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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타와 제비다방

by 이명선

개산책도 할 겸 핸드 드립용 종이필터도 살 겸 커피용품 아웃렛까지 걸어갔다. 아파트 단지들 사이로 늘어진 산책로를 따라 왕복 5km쯤이다. 그 길에서는 언제나 사이좋게 함께 있는 청둥오리 부부와 늘 외롭게 혼자서 물줄기를 응시하는 왜가리를 볼 수 있다.


나는 3-4인용 하리오 드리퍼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내가 디카페인을 먹고 싶을 때 남편과 둘이 커피를 마시려면 두 번을 나눠서 내려야 해서 번거로웠다.

마침 매장은 이월상품 및 전시상품 세일 중이었다. 천 원에 파는 플라스틱 드리퍼가 눈에 띄었다. 칼리타 제품이었다. 드리퍼 하나를 더 살까 하던 참에 잘 됐다.


내가 가진 하리오와 새로 사는 칼리타는 모양이 달라서 필터도 전용제품으로 사야 하는 점이 아쉬웠다.

작은 개산책 가방에 원래 사려던 필터 한 봉지에다 새 드리퍼와 그 필터까지 들어서서 지퍼가 반만 잠겼다.



집에서 드립커피를 마신 것은 일 년이 채 안 된다. 전에는 가정용 드롱기 머신과 캡슐 머신을 썼다.

드롱기는 카페의 커피 머신처럼 원두 가루를 담은 도구(포터필터)를 끼워 기계의 압력으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방식이다. 맛은 있지만 사용할 때마다 포터필터와 추출구를 씻어야 한다. 원두가 든 캡슐을 끼우기만 하면 되는 캡슐 머신은 사용법과 관리가 간편하지만 맛이 좀 떨어진다.

동네 카페에서 드립백을 사다 먹으면 맛과 편리성 측면에서 타협이 된다. 그러나 개당 가격이 거의 1500원, 2000원이라 원두가루만 넣은 제품치고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단점들을 보완하며 찾은 것이 핸드 드립이다. 200밀리 정도의 드립커피 한 잔은 보통 원두 15그램을 쓰는데 홀빈 원두 1kg을 사면 약 65인분이다. 나는 원두 1kg을 25500원에 사니까 한 잔 마실 때마다 원두는 400원, 종이 필터는 50원이 든다.

내가 마시는 커피 원가라서 단순히 원두값+필터값만 계산했다.


핸드 드립을 따로 배우지는 않았다. 유튜브에서 보고 제미나이의 조언을 받았다. 그리고 드립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볼 기회가 생기면 열심히 관찰했다.

바리스타마다 핸드 드립을 하는 스타일이 다르지만 전자저울과 온도계, 타이머, 계량컵을 이용하고 한 잔의 커피를 우리는 데에 정성을 들이는 건 비슷하다. 구경꾼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나는 매번 계량할 필요가 없게 커피 스쿱을 정해 놓았다. 그리고 눈금이 그려진 유리컵에다 일정한 양을 내린 후 그때그때 먹고 싶은 대로 농도만 조절해서 그 컵으로 바로 마신다. 그렇게 하면 드립 커피를 내려받을 서버도 필요 없다.


그리고 어쩐지, 설렁설렁할 때보다 여유를 가지고 공을 들여 내리면 좀 더 맛있는 것 같.



왼쪽부터 하리오, 칼리타 드리퍼




우리나라에 처음 서구 커피 문화가 들어온 것은 19세기말이다. 그 무렵에는 서양에서는 원두를 한약처럼 끓여서 거른 원액에 설탕이나 우유를 넣어 달게 만들어서 마셨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황실과 관료층, 외교관이나 선교사 같은 외국인들이 그런 방식으로 끓여 낸 커피를 즐겼다.


해외 공사와 궁궐이라는 공간에서 호텔로 넘어온 커피 문화는 구한말을 그린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엿보인다. 그리고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모던보이>에서는 커피가 독립된 형태의 카페로 나와서 사람들과 한층 가까워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 커피사를 말할 때 '제비 다방'은 빠지지 않는다. 이상의 단편 소설 <날개> 속 인물의 모티프로 추측되는 이상과 그 아내가 함께 운영했다는 '제비'는 그 시절의 문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든 공간으로 유명하다.


나는 드립 커피를 마시면서 1930년대 겨울, 종로의 제비 다방을 상상한다.

전통 한복의 루즈 핏과 정반대로 몸에 잘 맞는 모직코트를 입은 손님들이 모자와 머플러를 쓰고 들어온다. 다방 안은 난로 같은 걸로 난방을 했지만 공기는 여전히 썰렁했겠지. 길가를 내다보는 넓은 창에는 외풍을 막는 두꺼운 벨벳커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끔찍하게 길었던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가장 어둡고 춥던 그 무렵에 과연 커피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조국의 현실에 슬퍼하는 예술가든 조국의 처지 따위 상관없이 청춘을 소비하는 부유층이든 저마다의 가슴에는 미처 녹여내지 못한 고민이 있었을 게다.

그 어떤 날의 제비 다방 커피는 한 모금조차 뜨겁고 썼을 것이다.


제비 다방이 있던 1930년대는 커피 한 잔을 마실 돈으로 국수 다섯 그릇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99년에 우리나라에 스타벅스 1호점이 개점했을 때 톨사이즈 아메리카노는 3000원 정도였는데 짜장면 한 그릇과 가격이 비슷했고 당시의 최저시급은 1525원이었다. 두 시간을 일해야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을 사 먹을 수 있던 셈이다. 스타벅스는 비싸다는 인식이 생긴 이유이다.

2025년 말 현재는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tall이 4700원이고 최저시급은 10030원, 짜장면 가격이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보다 두 배 정도 비싼 지역이 많다.

1500원 커피 프랜차이즈도 곳곳에서 문을 열고 우리를 기다린다.


어쩌면 이 시대에 커피를 좋아하는 건 행운일지도!



챗지피티가 그려준 제비다방의 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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