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 라운드 막바지다. 공동 투자 건으로 공동 투자의 리드 투자자 계약서를 받았다. 예전에 썼던 다른 투자자 계약서와 많이 다르다. 시드투자임에도 비상임 이사 선임권이 있고, 기존 계약서보다 동의/협의권 범위도 넓다. 게다가 주식매수청구권이 많이 빡빡해 보였다.
자문 변호사인 후배인 A에게 계약서 검토를 부탁했다. 역시나, 주식매수청구권 같은 경우 혹시라도 일이 잘 되지 않았을 때 이해관계자인 내가 투자금을 변상할 확률이 아주 적지만 예전 계약서 대비 높다는 의견이었다. 게다가 요즘 스타트업 투자가 원활치 않고 사업이 잘 되지 않는 회사가 많이 A가 그런 케이스를 많이 본 모양이었다. 회사가 잘못되었을 때 회사가 책임지는 게 아니라 나까지 엮여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때문에 변호사 A 의견을 반영해 투자자에게 보냈다. 그러나, 투자자는 이렇게 많은 수정을 해온 경우는 처음이라며 '이쯤이면 투자를 안 받겠다는 이야기죠.'라는 반응을 보였다. 헛웃음이 나왔다. 투자를 안 받을 수는 없으니 어느 정도 절충을 하기로 하고, 처음 투자를 했던 후배에게 계약서를 보여줬다. "형, 이 정도면 빡빡한 것은 맞는데 한국 투자사들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계약서예요. 주식매수청구권은 건드리기 어려울 거고 동의/협의권 정도만 타협하세요."
요 일주일 이런 상황을 보면서 깨달은 게 있다. 변호사 의견은 변호사 의견이고 투자사 의견은 투자사 의견일 뿐이다. 의견을 듣고 "내가" 결정을 하면 될 뿐이라는 걸 말이다. 어떤 리스크가 있는지 전혀 모르면 곤란하지만, 리스크를 인지하고 우려하는 일이 터졌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해 두면 될 뿐, 약간의 법률 리스크도 지지 않으려 하다면 스타트업을 창업할 이유도 없다.
이런 생각까지 미치니 내 정신적 에너지가 '털리는' 느낌이 든다. 중년의 나이를 감안하만 빡빡한 해외 출장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어 운동과 건강한 음식을 섭취해 체력 보강은 하고 있다. 하지만 내 마음/정신은 덜 돌아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투자를 잘 받는 만큼 확실히 내 두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걸 느낀다. 압박감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나를 믿고 조인하는 직원들을 보면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잘 될 거라 믿는다. 투자받기 어려운 시기에 꽤 많은 자금을 모았고, 제품개발팀과 사업개발팀도 빠르게 잘 꾸려가고 있다. 나를 믿고 나와 같이 이 일에 뛰어들기로 한 동료를 믿고 가보는 수밖에 없다. 물론, 계약 마무리는 잘할 생각이다. 워낙 내쪽에 유리하게 수정해 투자사에 계약서를 넘긴 탓에 거슬렸던 비상임이사 선임권이나 동의/협의권은 기존 투자자에 준해 처리하기로 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주금이 통장에 찍힐 때까지는 안심하지 못한다. 이런 게 스타트업 창업한 사람의 숙명이 아닐까 싶다.
이런 압박감을 당연히 여기지 못하면 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압박감은 창업자의 숙명이니, 이를 받아들이고 관리할 수 있는 내적 힘과 체력을 더 키우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