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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섭 Jul 05. 2023

부끄러운 죽음

윤동주.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70년 후 내 장례식을 찾아올 이들에게 바치고 싶은 시.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나는 과연 이런 삶을 살았을까? 내가 과연 죽는 날까지 부끄럼 없을 떳떳한 삶을 살았는지 의문이다. 내가 그동안의 삶을 살면서 해온 일들엔 무엇이 있었을까. 나의 학창시절, 성인이 된 후의 나, 내가 가졌던 직업, 내가 해온 일들과 내가 보낸 노년기들 모두 아무 부끄럼 없이 다른 누군가에게 ‘난 이런 사람이었다’라며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까. 그 답은 내가 섣불리 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내 삶에 한 점 부끄럼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해도, 다른 누군가가 자신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딱히 할말이 없다. 또, 내가 했던 일들중 부끄럽다고 생각되는 일들도 사실은 당당해도 됐을 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 장례식에 찾아와준 눈앞에 있는 사람들 모두 울고만 있지 말고 내 삶을 대신 돌아봐주길 바라고 있다. 어쩌면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중에는, 내가 생전에 한 일들은 모두 부끄럽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고 말해줄 좋은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한가지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는 좋은 사람들, 사랑하던 사람들을 두고 혼자 죽어버렸다. 나를 그렇게 아껴주던 사람들인데, 행복하게 해주기는 커녕 슬픔을 안겨주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어버렸다. 물론 죽은 것은 내 고의도 아니고, 죽고싶어서 죽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쩌면 나는 더 살아서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들을 더 웃게 만들고, 즐겁게 해주고, 나로인해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해주지도 못하고 몸은 죽어버려서, 더 이상 그들은 나를 볼수도 없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아무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이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부끄럼이다. 위에서 말한 그 좋은 사람들은 또 나에게 그건 네 잘못이 아니고 네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말해줄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준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렇게라도, 소중한 사람들을 남겨두고 먼저 죽은 것에 대해 미안함과 면목이 없음을 전달하고 싶다. 이건 조금 다른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한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과연 내가 살아있는 동안 다른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쳤는지 물어보고 싶다. 다른 누군가가 내가 살아가는 모습, 나의 삶의 방식이나 내 마인드 등등 내 모습중 어느 한구석을 보고 영감을 받았거나 영향력을 받았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이 없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되었다던가, 조금이라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었다면 내가 살아있을 때 겪었던 부끄러워할 일도 조금은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죽었기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도 물론 내가 죽은 것을 슬프게 생각하고 있다. 죽었다고 해서 내가 살던 세상까지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내 가족을 기억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기에 죽은 나또한 마음이 편하지 않으며 스스로가 안타깝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덕분에 삶이 즐거웠고, 나에게 무언가 많은 것을 배웠고, 나 덕분에 자신의 인생이 즐거워졌다던지,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은 마음을 위로 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

나의 장례식에 찾아와준 모든 사람들, 내 사진을 앞에 두고 슬퍼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라는 건 대체 어떤 마음인지 얘기해보고 싶다. 하늘의 별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몇천개? 몇억개? 고작 이정도면 셀 수 없다는 표현은 쓰지 않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별들이 생겨나고 있을지 모른다. 학생시절에, 광활하고 끝을 알 수 없어서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우주에 대해 꽤 흥미가 많았고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우주와 관련된 책을 꽤 읽은 적이 있는데, 우주에 있는 별은 예상하기로 7조 곱하기 10억배라고 들은 기억이 있다. 확실한 것은, 지구에 있는 모레 알갱이들을 하나하나 다 합친 수 보다도 별의 수가 더 많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셀 수 없는 별을 노래 하라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 별은 셀 수 없는 존재이니 굳이 세려고 하지 말고 미지의 공간은 미지의 공간으로 남겨둔채 그냥 받아들이자는 소리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까? 수많은 별을 어차피 셀 수 없으니 세려하지 않듯, 마찬가지로 죽어가는 모든 것들은 어차피 그들의 운명이며 되돌릴 수 없기에 붙잡지 말고 원망 말고 운명을 받아들이자는 소리다. 죽어가는 사람을 원망해봤자 이미 늦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붙잡고 가지말라고 소리쳐 봤자 이미 늦었다. 이제는 죽어가는 그 사람을 놓아줄 때가 되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죽음으로 인해 오는 후회를 안고 오래 오래 끌고 가지만 말고, 그 사람의 삶 자체를 그저 하나의 추억으로 남겨두며, 떠올리고 싶을 땐 가끔 두고두고 좋은 기억만을 꺼내어 되새겨 보면서. 아파만 하는 것이 아닌 아름다운 기억으로 안고 가야한다. 

