중이라 이번 추석에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추석 이틀 전날 오전에 남편이 시가에 먼저 내려갔고 딸들은 추석 전날에 KTX를 타고 간다.
결혼 28년 동안의 매해 추석에 딱 두 번 시가에 가지 않았는데 한 번은 시할머니의 장례를 치른 직후라 오지 말라 하셨고, 다른 한 번은 9월 초에 큰딸을 낳고 두 달도 안 된 때여서 남편만 가고 나는 집에 있었다.
이번 추석에 며느리가 못 간다는 말씀을 드리러 전화했을 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 차례상 그거 다들 하지 말라는 걸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니가 못 온다고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시가는 추석과 설 아침에는 차례상을 차리고 기제사는 한데 모아 한식날에 한 번 지낸다. 시어머니는 제사를 성심껏 올리며 조상을 잘 모셔서 자식들이 이만큼 잘 산다고 믿으신다.
잘 산다는 것은 '강남에 아파트가 있다, 직업이 뭐다, 자산이 얼마다' 류의 의미가 아니다. 당신 부부와 삼 남매 그리고 그 배우자들과 손주들까지, 누구 하나 아프거나 다치거나 헤어지지 않고 먹고살 만하다는 소소한 기준이다. 이 소소한 잘 살기도 결코 소소하다고만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긴 하다.
큰조카가 대학생이 될 무렵부터는 어머니는 '여섯 손주들이 모두 직장을 척척 찾아가게 해 달라'는 기원을 차례상에 추가하셨다. 아들네랑 딸네 다 합친 손주 중 아직 대학생인 하나 빼고 다섯이 모두 그 힘들다는 취업도 했으니 어머니는 효험이 있다고 믿으신다.
평소에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세 시간 반 만에 잘 도착했다고 남편이 문자를 보냈다. 남편은 제사니 차례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저 팔순이 넘은 엄마가 조금 덜 힘들길 바라는 막내아들의 마음이다.
어머니의 차례상차림과 명절 음식들은 예전에 비해 그 양이나 가짓수가 꽤나 간략해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송편을 빚었는데 요즘은 동네 떡집에서 송편과 잔기지떡을 맞춰 오신다. 집에서 직접 만든 떡이 더 맛있다거나 옹기종기 모여 송편을 빚던 시절이 그립다거나 하지는 않다.
나는 충분히 오래 했다고 생각한다. 마룻바닥에 앉아 송편을 빚을 때는 두 다리를 오므렸다 폈다 하다가 점점 허리와 고개를 좌우로 비틀었다 꺾었다 하며 남은 재료들을 곁눈질로 어림하곤 했다.
집안이 매캐하도록 여러 가지 전도 부쳤다. 그렇게 만든 명절 음식들은 몇이나 되는 작은집들이 차례 지내러 왔다 갈 때 싸서 들려 보내곤 했는데 그런 작은집들도 자녀들이 결혼해서 하나의 가족 단위를 만들면서부터는 큰집에 오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느 해인가 아침 차례상을 물림과 동시에 작은아버지들과 남자들이 먹을 밥상을 부지런히 차려내고 이제 여자들끼리 막 밥을 먹으려던 때다. 그 사이 밥을 다 드신 작은아버지 한 분이 막내며느리인 나를 향해 '얘, 커피 좀 내 와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꼭 하고 싶은 말은 하는 타입이다.
- 작은아버지, 저 이제 막 밥 먹으려 하거든요. 다 먹고 커피 드릴게요.
작은아버지도 내 상황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한 말이라 '어, 그래? 밥 먹어라' 하며 머쓱해했다. 어머니가 '아유, 내가 타 드릴게'하며 숟가락을 놓으려 하셨고 눈치 빠르고 엉덩이가 가벼워 이쁜 남편이 '저 다 먹었어요' 하며 일어나서 부드럽게 해결되었다.
일가친척이 모이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많지만 며느리의 기억에서는 답답한 매듭으로 옹이 진 순간도 있다. 그러나 다 지나간 일이고 각자 입장이 다르고 그때그때 사정도 있었겠지 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요즘은 대가족이 모이지 않아 아쉽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남편이 미리 내려갔으니 나는 걱정 없이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 옵션을 뒤적거린다.
원체 시어머니는 나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는다. 어머니는 누구의 일처리도 믿지 못하고 본인이 하셔야 직성이 풀리신다. 차례 음식 준비에는 중요하지 않은 대목이 없기 때문에 끼어들 틈이 거의 없다.
이제는 어머니의 차례상이 오래 갈수록 좋은 거라는 걸 알겠다. 그만큼 어머니가 정정하시고 또 우리에게도 별 일이 없다는 뜻이니까.
내일 밤에 날이 개어 보름달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가끔 글에 쓰는 1기 신도시의 마샤 스튜어트 C 언니는 명절을 지내러 가지 않는다. 언니는 명절이면 일하러 가는 우리들을 위해 집밥을 차려주기도 한다.
작년 추석 연휴를 앞뒀을 때다. C 언니가 송편이 먹고 싶지 않냐며 재료를 다 준비할 테니 추석 전주쯤 모여서 송편을 빚자고 했다. 나를 포함한 다른 여자들이 일제히 송편 트라우마를 이유로 언니를 힐난했고 송편 빚기 모임은 무산되었다.
그나저나 시가에서 추석을 보낼 때는 코앞에 송편이며 전이 잔뜩 쌓여 있어도 거의 먹지 않았는데 혼자 추석 전야와 추석날 아침을 보낸다 생각하니 갑자기 송편도 먹고 싶고 잡채도 먹고 싶고 이것저것 다 먹고 싶다.
추석 이틀 전인데 오늘 떡집에 가면 깨송편 한 팩이랑 밤과 잣이 든 약식 한 팩 정도는 살 수 있겠지?
개를 데리고 산책루트 1번으로 가다가 긴 꼬리 모양으로 루틴에서 빠져나와 동네 떡집 앞으로 갔다. 떡이 가게 밖에 있으면 바로 사려고 했는데 매장 안에 몇 개만 진열돼 있다. 길가에서 개를 끌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 사장님이 내일 아침 여덟 시에 새 떡이 나온다고 큰소리로 알려주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가 봐야겠다.
널려 있어도 안 먹던 송편을 굳이 사려고 하다니 사람은 참으로 간사한 동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