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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섭 Jul 04. 2023

앞뒤가 다르게 행동하여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

나태주. 뒷모습.

뒷모습이 어여쁜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자기의 눈으로는 결코

확인이 되지 않는 뒷모습

오로지 타인에게로만 열린

또 하나의 표정     

뒷모습은

고칠 수 없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앞모습과 뒷모습이 다른 사람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앞모습과 뒷모습이 다른 사람. 즉,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있다. 즉,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을 근처에 두었을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과 뒤가 다른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깨달은 것들을 썼을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시 속의 말하는 이 자신이 이 시에서 비판하고 있는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이었어서, 반성하는 차원에서 쓴 시일 수도 있을 것이다. 20년 뒤의 나는 과연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일까, 아니면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을 보며 비판하는 사람’일까.     


꾸밈없는 뒷모습

“ 뒷모습은 고칠 수 없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 이 시에 나오는 시구 중 하나이다. 어떠한 예쁜 앞모습을 가지고 있더라도, 뒷모습이 예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온갖 예쁜 말들과, 거짓으로 꾸며진 앞모습과 다르게, 꾸밈없는 뒷모습이 자신의 진짜 모습이며, 고칠 수 없고,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진정한 거짓 없는, 꾸밈없는 나의 모습은 뒷모습인 것이다. 예쁘장하게 가꾼 거짓된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가꾸는 것이 나에게는 몇 배나 더 소중한 것이며, 이것이 진정한 그 사람의 모습이니, 뒷모습이 예쁜 사람이 진정으로 예쁜 사람인 것이다.     


“뒤에서 하는 험담”

앞모습은 예쁘지만, 뒷모습은 예쁘지 않은 사람. 즉, 앞과 뒤가 다른 사람들을 본 경험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것에 대한 의견을 말했을 때, 앞에서는 온갖 귀담아듣는 척과 공감하는 척을 하면서, 뒤에 가서 그 의견에 대해 별로였다며 남들에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 수시로 남의 험담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만 봐도 그렇다. 앞에서는 안 그러더니 뒤에서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만 험담을 하는 사람들. 험담을 당하는 쪽은 험담을 당하는 이유도 모르고, 심지어 그들이 자기의 험담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 사람들과 지낸다. 심지어 온갖 거짓말을 해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는 사람까지 만나봤다.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남의 험담을 해서 자신에게 좋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남의 험담을 듣고 있는 자가 바보가 아니라면 이 정도 생각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저 사람은 내가 마음에 안들어도 저렇게 험담을 하고 다니겠구나.’ 이처럼 남의 험담을 마구 하다 보면 그것을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신뢰를 반토막내며, 만일 험담을 했던 당사자의 귀에 들어간다면 매우 난처한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게다가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전달하면 와전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졸지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 한 사람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예전에, 내가 험담의 당사자가 되었을 때에도 그 사람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지만,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었다. ‘아,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왜 나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을까?’였다. 그렇다. 불만사항이 있으면 직접 와서 정중하게 이유를 묻고 사과를 받으면 된다. 매우 불편한 상황이 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 사람의 험담을 하다가 들키는 것보다 훨씬 낫다. 사람이 전 상황과 비교했을 때 훨씬 의연해 보이고, 혹시나 내가 그 사람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면 얘기하며 풀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자존감과 자존심

이 시를 읽으며 웹툰 연애혁명의 “양민지”라는 캐릭터가 떠올랐다. 겉으로 봐서는 수다스럽고 장난끼도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어려워하고, 그런 자신에게 공감과 이해로 먼저 다가와주기를 바라는 내성적인 성격이다. 자존감은 낮지만, 자존심은 높아서 자신이 기분 나쁜 일에 대해서 언제나 자신이 피해자이며, 피해의식을 자신만 가지고 있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그 사람의 험담을 하며 공감을 받고, 자신의 피해의식에 대한 합리화를 한다. 그리고 거기서 또 공감을 해주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또 자신이 피해자가 되어 그들의 험담을 하고 다닌다. 이것의 무한반복이었고, 자신이 지금 하고있는 일이 친구들과의 관계를 망칠 뿐이라고 깨달았을 당시에는 이미 졸업이 코앞이었고, 이제 진짜 자신의 모습. 즉, 자신의 뒷모습을 좋아해주는 친구들이 모두 사라진 뒤였다. 처음부터, 아니, 조금이라도 빨리 자신의 진짜 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친구들에게 진정성있게 다가갔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이 양민지라는 캐릭터가 한 인간관계는 과연 뭐였을까. 확실한 것은 만사에 가식적이고, 진정성이 없었다. 그런데 가식있는 앞모습 마저도 남의 험담을 하고다니는 좋지 않은 이미지이니, 당연히 자신을 좋아해주는 친구가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인은 본인에게 있었지만, 자존심이 높아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존감이 낮아서 자신을 좋아해주지 않는 타인을 탓했던 것이다.     


