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트레일러/우리들이 랜선 독서수업/서해문집
2020년 4월. 전직원이 출근했다. 온라인 수업을 해야 했다.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일이었다. 여러 선생님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장비도, 프로그램도, 연수도, 어떤 지원도 없이 그냥 하면 된다는 식으로 밀어부치는 느낌. 현장교사를 같이 문제를 해결할 동료가 아니라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는 느낌. 학교에 관한 여러 정책을 학교 밖 사람들과 똑같이 뉴스로 전해듣는 것에 마음 상한 동료교사들이 많았다. 이해한다. 나 역시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컸다. 이 어마어마한 재난을 헤쳐가면서,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일상을 지킬 수 있다는 것에 난 감사했다. 패닉에서 구해낸 사람들이 현실의 불편과 불안에 불만을 터뜨리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들을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것을 수용하면서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야 했다. 교육부의 공문을 제일 먼저 보는 이들 중에 하나였던 나에게는 방역지침들 사이로 교육행정가들과 방역정책가들의 고심이 느껴졌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이 상황에 그나마 온라인으로라도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이 어디인가. 온라인 수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현재 상황에서 학교의 수업은 그냥 수업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닌듯 싶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수업을 유지하는 일은 어떻게든 우리가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 재난의 시기에 최대한의 평온함을 확보하며 일상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이것이었다. 지금 당장 누가 어떻게 온라인 수업을 할 것인가?
내가 나섰다. 내가 먼저 온라인수업 일주일치를 만들기로 했다. 무슨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이 움직였거나 대단한 온라인 수업 경험이 있거나 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일단은 시간을 벌어보자는 마음이 컸다. 지금 돌아보면 참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지만, 그 때의 나는 아무리 길어봐야 두 세 달, 일이 잘 풀리면 2,3주 안에도 학생들을 다시 교실에서 만날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어차피 잠깐 할 수업, 다른 선생님들이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잠시 때우는 수업. 그 정도는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 간단히 말하면, 실패하고 싶었다. 실패해도 된다고 여겼다. 처음 시도하는 수업이 실패하는 경우란 늘 있는 일이니까. 더구나 지금은 엄청난 혼돈의 시기 아닌가. 아마도 당연히 실패하겠지만, 누가 나의 실패를 비난할까. 어차피 대부분 실패할 일, 내가 먼저 실패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후련했다. 우산을 던져버리고 비를 맞기로 나설 때의 그런 후련함.
그런데 이상했다. 실패를 안했다. 우리학교의 온라인 수업 플랫폼은 EBS 온라인 클래스로 결정되었다. 이 EBS 온라인 클래스의 가장 큰 장점은 내용으로는 어느 정도 검증된 EBS 강의 영상들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플랫폼에 가장 어울리는 단원이 뭘까? 동료선생님들과 고민을 나눴다. 단번에 답이 나왔다. 문법이었다. 문법은 지식중심교과이다. 배워야 할 지식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단원이다. 온라인수업이든 오프라인수업이든 일정한 지식이 그대로 학생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목적과 틀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했다. 내가 해도 똑같이 할 이야기를 영상 속 EBS 선생님이 해 주시는 것이다. 이 정도면 해 볼만 하다고 여겼다.
