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으로 옮긴 지 이제 1년이 조금 넘었다. 내가 그동안 생각해 오던 커리어 방향과 일치했기에, 안정적인 대기업을 떠나 스타트업에 오게 된 걸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대기업과는 너무나 달라 매우 힘든 1년을 보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 볼까 한다.
조직 역량이라는 게 없다. 어렴풋이 나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뭐 하나 갖춘 게 없다고 봐도 좋았다. 입사할 당시 전 세계 직원이 200명이 넘었고, 주요 부서는 있었지만, 조직 역량을 발휘할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 여전히 빈 곳이 많이 보인다. 일례로, 새로운 전략이 조직 내에서 개발되는 건 불가능하다. 대표 본인이 눈으로 보고 깨달아야 그 전략이 실행 가능해진다. 조직 내 사업 방향을 잡을 전략 조직도 없을뿐더러 있다고 한들 대표를 설득할만한 인사이트를 가진 사람이 조직 내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사가 갖춰야 할 필수조직이 그나마 기능을 하면서 삐그덕 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려 할 뿐, 원활한 조직 운영을 위한 조직 역량은 없다.
언제 망할지 모른다. 따라서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게 가능하지 않다. 짧게는 70년, 길게는 200년 넘게 이어온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하는 것과는 다르다. 투자를 받았다고 한들 투자받은 돈이 다 쓰이면 회사는 파산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는 모른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많고, 만에 하나 회사가 잘 되면 내가 얻는 것도 더 커진다. 이런 다운사이드와 업사이드를 알고 들어갔지만, 정작 내가 생각하는 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는데 짧은 시간 내에 무엇인가를 이뤄야 하니 안 되는 게 너무 많았다. 앞서 말한 조직 역량 부족 때문인데, 나의 이런 고민을 대표가 잘 이해하지 못하니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았다.
오너 혹은 대표의 성향이 조직에 미치는 영향이 대기업에 비해 훨씬 더 컸다. 특히 내게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컸다. 내 자리가 바로 대표 밑이라 더 강한 압박을 받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조직을 관찰해 보니 대표가 손을 뻗치는 분야가 너무 컸고, 한마디 한마디에 조직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한 달 한 달 늘 생존의 압박에 시달리는 대표의 입장에서 보면 그래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망할 수도 있으니 대표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밀어붙일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 빠지니 나 스스로 입지가 줄어드는 걸 느꼈고, 내가 하고 싶었던 걸 하기는커녕 대표 말대로 생각 없이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난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그 둘 사이에서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시간의 개념이 다르다. 스타트업에서 1달은 대기업의 3~6개월에 해당할 정도로 많은 일이 벌어진다. 입사한 지 1년이 넘었을 뿐이지만, 이미 5년은 다닌 느낌이다. 그동안 이루 말하지 못할 만큼 회사 방향이 팍팍 바뀌었고, 많은 사람이 회사에 들어왔으며, 내 고민의 깊이는 대기업에 비해 10배는 더 깊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표는 더 많은 일을 하길 바라는 것도 최근에 꺠달았다. 불가능한 걸 해내야 하니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는 말. 더더군다나 나처럼 해외 시장을 가능한 짧은 시간에 개척해야 할 때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나려고 아주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의 밀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차이점을 나열하면서 깨달은 점 중 하나는, 결국 스타트업도 대기업으로 가는 길에 있는 것일 뿐이기에 스타트업이 틀렸고 대기업이 맞다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일 뿐이다. 스타트업의 가장 큰 우선순위는 생존하는 것이고, 생존을 하기 위해서는 이익을 낼 비즈니스 모델을 빠른 시일 내에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생존이 어느 정도 보장된 대기업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몸담고 있는 회사를 여전히 희망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대기업과 비교하면 너무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을 보고 경험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가 결국 대기업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 내가 중요한 기여를 하고, 그럼으로써 내 경험을 폭을 넓히고, 또 배울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고 있다. 아직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