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의지와 다르게 오해를 받은, 진짜 억울해서 잊을 수 없는 일이 누구에게나 있을 거다. 나는 10년이 다 돼 가는 그날 오후가 아직도 억울하다.
한창 복잡한 시간에 아이들을 데리러 학원가에 갔었다.
학원가를 관통하는 8차선쯤의 큰 도로에서 우회전으로 진입하는 좁은 도로 위였다. 거기는 왕복 2차선이고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가 있는 곳이다. 학원들이 밀집한 거리의 중간쯤에 있는 길이라서 항상 보행자가 있다. 그날도 우회전을 하려고 막 꺾었을 때 엄마와 초등 저학년쯤 된 아이가 길을 건너기 위해 블록에 내려와서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을 먼저 가게 하려고 멈췄다. 엄마와 아이는 내가 브레이크를 밟자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뒤로 막 붙은 차가 클랙션을 크게 울렸다. 갑작스럽고 공격적인 소리에 아이는 깜짝 놀랐고 내 차 보닛 앞쯤을 지나던 아이 엄마는 뭐 저런 여자가 있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니, 내가 누른 게 아니라고요, 나는 억울한 표정을 열심히 지었지만 그녀에게 제대로 어필이 된 것 같지는 않다.
뒤차의 운전자도 덩치 큰 내 차에 가려진 행인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왜 안 가냐고 경적을 울렸을 것이다. 그 사람도 모녀가 내 차 앞을 다 지나갔을 때에야 보행자가 있었음을 알고 좀 기다리지 않고 클랙션을 울린 게 머쓱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덕에, 먼저 건너라고 멈춰 서 놓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그것도 아이를 데리고 걷는)에게 빵빵거린 이상한 여자로 오해받았다.
아이 손을 잡은 엄마의 눈초리가 생생하다. 아, 다시 생각해도 억울하네.
친구네 집에 갔을 때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가 막 탔는데 현관을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같이 가세요!" 하며 뛰는 여자를 보고 나는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워진 나는 그 사람을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버튼을 계속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그녀의 눈앞에서 냉정하게 닫히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봤더니 친구네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우리 아파트와 열림 닫힘 버튼 위치가 반대였다. 나는 습관적으로 우리 집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 부분을 눌렀고 문이 닫히기 시작했지만 그게 열림 버튼이라고 믿은 나는 담힘 버튼을 연사 클릭 한 것이다.
한 번만 버튼을 확인했다면 달랐을까? 나는 지금도 처음 타 본 엘리베이터에서는 비슷한 바탕에 돋을무늬로만 새겨진 ◀ ▶ 와 ▶ ◀ 를 헷갈리는데 이미 닫히기 시작한 엘리베이터가 내가 판단하는 그 찰나를 기다려주었을까?
무엇보다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가 문제였다. 자기가 달려오면서 같이 가자고 외쳤는데, 자기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담힘 버튼을 누르고 올라가 버린 여자를......
나의 몽타주를 그려서라도 꼭 찾아내서 꿀밤을 때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엘리베이터가 멈춘 층을 보고 그 층에 사는 내 친구 포함 이웃들의 비양심을 질타했을지도 모르니, 나의 무의식적 손놀림은 여러 사람에게 오해와 오해를 일으킨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노스님과 귀부인' 이야기가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읽은 그림책 <달을 줄 걸 그랬어>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이다.
노스님과 젊은 스님이 길을 가는데 깊은 도랑을 만났다. 스님들이 바지를 걷고 도랑을 건너려는데 옆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귀부인이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노스님이 귀부인에게 업히라고 한 다음 등에 업고 도랑을 무사히 건넜다. 반대편에 이르러 부인을 내려놓자 부인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자기 옷만 탁탁 털어내고는 쌩하고 가 버렸다.
두 스님은 가던 길을 계속 가는데 젊은 스님은 아까 일을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한참 동안 씩씩거리던 젊은 스님이 노스님에게 말했다.
- 아니, 아까 그 부인말입니다. 너무 이기적이에요. 스님께서 그렇게 도와줬는데 고맙다는 말도 없이 가
버리다니요.
노스님은 조용히 말했다.
- 스님은 아직도 그 부인을 업고 계시나? 나는 벌써 내려주었다네.
사소한 억울함을 오래 기억하는 나 같은 소소한 존재들이 정기적으로 떠올려야 할 이야기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다'는 노랫말이 있다. 지나간 일의 의미만 가볍게 주머니에 넣고 등에 업었던 귀부인은 도랑가에 내려놓고 훌훌 내일로 걸어간다면, 누구보다 좋을 사람은 나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