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이 쌓일수록 이직은 조심스럽다
나는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 지는 몰라도 이직을 여러 번 했을 뿐 아니라 사내에서 직무도 여러 번 바꾸었다. 2년 남짓 다녔던 L사에서, 2번, D사에서 1번, 그리고 지금 회사에서 1번 직무가 바뀌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이직했던 숫자까지 합치면 내가 경험한 직무는 7개나 된다. 즉 20년 가까이 직장 생활하면서 최소 7번 이상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업무를 시작했다는 뜻이 된다. 주니어 시절에는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는 것 자체가 좋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런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러나 처음 매니저로 일했던 J사부터는 이직 또는 직무 변경이 쉽지 않은 과정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매니저부터는 실적을 내야 하는 책임이 있고 실적을 내지 못하면 더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일즈 특성상, 업무를 하는 프로세스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실적이 나오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프로세스가 조금 매끄럽지 못하다 하더라도 좋은 실적이 나오면 그걸로 족하다. 실적이 최고다. J사에서 난 일은 잘했을지는 몰라도 실적을 내지는 못했다. 세일즈로서 고객과의 Engagement뿐 아니라 사내 Stakeholder의 Engagement도 잘 해냈고, 새로운 세일즈 프로세스를 동료들과 함께 이끌어 가면서 성과를 냈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본사 결정으로 내가 맡았던 비즈니스를 미국을 제외한 모든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당장 내 자리부터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만약 탁월한 비즈니스 실적을 거두고 있었다면 한국 시장 철수도 보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정도의 실적으로는 한국 시장을 지켜낼 수 없었다 그 이후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좋은 기회도 있었고, 나를 위해 매니저가 자리를 만들어주려고도 했으나 그 당시에는 새로운 회사에 가 다시 도전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안 좋은 기억이 있을 수밖에 없는 회사를 떠나 새로운 출발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렇게 T사로 옮겨 다시 새로운 업무를 맡았다. 여기서는 일이 너무 잘 풀렸다. 세일즈로 일하는 3년간 탁월한 실적을 냈다. 내가 리드하려는 방향으로 모든 주변 여건이 맞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경쟁이 치열해져 고객사에 공격적인 제안을 해야 할 때 H 사장님이 내가 이끌던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서포트해 주셨다. 세일즈 경험이 많은 분이어서 합리적인 수준에서는 세일즈에 힘을 실어주는 분이라 가능했다. 또 다른 한 고객사는 내가 그 업체를 맡았던 3년간 우리 회사와의 비즈니스를 고객사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이 고객사는 내가 맡은 3년간 설비 Capa를 두 배 이상 증설했다. J사에서 오히려 더 많은 노력을 했으나 주변 여건이 받쳐준 T사에서의 성과가 훨씬 더 좋았다. 그리고 이 탁월한 성과 덕에 지금 자리도 얻을 수 있었다. H 사장님이 지금 자리에 적극적으로 밀어주셨기 때문이다. 너무 재미있지 않은가? 내 노력과 관계없이 주변 여건에 따라 내 성과가 달라지고, 내 커리어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게? 그리고 날 밀어줄 강력한 스폰서도 얻을 수 있다는 게?
그런데 새로운 직장에 가면 내 능력을 성과로써 다시 증명해야 한다. 내가 과거에 이룬 성과를 알아주는 H사장님 같은 분이 새로운 직장엔 없기 때문이다. 내가 과거에 해낸 많은 것은 과거의 일일뿐, 그리고 새로운 직장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히려 전 직장에서 실적이 탁월했다면 기대치가 높을터, 더 많은 성과를 이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이 잘못되면 회사를 떠나야 할 수도 있다. 실적을 내는데 주변 여건이 따라줘야 하는 등 운이 많이 작용한다는 걸 감안하면 이직하려는 자리가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을 경우 이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리스크가 크니 망설일 수밖에 없다. 즉 Senior 경력자로서 이제 나는 새로운 회사에서 탁월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지 않으면, 그리고 은퇴할 때까지 현금 흐름을 감안한 금전적인 이득이 월등하지 않다면 이직을 결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결론적으로 경력이 쌓일수록 성공적인 이직을 위해서는 고려해야 할 게 많아진다. 특히 경력이 10년 차를 넘어 15년 이상이 되었다면 더 조심스럽게 된다. 그런 분들은 아래와 같은 걸 고민해 보면 좋겠다.
1. 현 직장에서 내가 이룬 성과를 면밀히, 객관적으로 파악한다.
2. 회사 내에 지금 어필할 수 있는 성과가 없다면 이직을 고려해 본다. 성과도 유효기간이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에 이룬 걸 지금 써먹을 수는 없다.
3. 회사에 나의 스폰서가 있는지 생각해 본다. 회사에 어필할 수 있는 유효한 성과가 있다 하더라도 그 성과를 뒷받침해 줄 스폰서가 없다면 이직을 생각해 볼만 하다.
4. 유효한 성과, 스폰서 모두 갖춰져 있다 하더라도, 새로운 직장의 오퍼가 탁월하다면 이직을 고려해 본다. 이때 급여, 승진 기회, 회사 명성 등을 고려한다.
5. 이직은 위험하지만 새로운 기회를 주기도 한다. 내가 데워지고 있는 냄비 안의 개구리 신세는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본다. 밖은 위험하지만, 뜨거운 물 안에서는 살 수가 없다.
6. 마지막으로 내가 도달할 수 있는 혹은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직급/직책의 한계도 생각해봐야 한다. 누구나 대표이사가 될 수 없으며 그리고 모두가 다 대표이사가 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즉 이직할 때에는 내 능력과 성향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세상은 넓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하지만, 나와 맞는 일, 나를 인정받게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현명한 이직러가 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