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린 비가 그친 이른 아침에 개산책을 다녀온 남편의 손에 달팽이가 있었다.
아파트 안 숲길에서 달팽이들이 밟혀 죽은 것을 보고 '혹시 달팽이가 길에 나와 있으면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이걸 어쩌려고 하냐니까 오늘 하루만 지켜보고 놓아준단다.
사각 유리용기에 오이를 얇게 썰어 깔고 달팽이를 살살 내려놓았다. 우리는 작은애가 유치원에서 받아온 백와달팽이 '달봉이'를 키운 적이 있다. 아이 손바닥 안에 들 만큼 작던 달봉이가 내 손보다 커질 때까지 몇 년을 함께 했는데 갑자기 추워진 어느 날 아침에 죽었다.
그때 커다란 사각형 어항에 계곡에서 주워 온 돌멩이와 흙도 놔주고 풀도 심어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달봉이를 키웠다.
비가 오는 날에 나무 뚜껑을 열어주면 달봉이는 긴 더듬이를 공중으로 쭉 뻗으며 창쪽을 향했는데 마치 그 순간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야생의 작은 달팽이를 보며 달봉이를 떠올렸다.
진지하게 안경을 벗고 달팽이를 들여다보던 남편은 아무래도 상추가 있어야겠다며 일어섰다.
달봉이가 한창 자랄 때 외식을 하면 우리 테이블에서 남은 상추를 챙겨 온 기억이 났다. 달봉이는 상추뿐 아니라 당근, 배추, 애호박까지 골고루 잘 먹었다. 달팽이는 당근을 먹으면 당근색 변을 본다.
하루만 보고 데려다 놓는다던 달봉이 2가 온 지 일주일이 됐다. 손톱만 한 것이 상추와 배춧잎을 너무 잘 먹고 똥을 엄청 많이 싸 놓아서 깜짝 놀랐다. 남편은 껍질 만드는 데 필요하다며 달걀 껍데기도 씻어서 넣어 주었다.
달팽이는 주변에 수분이 부족하면 막을 치고 껍질 안에 숨어서 버틴다. 유리용기 안이 건조하지 않게 가끔 분무기로 물을 뿌렸다.
남편이 하도 정성을 들이길래, 저러다 달봉이 2를 놔주는 대신 달봉이 2의 친구로서 달봉이 3을 하나 더 걷어 오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뜻밖에 남편은 일주일 만에 눈에 띄게 커진 달봉이 2를 배춧잎에 올려서 원래 있던 자리에 데려다 놓고 왔다. 앞으로는 길가에 내려오지 말고 살아라, 이번에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유리벽 안에 갇혀서 보드라운 상춧잎을 먹고 인공비를 맞고 티브이 화면의 번쩍거리는 빛을 보던 일주일을 달봉이 2는 어떻게 기억할까.
그야말로 성진이와 팔선녀의 구운몽이며 한여름밤의 꿈이 아닌가.
지구에서 아등바등 사는 인간들이 사실은 커다란 외계 생명체가 취미로 만든 비바리움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외계인 여자애가 우리가 사는 지구를 내려다보며 자기와 똑같이 생긴 친구에게 자랑했다.
80억 지구인과 아름다운 블루마블이 겨우 거대 외계인 종족의 놀잇감이라는 공상은 자기비하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인생이 너무 허망하게 느껴진다. 누군가 재미 삼아 손가락으로 태평양을 휘휘 저어서 해일이 일어나고 죄 없는 사람들이 죽는다고 생각하면 말이다.
지구를 둘러싼 우주라든가 인간의 운명이나 내세 같은 것은 '알 수 없음 영역'으로 남겨두는 게 낫다. 그 불확실함으로 인해 사이비 종교가 끝도 없이 발생해서 민폐를 끼친다는 단점이 있지만 각자 믿고 싶은 방식에 맡기는 편이 외계인의 장난감이라는 가상보다는 훨씬 좋다.
한번 사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우리에게 일주일 간 사육 당해 본 달팽이는 갑작스러운 죽음의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지만 자유로운 삶을 찾아서 행복할 수도 있고 달콤한 상추와 배추를 맘껏 먹으며 천적으로부터 보호되는 안락한 유리벽 안의 삶을 원했을 수도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강남 신축 아파트에 사는 것이 평생의 목표인 사람도 있고, 남이야 굶든 죽든 내 몸만을 잘 입히고 먹이는 데 열중인 사람도 있다. 반면에 늘 남에게 베풀면서도 끝없이 할 일을 고민하는 사람도 있고 어렵게 모은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삶의 방식도 범죄가 아닌 이상은 탓할 수 없다.
남들은 알아서 살겠고,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달팽이가 결국 달팽이답게 살아야 한다면 인간인 나는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청소년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의(義)에 민첩한 군자가 될 것이냐 이(利)에 민첩한 소인이 될 것이냐' 같은 거대한 화두는 접어두더라도 그나마 '인간답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살아가는 동안 나를 일깨울 필요가 있다.
조그만 달팽이가 비가 치고 바람이 이는 험난한 숲에서 용감하게 살아가듯이 줏대를 꼭 쥐고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