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지도...
내 일자리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싱가포르 이주를 결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년간 쉼 없이 살아왔으니 지인들은 잠깐은 쉬어도 된다고, 그리고 너무 좋은 기회라며 축하해 주었지만, 난 내심 불안했다. 경제적으로는 와이프 수입으로 한동안 버틸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 불안감의 근원이 어디인지 탐색하다, 내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난 운동이 좋았다. 야구, 축구, 농구 등 가리지 않고 좋아했고, 꽤 잘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 운동장에서 뛰어놀다, 육상부를 맡고 계시던 한 선생님에게 눈에 띄어 육상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부푼 가슴을 안고 대회에 출전하는 날, 어머니는 수업도 빠지고 육상대회 나가냐고 큰소리로 날 혼내셨다. 난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도 제대로 못한 채 쉽사리 문을 열고 나가지도 못하면서 그 좁은 현관에 한참을 서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운동을 즐겨하는 게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 당연히 그 대회 성적은 좋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운동이 좋았던 나는 제대로 가르치는 코치가 없었음에도 꾸준히 연습한 끝에 6학년에는 시 대회에서 높이뛰기 부문 1등에 입상하기도 했다.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는 배경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수재였다고 한다. 명문 중학교 중 하나에 교장 추천을 받아 무시험으로 입학하셨다. 그 학교에 농구부가 있었고 중학교 입학 당시 키가 꽤 컸던 아버지는, 명문대를 가고도 남을 성적이었을 텐데 무슨 속사정이 있었지 농구를 하게 되셨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 이후 키가 자라지 않아 재능은 충분했지만 국가대표급 선수가 되진 못하셨다. 대학에 진학하고도 선수가 아닌 코치를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들었다.
어느 한 은행 농구팀 코치 생활을 하시던 중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셨고, 나를 낳을 무렵 가족을 위해 코치를 맡던 은행에 입행해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셨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하셨던 것 같다. 늦은 나이에 입행하셨으나 실적이 좋아 근무 연차에 비해 빠른 승진을 하셨다. 내가 대학생인 무렵인 40대 중반에는 부지점장까지 승진하셔서 지점장 승진을 코앞에 두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당신이 맡고 있던 지점에 금전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대기발령받아 대기하시다 명예퇴직을 당하셨다. 그렇게 50대 초반에 20년 넘게 다니던 직장에서 나오시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직장인으로서도 코치로서도 그리 성공하시지는 못한 셈이다.
아버지 꿈은 건축가였다고 들었다. 꼼꼼한 성격이라 잘 어울리는 직업이었을 거 같다. 농구를 하지 않으셨다면 아버지 성향에 맞지 않은 코치가 되시지도, 가족을 위해 은행원이 되시지도 않고 본인이 선택한 길을 가셨을 거다. 아마도 사회적으로 더 성공하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버지 인생이 운동으로 ‘꼬인 거 같다’며 아버지를 안타까워하셨고, 나도 아버지와 비슷한 길을 걸을까 싶어 운동에 가까워지지 않게 단속하셨던 것 같다. 오죽하면 육상부 담당 선생님께 초등학교 학생부에 육상 입상 기록을 모두 지워달라고 하셨을까.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도 한다. 그 선택에는 본인 선택만이 아니라 부모의 선택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최근에야 깨닫게 되었다. 난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다. 부모님 뜻에 따라 꿈도 꿀 수 없었기에 학창 시절 취미로 운동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난 아버지처럼 인생이 ‘꼬일까 봐’ 운동을 직업으로 선택할 수 없었다. 실패할까 두려워 대학도, 직장도, 늘 안전한 것만 선택했다. 입시 점수에 맞춰 안전하게 싫지 않은 학과를 선택했고 그 학과에 맞는 안전한 직장에 별생각 없이 입사했다. 부모님에게 걱정은 끼치고 싶지 않았고, 꼬였다는 아버지보다는 더 잘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런 배경 때문에 한국을 벗어나 싱가포르로 이주한다는 게 불안했다. 내키지 않았다. 안전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꼬일 수 있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몇 주전, 와이프와 둘이 저녁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런데 와이프와 이 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부모님을 원망하고 있는 거 같았다. 인생이 살다 보면 꼬일 수도 풀릴 수도 있지, 왜 부모님이 정한 길로 날 살아가게 했는지 속상했다. 하지만, 나도 부모가 되고 보니 왜 내 부모님이 내게 왜 그렇게 가르치셨는지 이해가 됐다. 부모로서 자식이 힘들 일 겪지 않고, 잘 되는 거 보고 싶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으로 바뀌었고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서러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섞인 채 한참을 울었다. 그러자 와이프는 '괜찮다고. 잘할 거라고' 날 다독였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자 부모님 곁을 떠날 용기가 생겼다. 당연히 자식으로서 잘 사는 모습 보여드려야 한다. 하지만, 힘든 일 좀 생기더라도 난 괜찮다고, 나도 이제 어른이라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부모님께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거 같다. 이렇게 더 어른이 되어 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