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더 잘 알아주는 건 내가 일했던 회사뿐
싱가포르 이주를 결정할 무렵 난 현 직장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고객사가 싱가포르에는 없어 세일즈 관련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링크드인을 통해 다른 회사 자리를 찾았다. 지인을 통해 업종이 다른 스타트업 M사에 지원을 해 여러 차례 인터뷰를 보기도 했다. M 사와 일해보기로 이야기가 된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조직 변경으로 인해 날 뽑으려 했던 사람이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그 회사와는 인연이 닿지 못했다. 이렇게 갑작스레 상황이 바뀌면서 다시 한번 현 직장에서 싱가포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찾아보게 되었다.
현 직장 인트라넷에서 포지션을 검색해봤다. 경쟁사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필요하다면 경쟁사 관련 트레이닝 모듈을 개발해서 각 나라에 전파하는 포지션이 눈에 들어왔다. 경쟁사를 다루어본 경험이 있는 세일즈나 마케팅에서 사람을 뽑으려고 한다고 JD(Job Description)에 쓰여있었다. 내 경력과 잘 맞아 드는 느낌이 들어 일본에 있는 마케팅 디렉터 Y에게 Hiring Manager는 누구고 어떤 사람인지 물어봤다. Y는 지금과 같은 레벨인데 괜찮겠느냐고 하면서 Hiring manager A에게 연락해 보라고 하였다. 바로 난 A에게 내 백그라운드를 설명하면서 레주메를 보내 검토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한발 더 나가 확실한 나의 스폰서를 만들기 위해 한국/일본을 담당하는 사장님 H에게 메일을 썼다. H 사장님은 내가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분이라 날 추천해주기 적당한 분이었다. 게다가 이런 Region Job (우리 회사에서는 Cluster Job이라고 한다)은 내가 속한 나라의 사장님이 밀어줘야 채용 확률이 높아지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했던 일, 특히 경쟁사와 치열하게 붙었던 여러 상황에 대해 상기시키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같다고, 날 A에게 추천해 달라고 사장님에게 메일을 썼다. 1시간 뒤, 너무 감사하게도 사장님이 추천해주겠다고 하셨다. 그 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A에게 쓴 추천 메일을 내게 Forward 하면서 ‘Good Luck!’이란 메시지를 보내셨다.
사장님의 추천 메일이 A에게 가고 딱 하루가 지나, 내 레주메 잘 봤다면서 인터뷰를 보자는 메일이 A에게 왔다. 주변에서 도움을 받을 건 다 받았고 이제 내 경험과 자질이 그 일에 얼마나 잘 맞는지 A에게 어떻게 이야기할지 고민할 차례가 왔다. 마케팅 디렉터 Y가 이 포지션 관련해서 내게 보낸 메일을 다시 살펴봤다. A가 이 포지션에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A는 고객과 세일즈/마케팅이 있는 나라에 근무하면서 경쟁사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각 마켓의 니즈를 발굴하여 경쟁사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사람을 원했다. 즉 시장과 우리 제품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을 원했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일, 내가 지금 가진 경험과 지식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일 같았다. 이러한 것을 중심으로 내 생각을 정리하면서 인터뷰 준비를 했다. 또 오랜만에 보는 영어 인터뷰라 내가 정리한 내용을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터뷰 날이었다. ‘Good Morning~’ 하는 첫마디에서 A는 톤이 좀 높고 쾌활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나에 대해 소개하고 왜 이 포지션에 지원했는지 이야기해 보라고 하여, 첫 직장부터 두 번째 직장까지 쭉 이야기를 이어갔다. 3번째 직장인 J사 이야기를 하려 하는데, 갑자기 말을 끊더니 ‘화학을 전공했다면서 전공 얘기가 하나도 없네?’하면서 웃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난 ‘나 고등학교 때 애들이 너무 똑똑해서 일찍 공부 포기했어. 나 지금 원소 기호도 몰라’라 답하니 다시 한번 까르르 웃더니 포지션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일부러 끊었다기보다 이미 나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Y에게 들은 거랑 포지션에 대한 설명은 거의 같았다. 다만, 마켓에 가서 마켓과의 네트워크를 쌓고 필요하다면 직접 고객도 만나면서 세일즈 감을 유지할 필요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을 통해 경쟁 상황이 모두 다른 마켓에 어떤 도움을 줄지 생각하고 필요한 프로젝트를 발굴하는 일이었다. 이 얘기를 바탕으로 내 생각을 더 전달했다. 마치 서로가 가진 생각의 퍼즐을 맞추듯 인터뷰가 진행됐다. 전반적인 느낌은 좋았으나, 내 생각과 내 경력, 그리고 강점을 A에게 제대로 전달했는지 의문이 남았다. 찜찜했다.
