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많은 질문들은 그 동안, 다 어디에 있었을까?

북 트레일러/우리들이 랜선 독서수업/서해문집

by 김병섭


나는 작년에도 고등학교 1학년을 가르쳤다. 나는 작년에도 이 문법단원을 가르쳤다. 같은 문법단원을 배웠을 작년의 우리 학생들에게는 이 질문이 없었을까? 이 많은 질문은 그 동안, 다 어디에 있었을까? 어디에도 없었을까? 오늘, 온라인 수업 상황에, 이 질문들은 그냥 갑자기 튀어 나온 것일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이 많은 질문은 전에도, 그 전에도 내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세상에 나와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기회가 없었을 뿐. 무엇이 이 질문들을 오늘에야 세상에 불러왔을까?


온라인 수업이었다.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 많은 동료선생님들과 절실히 느낀 것은, 학생들이 온라인 수업에서 생각보다 발표와 참여가 대단했다는 것이었다. 제시된 활동과 과제에 대한 학생들의 댓글과 보고서와 활동영상은 횟수도, 수준도 모두 예상보다 높았다. 정상등교를 했어도 잘 했을 학생들도 물론 있었다. 우리가 놀란 것은 그 학생들 때문이 아니었다. 정상등교라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 학생들 때문이었다. 오프라인 등교라면, 많은 학생들 앞에서 직접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답을 맞추고 질문을 하는 상황이었다면 절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 학생들이 댓글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답을 맞추고 질문을 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주 깊게, 아주 진솔하게 했다.



온라인 수업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단언한다. 오프라인 수업, 대면수업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서 수업이 끝나기를 바란다고 예상되는 30여명의 학생들이 싸늘하게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을 이겨내며, 이 시간 이후에 학생들의 시선이 어떻게 변할 지 자신에 대해 뭐라고 할 지 걱정되는 그 중압감을 가볍게 이겨내며, 교사의 기대에 부응하는 질문일 것이라는 확신의 힘으로, 오로지 자신에게만 몰입하여 꺼지지 않는 호기심의 열기로 기꺼이 질문해야 하는 수업. 그런 수업에서는, 절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을 학생들이었다.


온라인수업의 구조에서 학생은 교사와 1:1로 마주했다. 다른 학생의 표정, 몸짓, 말들은 화면에 보이지 않았다. 학생이 의지만 있다면 학생은 배움과 교사에 몰입할 수 있다. 배움과 질문에 몰입할 수 있다. 더구나 온라인 수업은 학생이 배움에 대한 의지만 분명하다면 훨씬 효율적이었다. 영상플레이어의 건너뛰기와 1.5배속이 배움의 속도를 더했고, 되감기와 반복이 배움의 효율을 높였다. 질문이 하나 마음에 제대로 자리잡기만 하면 학생의 배움은 수업시간 50분에 끝나지 않았다. 구글과 유튜브가 눈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질문을 품은 이에게 선택되기를 바라는 끝없는 컨텐츠의 세계가 지금도 확장중이었다. 학생이 품은 질문이 클 수록, 학생이 찾아가는 컨텐츠도 더 크게 확장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문득 무서워졌다.


우리들의 학교에 배움은 정말 있을까? 오늘 내가 배운 것이 너무 재밌고 그 배움을 향해 함께 한 친구들이 너무 즐겁고, 이 즐거움을 누리도록 수업을 준비해 준 선생님에게 정말 고마워 하는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학교에 있을까? 배움에 더 몰입하여 기꺼이 더 질문하고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나 해결방법을 논의하고 선생님의 안내를 따라 새로운 질문으로 나아가는 배움이 있을까? 문제를 발견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배움을 선정하고, 그들을 조직하여 실행하는 법을 배우는 그런 배움은 우리들의 학교에 정말 있는 것일까?



