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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Mar 07. 2023

네가 시래기를 몰라보고 감히

내 생애 최고의 슬로푸드 경험담

 작년 늦가을에 지인이 시댁에서 가져온 시래기를 줬다. 반쯤 말린 건데 좀 더 말려야 할 거라고 했다.

 그동안엔 시어머니로부터 삶은 시래기를 얻어먹은 경험만 있어서 시래기를 널어서 말리는 것부터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발코니의 빈 빨래 건조대에 겨울내내 시래기를 펼쳐 널어 두었다. 여유롭게 널린 시래기를 볼 때마다 뭔가 살림을 잘하는 프로주부 같은 느낌이 들어 뿌듯했다. 내가 SNS를 즐겼다면 차가운 겨울 햇빛을 가득 받는 시래기 사진을 포스팅했을 것이다.  

 바싹 마른 가루가 우수수 떨어지는 것은 별로였지만 참을만했다. 시래기가 잘 말랐다고 생각됐을 때 큰 김치통에 넣어두고 바닥을 청소했다.  

 

 나는 이제 집에서 시래기를 말려서 반찬해 먹는 남부럽지 않은 주부가 될 것이다.


  



 주부들은 오후 서너 시쯤 되면 저녁에 뭐 해 먹나를 생각하게 된다. 어제 오후 3시에도 저녁 반찬을 생각하다가 말린 시래기가 생각났다.

 남편하고 둘이 먹는 저녁밥이니 시래기 된장국을 끓이고 시래기나물도 하고 그렇게 유기농적으로 먹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어젯밤, 나는 찬물에 푹 담가 둔 시래기를 그대로 두고 자야 했다.

 겨우내 말린 시래기는 오후 3시에 꺼내서 그날 저녁에  반찬으로 먹을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다.

 

  밤새 불려도 모자랐던 것이다.



 

 

 오늘 아침에 보니 시래기가 부드럽게 흐느적거리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다음은 삶기 단계였다. 인터넷에 30분 정도 삶으라고 돼 있어서 일 년에 몇 번 안 쓰는 곰솥을 꺼냈다.

 30분 타이머를 맞춰 놓고 다음 과정을 찾아보니 삶은 후엔 그 상태 그대로 뚜껑을 덮고 3시간 정도 두라고 한다. 그러고 나서 깨끗하게 서너 번 헹궈서 꼭 짜고 다시 겉줄기의 껍질을 벗긴다.

 그러면 이제부터 요리 재료로 쓸 수 있다. 식재료로서의 다음 단계는 없었기 때문이다.  

 된장국으로 먹기 위해 이틀을 신경 써야 한다니 슬로푸드도 이런 슬로푸드가 없다.


 앞으로 시래기 요리를 볼 때마다 밭에서 거둔 무청을 밥상에 올리기까지의 기나긴 여정과 수고로움을 떠올리며 시래기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 같다.

     

하룻밤 불린 시래기를 삶는 단계

 




 시래기뿐만이 아니라 우리 할머니쯤의 옛날 주부들이 매일 다루던 식재료는 엇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자식도 많고 때로는 시어른들도 모시고 어쩌면 생계까지 책임지면서 말이다.

 정말이지 그녀들은 수퍼우먼이었다.

 

 시래기를 케어하는데 갑자기 막 구운 피자가 먹고 싶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매우 이른 아침에 누룽지를 먹고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다. 한번 피자 생각이 나니 더욱 배가 고팠다.

 운 좋게도 우리 아파트 길 건너에는 제법 맛있고 깔끔한 피자집이 있다. 감자와 사워크림이 잘 어울리는 블랙맘바포테이토 피자 레귤러 사이즈를 전화로 주문하니 15분 후에 가지러 오라고 한다.

 속 시원한 패스트푸드다.  2023년에 사는 것이 감사할 지경이다.


 지인이 내 하소연을 듣고 깔깔거리며 '그래도 건강하고 맛있잖아'라고 한다. 그렇긴 한데 이틀 내내 이렇게 마음과 품을 팔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오늘 저녁에는 진짜 시래기 된장국을 먹을 수 있는 거겠지?

 시래기 무서운 줄 모르고 덥석 종이봉투 가득 시래기를 안아 온 작년 가을 이후의 여정을 오늘 끝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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