우리의 가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들을 평생 모두 지키며 살아온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살면서 다른 사람 험담도 해보고,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대부분 다른 사람과 직접적인 마찰을 겪고 싶지는 않은데, 무언가 답답할 때, 혹은 그 사람에 대한 분을 풀고 싶을 때, 혹은 나의 잘못인가 확인받고 싶을 때 우리는 험담을 많이 하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그 사람과 싸우고 싶지 않아서 하는 일이다. 이것을 적당히만 한다면 문제가 없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나에게 거지같이 대할 때 가식 없이 하하호호 웃으며 대할 수 있을까? 사람이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 사람의 험담을 한다면 결과적으로 나의 화가 조금 풀리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에 대한 화를 조금이라도 푼다면, 그 사람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빚는 것 보다 훨씬 괜찮은 선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가식을 해야할 때가 있고 안 해야할 때가 있는데 그것을 구분을 못하는 사람들이다. 해야할 때를 예로 들어보자. 만약 험담을 하는 대상이 자신이 다니고 있는 직장 상사라고 가정해보자. 아니, 가정할 필요도 없다. 현대 사회에서 매우 자주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직장 상사에게 직접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 항의를 하는 것은 웬만한 큰 간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다. 직장 상사에게 직접 항의를 할 시 상사가 부처급의 인심을 가진 게 아니라면 ‘얘는 뭔데 내 행동을 비판하는거지’라며 안좋은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이 때에는 일종의 사회성으로서 가식을 부려야 하는 게 옳은 일이다. 직장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것 만큼 회사에서 중요한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해도 이 “싸가지”가 없다면 많은 불이익을 받는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지 말아야 할 상황은 무엇이 있을까? 바로 친구 관계가 가장 대표적인 상황이다. 물론 여기서 ‘친구 관계’란 업무상의 비즈니스적인 관계가 아닌, 정말 마음을 나누는 친구를 의미한다. 이 상황에서 가식적으로 행동한다면 그 친구에게 상처가 됨은 물론, 나까지 피해를 받는다. 나의 가식 하나로 인한 그 친구의 실망 그리고 오해로 인해 나와 그 친구와의 관계는 정말 많은 타격을 입게 된다. 또한 그 친구에게 가식적이게 대한 나에게도 정서적으로 혼란이 오게 된다. 분명 상처받은 그 친구에게 심한 말을 들었을 것이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더 낫다고 생각했었던 ‘가면’이 친한 친구에게 부정당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들고, 그것을 남들에게 숨기게 만든다. 그리고 앞으로 더더욱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기 어려워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서로에게 너무나 큰 피해를 불러온다. 적어도 서로 마음을 나누는 친구관계라면 자신을 보고 실망할 친구의 얼굴을 생각해서라도 자신의 ‘가면’이 아닌 진정성 있게 다가가자. 그 친구는 자신의 ‘가면’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성

나에게 앞뒤가 다르게 행동하여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 그리고 남에게 앞뒤가 다르게 행동했던 나에게 이 시를 보내고 싶다. 어떤 예쁜 앞모습이라도, 그 앞모습을 보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내 진짜 모습은 들통나기 마련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본 사람들에게는 그동안의 앞모습만 봐 왔던 사람들인지라 실망감과, 배신감을 안겨 줄 것이고, 그것을 본 나조차도 나의 진짜 모습을 싫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나날들을 평생 뒷모습을 숨긴 채 살아갈지도 모른다. 나는 이것이 너무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가식 있는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인생에 필요할까?

 인생에 정말 필요한 사람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사랑해주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평생 진짜 자신을 숨기면서 살아가는 것은 매우 불행할 것이다. 언젠간 깨달았을 때는 모든 인간관계에 관한 회의감이 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애초에 자신의 가식적인 면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그러니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주는 것도 아니다. 가식의 자신을 남들에게 보여주던, 진짜 자신을 남들에게 보여주던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은 언제든 있고, 반대로 어떻게 해도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있다. 그러니 어차피 그럴 거 차라리 진정성 있는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며,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사람들과 지내면 좋겠다. 분명 자신의 진정성 있는 모습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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