혹시 그저 배움이라 불리는 공장식 노동만 있는 것은 아닐까? 일정한 시간을 버티며 의무시간을 채우면 기본점수를 확보하는 게임. 일정한 지식을 두고 경쟁을 벌여 높은 평가를 받은 학생이 높은 보상을 가져가는 게임. 세상에 배움이 아닌 것은 없고, 이 게임도 세상을 닮아 학생들에게 분명 배움이 되기야 하겠지만, 이러한 공장식 노동이, 이러한 공장식 배움이 다른 배움으로 확장할 영역은 얼마나 될까? 공장식 배움은 분명 얼마간 세상을 더 유지하겠지만, 그것은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2020년은 전염병의 시대였다. 동시에 비대면의 시대, 온라인의 시대였다. 온라인의 시대란 곧 데이터의 시대이며 그것은 더 많은 것들이 기록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오프라인의 만남이 급격히 줄고 온라인의 만남이 급격히 늘면서 정보의 유통량은 폭발했다. 이전에는 기록될 수 없는 것들이, 이전에는 기록의 기회조차 없던 것들이 엄청난 양과 속도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다른 누가 기록해 준 것이 아니었다. 온라인에 접속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기록자가 되어 엄청난 정보를 입력해 주었다. 이 정보를 통해 지금도 엄청난 속도로 패턴이 분석되고 있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다. 습관이란 곧 패턴이다. 패턴을 읽는다는 것은 곧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돈이 된다. 돈이 되는 이 큰 일에 기술이 도입되지 않을 리 없다. 인공지능이 그것이다.


인공지능이 하는 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패턴 분석이다.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집단이 반복하는 무수히 많은 사건들 중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패턴들. 그 패턴들을 다시 나이, 성별, 종교, 지역, 재산에 따라 나누어 분석하는 일. 혹은 한 개인에만 집중하여 그가 기록하는 정보들의 패턴을 분석하는 일. 컴퓨터, 휴대폰, 전자시계를 비롯한 스마트기기를 사람이 자신의 몸에 스스로 부착하여 기록한 데이터.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확률이 계산되어 패턴을 분석하고, 다시 제공되는 데이터를 통해 이 패턴의 확률이 수정된다. 데이터, 기록, 확률, 패턴. 데이터, 기록, 확률, 패턴. 다시 데이터, 기록, 확률, 패턴... 사람이라면 벌써 질려버렸을 이 무수한 반복을 일말의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빛에 가까운 속도로 하루에도 수 억 번 해 낼 수 있는 기계. 그것이 바로 인공지능인 것이다.



인간은 '패턴이 정해진 문제를 해결하는 게임'에서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다. 다시 반복한다. 인간은 '패턴이 정해진 문제를 해결하는 게임'에서 절대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다. 패턴이 정해진 문제. 그러니까 우리가 2020년 현재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대부분의 교과들 말이다. 일정한 분량의 지식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다시 그것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을 반복하는 일. 그 기억과 기록의 능력을 측정하여 우리는 학생들의 변별력을 운운하지만, 인공지능의 역량 앞에서 그러한 구별은 무의미하다. 만일 누군가가 인공지능을 학교 기말고사 시험 교실에 들여보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당장 새롭고 완벽하며 영원한 전교 1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자괴감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일단 접어두자. 그리고 천천히, 크고 깊게 3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혀 보자. 그렇게 마음의 고요를 찾은 후에 다음 질문에 답해 보자. 기억과 기록의 반복을 넘어서서 학교가 학생과 더불어 할 수 있는 배움이란 무엇일까? 인공지능이 지금부터 완벽하게 영원히 1등을 할 수 있는 그런 배움 말고, 인공지능은 죽었다 깨어나도 해 낼 수 없는 배움, 인공지능을 설계하고 운영하고 제어하고 분석할 수 있는 배움, 때마다 새롭게 보편화되는 기술표준을 활용하면서도 새롭게 제시되는 개인과 공동체와 인류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배움, 그런 배움은 우리들의 학교에서 어떻게 가능할까?