사실 나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막상 입장이 바뀌어 내가 누군가를 떠나 보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붙잡으며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마음을 다잡을 것 같다. 내가 한번 죽어보았기에, 죽은 사람 입장에서 볼 때 밥도 안 먹고 제대로된 생활과는 멀어진채 슬퍼만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무척 아프기 때문이다. 그러니 떠난 사람을 위해서라도 남겨진 사람들은 행복해야만 한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죽은 사람을 잊으려는 방식이다. 가끔 가족들이 죽었거나 소중한 사람이 곁을 떠났을 때, 그 사람을 잊기 위해서, 그 사람의 죽음을 자꾸 떠올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이나 그 사람의 사진 따위를 버리거나 불태우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나는 살아있을 때도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가끔 생각하곤 했다. 저게 과연 떠난 사람을 잊는 최선의 방법일까? 물건을 없애고 사진을 찢은 후 한동안은 이제 그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고, 이젠 그 사람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국엔 내가 그만큼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의 발자취를 없애고, 그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고 살 자신이 있을까? 물론 사람마다 다를 순 있지만 난 이렇게 생각한다. 처음엔 그저 잊고 싶은 마음에, 떠올릴 때마다 슬퍼지는 그 감정을 없애고 싶은 마음에 충동적으로 물건을 없애고 사진을 찢어버린다. 나는 나중에 그런 나의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후회하지 않겠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 사람이 너무 생각날 때, 그 사람이 너무 보고싶을 때 나는 더 이상 그를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고, 그 사람이 생존에 사용하던 물건으로 밖에 온기를 전달받을 수 없는데, 그걸 다 불태우고 버리고 없애버리면 더 이상 그 사람의 온기를 하나도 느낄 수 없다. 그 사람이 쓰던 방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그사람의 사진을 보는것 만으로도 마치 옆에 함께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는데, 그저 잊고싶은 마음에 흔적을 없앤다는 것은 참 슬픈일인 것 같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런 사례를 볼때마다 이것도 결국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에 필사적으로 그들을 잊으려고 하는 충동적인 행동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말로 그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었던 거라면, 너무 잊으려고만 하지 말고 적어도 그 사람의 온기만이라도 곁에 남겨두도록 하자.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자.

위에서 나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이번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싶다. 사실 그동안 하던 이야기들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긴 하다. 전하고자 하는 결론은 똑같을지도 모른다. 결국엔 죽어가는 사람을 붙잡지 말고, 그 사람은 놓아주기로 결심하라는 말이다. 다르게 해석해보면, 그저 본인에게 주어진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라는 의미도 담겨있다. 비록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은 먼저 떠났지만, 그걸로 인해서 내가 가야만 하는 길이라던가, 가고 싶었던 길을 포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쉽게 말하면 좌절하지 말라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담긴 의미가 조금은 다르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한테 좌절하지 말라는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흔한 형식적인 위로는 오히려 잔인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굳이 좌절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좌절을 해도 좋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은, 좌절을 하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라, 좌절을 겪고도 다시 일어날 수 있냐 없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너무 슬프면서도 어떻게 보면 무자비한 일이다. 그러나 결국 태어난 모든 생명체가 맞이하는 것 또한 죽음이고, 사실 생각해보면 죽음이란 정말 흔한 일이다. 그런 죽음 하나에 내 인생까지 빼앗기지 말자. 죽음은 이미 내가 아끼던 사람의 인생을 앗아가버렸다. 그거 하나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미워하는 죽음에게 내 인생까지 줄 이유는 없다. 사랑하던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간 죽음이라는 원수로부터 내 목숨만큼은 지켜주도록 하자. 자꾸 날 좌절로 끌고 가려고 하는 죽음에게, 이미 넌 나의 소중했던 사람을 데리고 가버렸으니 그만하면 됐다고 소리쳐보자. 이만하면 됐다. 이젠 죽은 자들이 살아서 누렸을 행복의 몫까지 본인들이 가지고 가면 된다.     


내 장례식에 찾아온 사람들과 같은 마음의 노래

내가 살아있을 때 좋아하던 한 밴드 아티스트가 있다. 그 아티스트의 노래중엔 죽음과 관련된 노래가 꽤 있는데, 그중 하나이다. 이 곡의 스토리는, 소중했던 사람의 죽음을 믿지 못하고 부정하며, 상대는 이미 죽어 말을 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본인이 죽었음을 직접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다. 지금 내 장례식에 찾아와준 사람들 중에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이 노래 가사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 ‘내일 10시에 역 승강장에서 만나던가 하자’ 라는 가사이다. 화자는 이미 그가 죽었기에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사실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믿고 싶지 않아서 만날 수 없는 상대에게 만나자고 요청한다. 이 모습은 내가 위에서 그동안 말하던 죽음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메시지와 상반된 느낌이다. 어쩌면 이게 날 보러 찾아와준 내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 또는 속마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마음이 아리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

아까도 말했지만 태어난 모든 생명체들이 결국 맞이하는 최후는 죽음일 것이다. 언젠가는 지금 내가 소중한 사람들을 남겨두고 떠났듯이, 남겨진 그들도 또다른 누군가를 남겨둔 채 나에게 오고, 그것의 반복일 것이다. 비록 평범한 세상에서 평범하게 생활하던 생전처럼, 보통의 경우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들도 결국엔 죽고 나와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소중한 사람이 죽을 때, 그들도 내가 앞에서 궁금해하던 감정들을 똑같이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확실히 대답해 줄 것이다. 너의 인생은 하나도 부끄러운 삶이 아니었으며, 생전에 나를 포함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 너의 삶 덕분에 다른 누군가들은 분명히 행복했을 것이며, 적어도 나는 그랬다고 말이다. 그리고 죽은 나와 재회해서 제2의 행복을 꾸려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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