그날 밤, 찜찜한 기분 때문인지 잠든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잠에서 깨버렸다. 침대에서 뒤척이다 일어나 아이패드를 켰다. 잠을 더 청하는 대신 A에게 인터뷰를 Follow up 하는 메일을 쓰기로 했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생각했던 것을 담아 그 일을 시작하면 어떤 순서로 해나갈지 쭉 써 내려갔다. 그리고 정말 그 일 해보고 싶다면서, 내가 얼마나 A가 이끄는 팀에 기여를 할 수 있을지 강조했다. 그렇게 메일을 쓰고 나서도 한참을 뒤척이다 다시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렇게 주말을 포함해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A에게 사내 메신저로 톡이 왔다. Follow up email 고맙다면서 한국에 언제까지 출근하냐고 물었다. 1/28까지라고 답하고는 누구 뽑을지 결정은 했냐고 되물었다. A는 결정했다면서 내 Whatsapp 전화번호를 묻는 게 아닌가? 그런 거 없다고 답하려는데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단도직입적으로 ‘I would like to offer this role to you!’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뻤다. 한국 떠나는 거 알고 있으니 내 개인 이메일과 전화번호를 메일로 남기라면서 4~6주는 걸리니 그동안 잘 쉬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전화를 끊고 좀 믿기지 않았다. 포지션을 찾고, 지원하고, 사장님에게 추천 요청을 하고, 인터뷰 보고, 오퍼 받기까지 딱 11일 걸렸다. 그것도 직장 퇴사를 1주일 남기고... 대체 내 인생에 이런 운도 있나 싶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사장님에게 메일을 보냈다. ‘너 뽑는 거 알고 있었다. 3명이 후보였는데, 당연히 널 더 추천했다. 잘 마무리하길 바란다.’ 고 답을 주셨다. 나, 참 운이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거 사실 운이 아닐 수도 있다. 지낸 3년 간 좋은 실적 거두었기 때문이다. 해낼 수 없을 거 같은 일을 연달아했다. 그렇지만 사장님에게 떼도 많이 썼다. 이거 꼭 해주셔야 고객사 지킬 수 있다고 휴가 가서도 콘퍼런스 콜 하고 메일을 썼다. 그런데 아마 이런 게 사장님이 보기엔 좋았던 게 아닌가 싶다. 주변에서도 사장님이 날 무척 칭찬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래도 회사를 떠나는 마당에 사장님이 나서서 도와줄 수 있을지 몰랐다.
이 일을 겪으면서 깨닫게 된 게 하나 있다. 누가 봐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실적을 거두고 나서야 날 지원해 줄 사람이 생긴다는 거 말이다. 그리고 날 더 잘 알아주는 건 내가 일했던 회사라는 걸 알게 됐다. 과거 기억을 되살려 보면, 늘 최선을 다했고 좋은 실적을 냈음에도 날 알아주지 않는 회사가 야속했다. 전 직장도, 또 그 전 직장도 그랬다. 그런데 그건 내가 운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단 내가 보여준 성과가 미흡했던 탓도 있었던 거였다.
하지만, 내가 꿈꾸어 오던 결과는 아니기도 하다. 와이프가 싱가포르로 가자고 했을 때 이제 난 큰 조직을 떠나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월급 받은 일을 계속해서는 아이들 뒷바라지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은퇴할 나이가 되어도 아이들이 겨우 대학을 간다.) 바로 창업할 상황은 되지 않으니 그 중간 단계로 스타트업 M 사에 가고 싶었고, 스타트업 경험을 쌓은 뒤 창업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M 사에 참 많은 노력을 들였는데, 뜻대로 되지 않더라. 이후 현 직장에서 기회를 찾아 도전했는데, 덜컥 Job을 잡게 되니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의지할 곳이 생겨 안도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와이프, 그리고 집안 어른들이 안심하시는 눈치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안정적인 이주를 하게 되었다. 와이프 해외 발령에 이어 나까지 싱가포르에 안정적인 일자릴 얻으니 정말 잘 됐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내가 바랬던 결과는 아니지만, 역시 인생은 바라는 대로만 되지 않아 재미있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