배움은 결국 관계이다. 배움은 대개 나와 관련 있는 것들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인문학의 통찰이나 과학의 관찰, 수학의 분석과 패턴화는 그러한 배움이 누적된 최후의 결과물일 뿐, 우리들 각 개인이 이 배움을 만나는 일은 대개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에서 시작한다. 어떤 학생들은 엄마와 아빠의 싸움을 통해 부부의 발생을 탐구할 수 있고 오빠와 언니를 통해 역대 왕조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형제의 난들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아픈 마음을 들여다 보던 이가 심리학자가 되거나 통계학회 회장이던 아버지를 따라 수학의 즐거움에 푹 빠진 아이가 더 대단한 학문을 연구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이미 익숙하다. 그렇게 출렁이는 감정에서 시작된 질문들이 열정과 만나 학문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과거를 정확히 복원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기하학이 출현했고 물체의 운동에서 드러나는 명확한 패턴을 수식화함으로써 미래를 명확히 예측하고자 하는 욕망이 새로운 수식과 공리를 만들었다. 어떠한 종교, 어떠한 정치에도 훼손되지 않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정한 기록에 대한 열망이 과학을 탄생시켰고, 그렇게 수집된 새로운 관찰과 기록과 패턴과 수식과 공리가 오늘도 문명을 만들어 가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일이란 엄청나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 나가는 데에 감정은 강력한 힘이 된다. 논리의 대부분이 감정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지금의 문명이란 논리들의 결과이며 동시에 감정들의 결과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사는 학생의 감정을 좀 더 연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학생과 배움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학생의 감정을 더 배워야 한다. 지금 내가 더 연구해야 할 것은 학교문법에 활용될 문법지식이 아닌 듯하다. 지금 내가 더 연구해야 할 것은 학생들이다. 문법을 대하는 학생들의 상황과 감정. 어떻게 해야 문법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감정이 출렁이는 경험을 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다음의 질문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하면 우리 학생들에게 문법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하게 만들 수 있을까? 학생이 문법과 어떤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할까? 학생이 학생과 어떤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할까? 학생이 교사와 어떤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할까? 그러니까 최후에는, 학생이 자기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할까?



온라인 수업은 이 질문들을 해결하는 데에 분명 도움이 된다. 학생들의 상황과 감정을 돌아보며 학생의 관계를 파악하고 학생을 배움으로 몰입하게 하는 데에 온라인 수업은 큰 효율과 매력이 있다. 온라인 수업은 학생과 교사를 개인으로 만나게 하는 데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사에게도 매력적이다. 교사도 학생을 집단으로 만나는 것에 큰 부담과 어려움을 자주 느끼기 때문이다. 개인으로 만날 때 교사와 학생이 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자신의 논리와 감정을 좀 더 진솔하게 드러낼 수 있다. 그렇게 교사와 학생이 개인과 개인으로 더 깊이 만날 때 교사는 학생을 더 깊이있게 관찰할 수 있고, 더 구체적인 도움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온라인 수업이라는 교구는 충분히 실험되지 않았다. 아마도 예전 같았으면 이러한 이유들이 온라인 수업에 대한 탐구와 시도를 가로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감염병의 시대, 온라인 시대, 비대면의 시대이다. 지금의 상황에서도 배움과 질문은 필요하고, 학생의 성장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온라인 수업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고 더 많이 시도해야 할 것이다. 충분히 매력적인 교구를 발견했다면 그 가능성을 최대한 실험하여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테다. 그러나 온라인 수업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만나야 한다. 온라인 수업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달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고 등교수업이 확정되었다. 온라인 수업이 초기의 혼란을 지나 그럭저럭 가능한 상황이었음에도 학생들은 학교에 나와야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직접 만나는 것만큼 강력한 일도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 서로 얼굴을 보고 손을 마주 잡고 응원과 격려의 말을 전하며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눈빛을 살피다가 깊은 포옹으로 심장을 마주하는 것만큼 격렬하게 관계를 만들고 회복하는 일도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한 가지 더, 어쩌면 이보다 더 큰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교사와 학생이 오프라인의 학교에서 반드시 만나야 할 이유. 그것은 공정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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