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고 행복했다
살이 쪘다. 싱가포르에서는 느끼지 못할 어머니 맛, 장모님 맛을 안 볼 수 없으니 생기는 일이다. 불과 몇 주 전 싱가포르에서 입던 바지 하나는 도저히 입을 상태가 되지 못해 봉인해 두었다. 배불뚝이 40대 아저씨가가 되어 거리를 활보할 형편이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 곧 사라질 배라고 믿는다.
라운드를 3번 더 했다. 스코어를 떠나서 동반자, 그리고 날씨가 너무 좋았다. 선선한 바람, 그래도 아직은 따뜻한 햇볕, 수려한 경치, 무엇 하나 빼기 어려운 가을 골프의 절정을 느꼈다. 물론 생애 첫 언더파를 기록했다는 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일이긴 하다. 게다가 그 스코어를 이뤄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꼭 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다기보다, 어디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한 타씩, 그리고 한 홀씩 플레이했다. 때문에 평생 이 스코어를 다시 보지 못해도 그렇게 아쉬울 거 같지는 않다. 결과도 그렇지만 과정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오래 보지 못한 지인을 몇 명 더 만났다. 내 첫 직장 생활의 사수, 그리고 지금은 임원이 된 H형님, 어렵게 시간을 내어 만났다. 용인에서 서울 서쪽 끝까지 가느라 고생은 했지만, 그럴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다. 늘 일에 진심인 이 분을 보면 회사라면 꼭 붙들고 있어야 할 사람이구나 싶고, 그래서 임원이 되었나 싶다. 예전 서클에서 같이 활동했던 선배도 만났다. 5~6년 전부터 서로 근처에 살게 되어 가깝게 지냈던 선배다. 요즘 핫한 햄버거를 먹고, 선배의 카 컬렉션 시승을 했다. 그중 하나가 BMW750i 2017년 식으로 기억하는데 4.4리터 터보 엔진을 장착한 놈이다. 아마 몇 년이 지나면 다시 보지 못할 ‘엔진’일지도 모르는 이 차에 황송하게도 뒷자리에 태워주셔서 시승을 해봤다. 내 기준에 모든 게 완벽한 차였지만, 가장 놀랐던 건 오디오 시스템이다. B&W 스피커를 장착했다 한다. 말이 필요 없다. 끝내 준다.
작년까지 근무했던 사무실도 방문했다. 사람이 별로 없는 것 말고는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 다만 사무실 주변은 썰렁했다. 자주 가던 밥집, 여러 개가 문을 닫았다. 한식 뷔페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무실 건물 바로 옆에 위치한 스타벅스도 문을 닫았더라. 그래도 자주 가던 골프숍은 그런대로 유지를 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사장님하고 인사를 하고 장갑 몇 개, 와이프에게 줄 골프 우산을 샀다.
주말에는 서울 근교 양평 카페에 들렀다. 잔잔히 흐르는 강가에 있는 카페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우리 아이들 웃음소리를 듣는데, 눈물이 났다. 한국에 와서 만났던 사람들,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 친구, 선배, 지인으로부터 받았던 따듯한 환대 때문이었다. 행복이란 게 별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좋은 감정이 행복을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한국 방문은 단순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난 여행이라기보다 지금까지 내 삶에 대한 성적표를 받는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행복을 느꼈고 지금까지 잘 살았다. 그리고 이 사실이 정말 감사하다.
곧 싱가포르 입국 시 제출할 PCR 검사를 받는다. 힘들어할 아이들 때문에 난항이 예상된다. 아무쪼록 싱가포르의 입국 정책이 변화되는 일이 없이 무사히 입국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