온라인 클래스에 국어수업을 개설했다. 낯선 플랫폼에 낯선 아이콘과 낯선 기능들, 전면적인 온라인 수업 시행 초기였기에 당연히 예상했던 시스템 오류와 서버다운, 업데이트, 그러한 것들을 이해하면서 온라인 컨텐츠의 저작권과 각종 규정을 이해하고 지키며 실행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일단은 최대한 안전하게, 최대한 간단하게 가기로 했다. EBS의 고등학교 1학년 문법 강의 영상을 찾아 올렸다. 간단하고 안전했다. EBS 강의는 자세하고 친절하고 명확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EBS 강의가 지나치게 자세하고 친절하고 명확한 것이 문제였다. 마치 고등학교 1학년 문법에 대해서는 그 어떤 질문도 나오지 않도록 먼저 완벽하게 설명해 버리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걱정이 되었다. 입학생 기준으로 우리학교의 1학년 학생들 385명 중 60%, 그러니까 200여명 학생은 중학교 때 내신등급이 대략 7-9등급이었다. 상위그룹의 40여명을 제외하면 우리 학교의 학생들은 전반적으로 학습에 대한 의지나 열정, 수준, 관심과 기대가 낮다. 지역의 특성 때문이었다. 우리 학교 주변에는 국제고, 자사고, 자공고, 전국단위 모집을 하는 유명한 전문계 고등학교가 있지만, 일반 전문계 고등학교는 대중교통 1시간 이내의 거리에는 없다. 대신 일반계 고등학교인 우리 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의 학생들에게 그 촘촘한 설명 영상이 얼마나 전해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문법내용을 좀 더 나누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뭔가 조금이라도,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활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음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자음체계표를 올려 놓고 자음 체계표를 설명하는 글을 올렸다. 최대한 간단하게, 최대한 명확하게 하려고 애썼다. 자음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서, 한자용어의 뜻을 명확히 알지 못하고서 자음의 변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이해 없이도 시험을 볼 수는 있다. 그냥 외우면 되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니까, 아마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6년째 이 문법을 다시 만나면서도 학생들은 매년 처음 만나는 듯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아니다. 이것도 너무 낭만적인 비유다. 상황은 더 심각하다. 무려 6년이나 알고 지냈는데 만나면 다시 처음 만난 것처럼 엄청나게 낯선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날 때의 그 불편함. 오래된 시간만큼 더 지겨워서 더 불편한. 다시 한 번 문법수업을 지겹게, 이 학생들에게 익숙한 대로 진행해도 나에게 무슨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래도 지겨웠던 문법수업에 지겨운 기억을 하나 더하는 것이 무슨 큰 잘못은 아닐 수 있겠지. 더구나 오늘과 같은 상황에... 그래, 그럴 수 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아무리 실패하기로 마음 먹은 수업이라지만, 그렇게 되도록 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실패하겠지만, 어차피 실패할테니, 할 수 있는 시도는 해 보고 싶었다.
자음체계도에 관한 20개의 퀴즈를 만들었다. 자음을 분류하는 각종 이름과 현상을 이르는 용어를 설명한 강의 후에 그 내용을 묻는 퀴즈였다. 마침 온라인클래스에 퀴즈를 만드는 기능이 있었다. 오호, EBS가 일 좀 하는구나. 반가워하며 퀴즈를 만드는데, 그런데 이게 좀 이상했다. 온라인 클래스의 단답형 퀴즈 시스템은 퀴즈의 대답을 정말 단 하나의 오차 없이 정확하게 입력해야만 정답으로 처리하는 것이다. 맞춤법이 살짝 틀리거나 띄어쓰기가 틀리거나 점이 하나 있고 없음도 오답으로 처리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만했다. 이 프로그램이 무슨 인공지능도 아니고 응답자의 실수도 이해하며 정답의 폭을 넓히는 일이란 불가능할 테지. 그래, 그럴 수 있다. 아니, 그건 그럴 수 있는데... 나는 어쩌지? 간단하고 재밌게 공부한 것을 확인해 보자고 만든 퀴즈인데, 이게 이렇게 엄격하고 정확하게 진행되면 전혀 간단하고 재밌지 않을 것이었다. 선생님, 저는 왜 틀렸나요? 정답을 A라고 적었는데 아닌가요? A가 아니면 뭔가요? 계속 써도 계속 틀렸다고 나와요? 어떻게 된 건가요? 아, 이거 왜이래... 학생들의 원망과 질문이 벌써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이 원망과 질문을 어떻게 해결하지? 이 원망과 질문을... 원망과 질문이라....질문?
질문!!
정신이 번쩍 났다. 이 퀴즈를 푸는 학생은 당연히 질문이 생길 것이다. 일단 이 퀴즈를 시작한 학생이라면 반드시, 질문이 생길 것이다. 내가 만든 이 20개 질문에 내가 설정한 정답을 단 하나의 오차 없이 정확하게 적을 학생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학생들이 틀렸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다만 맞춤법이 살짝 틀리거나 띄어쓰기가 어디 틀리거나 마침표나 쉼표가 하나 있고 없고 하는 정도겠지. 당연히 정답이라고 여겼을 그 학생들의 마음에 원망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감정이 움직일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정말 중요하다. 감정에서부터 질문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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