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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Mar 31. 2023

소박한 살림의 재미

오늘은 살림하는 날

 늦은 아침을 먹고 주방에서 꼼지락거렸는데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다.

 말 그대로 살림이란, 하면 티가 안 나고 안 하면 티가 나는 일인데도 뭘 좀 하다 보면 시간이 후루룩 지나가 버린다.


 싱크대 위에 아무것도 없는 주방 사진에서 감동을 받은 후, 나도 싱크대 주변에 가급적 물건을 두지 않으려 노력한다.


 각 주방 용품의 자리를 싱크대 수납장 안에 정해 두고 역할이 끝나면 자리로 들어가 쉬게 한다.   

 전기밥솥은 취사가 끝나면 유리 용기에 1인분씩 옮겨 담고 하부장 전용자리에 둔다. 행주, 수세미, 주방용 세제 등도 직사각형 통(몇 년간 안 쓰게 돼서 버린 전기 찜기의 구성품이었다)에 담아서 싱크볼 아래쪽에 두고 사용할 때만 꺼내 쓴다. 주방 창가에 널었다가 마르면 다시 그 자리에 넣는다.


전기밥솥 아래 깐 것은 인터넷에서 산 식탁 매트, 받아보니 비닐 같은 재질이어서 깔개로 전환했다

 

 냄비 받침과 냄비 손잡이도 카페에서 받은 튼튼한 종이캐리어 안에 정리해 싱크대 아래 냄비들 앞에 둔다. 하루 한두 번 쓸 때만 꺼내고 다시 넣는다.

 

 습관이 되니 번거롭지 않고 자연스러운 동선이 되었고 주방은 한결 깔끔해졌다.


 평소에 우리가 주방 위에 놓고 지내는 물건들은 실제 사용하는 시간보다 훨씬 오랫동안 밖에 늘어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냉장고 안을 살펴보았다.  

 

 시어머니가 주신 자두액을 적당한 유리병으로 옮겼다. 카페의 그릭요트 병이었는데 뚜껑이 없어서 종이포일과 고무줄로 대강 만들었다. 자두액은 매실액처럼 요리의 단맛에도 쓰고 냉수에 타서 마시기도 하는데 가족들은 단 것을 안 좋아해서 마시는 사람은 나뿐이다.

 

 살림에 관심이 없었을 때는 어머니들이 주시는 것들의 가치를 잘 몰랐다.

 음식 할 때 넣으면 단순한 단맛보다 특유한 맛이 같이 나는 매실액도 싫었고 국산 들깨로 짰다는 들기름 냉장고가 아닌 실온에 두다가 버리기도 했다.


 이제는 시댁에 가면 내가 먼저 "어머니, 저 뭐 주실 거 더 없으세요? 저희 가고 나서 생각났다 하시지 말구요" 한다. 어머니는, 줄 게 뭐가 있을까, 하시면서 굉장히 좋아하신다.


 

시원시원한 시어머니의 글씨체, 어머니들에게 '엑기스'라는 말은 마법이다

 


 얼마 전에 집에 놀러 오신 친정엄마가 큰 장바구니에서 반찬이며 화장품이며꺼내더니 큰 유리병에 든 미강가루라는 것을 주셨다. 이런 걸 또 어디다 쓰라고 자꾸 갖고 오나 싶어 짜증부터 났다. 내 취 아닌데다 없어도 되는 물건들을 주는 건 반갑지 않다.

 

 제발 무겁게 이런 거 들고 다니지 말라고 막 들이대 놓고는 엄마가 가시고 나니 죄송했다.  

 미강가루가 뭔가 찾아보니 천연팩으로 이만한 재료가 없다고 한다.

 

 냉동실에 두고 오래오래 잘 써야겠다.


  

너무 낯익은 친정엄마 글씨체, 맨날 통지표에다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라 쓰시던...


 

  



    

 봄을 맞아 연보라색 고무장갑을 샀다.

 한국 부엌의 터줏대감인 빨간 고무장갑보다는 조금 비싸도 여러 색깔의 고무장갑을 사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연보라색 고무장갑과 막 빨아 놓은 노란 행주가 햇살에 몸을 말리는 나의 주방 한쪽이다.

 앞으로 길쭉한 ㄱ자 구조라서 한 눈에 주방 전체가 들어오지는 않는다.

 전형적인 2베이 구축 아파트는 거실에서 주방이 잘 안 보이기 때문에 급히 집안을 치워야 할 때(갑자기 누가 온다든지 해서) 주방 상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거실 대면형 주방인 집에 가면 훤히 보이는 개방감이 있는 반면 항상 주방 정리를 해야 된다는 약점도 있다.


 오래 못 만난 친구가 나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


 나는, '나가서 놀기와 집에서 살림하기의 밸런스를 맞추며 잘 살고 있다'고 답했는데 그 답이 무척 맘에 든다.      




행주가 일광욕 마치고 자리에 들어간 다음에 찍을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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