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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섭 Nov 09. 2019

엄마교사. 메갈교사.. 여자의 피는 파란색이 아니다

최가진-광주중앙고-blog.naver.com/gajin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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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에선 엄마, 밖에선 교사다. 교사 정체성만 갖고 있을 땐 도도하고 당당했다. 무슨 일을 시켜도 하면 되지 세상에 어려울 것 없었다. 결혼은 27살에 하고 아이는 5년 후에 가졌다. 결혼해서 겨우 자유로워졌는데 아이가 생겨 얽매이기 전에 맘껏 자유를 만끽하며 놀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엄격해서 대학 때도 밤9시가 통금이었다. 집에서 탈출하려고 결혼한 건 아닌데 결혼하니 자유를 얻은 건 맞았다. 딱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그랬다. 출산 휴가가 끝나고 나서부터 직장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서럽고 좀 억울했으나 표현하지는 못했다. ‘다 그러고 살아, 유난스럽게 굴지 마’라는 말이 어디선가 들렸기 때문이다.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었을 때는 담임을 맡게 될까봐 미리 학교에 앓는 소리를 해야 했다. 당시 담임은 아침 자습과 야자(야간 자율학습) 감독을 해야 했는데 특히 3월엔 분위기를 잡아야 한다고 당번 없이 매일 10시까지 남아 지도했다. 담임 빼달라는 말을 하는 게 구차하고 모자란 사람이 된 것 같아 자존심 상했지만 도도하게 굴었다간 일상이 망가지게 생겼는데 어쩔 수 없었다. 아들이 5살인 2008년엔 토요일에도 학교에 수업이 있었다. 어린이집이 끝나 아들을 데리러 가보면 우리 아들만 등원해서 선생님과 둘이 있었다. 간식이라며 전날 먹다 남은 딱딱한 백설기 덩어리를 쪽쪽 빨아 녹여먹는 걸 보고 눈에 불이 번쩍 켜졌지만 대안이 없었다. 따졌다가는 빈정 상한 어린이집에서 토요 등원인원이 적어 운영을 안 하겠다고 하면 곤란한 건 나뿐이니까.

엄마이자 교사라 나는 자주 모순과 혼란 속에 빠졌다. 직장인이니까 아이를 일찍 맡길 수 있고 늦게 데려올 수 있는 보육과 교육기관이 필요했지만 그곳이 내 학교라면 얘기가 달랐다. 학교가 일찍 시작하고 늦게 끝나면 내 아이 돌보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대학 선배가 자기가 KBS뉴스에 나왔다며 자랑을 하기에 찾아 본 일이 있다.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가 돌봄 방과후를 밤 9시까지 운영한다는 보도기사였다. 맞벌이 부부인데 늦은 시간까지 어린 자녀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게 되어 기쁘다며 자기 아이를 덥석 안아 올려 환하게 웃는 선배 얼굴이 클로오즈업 되었다. 나는 선배와 같이 웃을 수 없었다. 직장이 일찍 끝나면 될 텐데 학교가 늦게까지 업무를 늘려야 하다니 앞뒤가 바뀐 것 아닌가. 전국의 직장을 다 일찍 끝내게 하려면 오래 걸리겠지만 학교가 늦은 방과 후를 운영하면 실적도 되고 부모들은 당장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돌봄 방과 후 9시’ 업무는 엄마교사가 맡기 너무 부담스런 일이다. 나머지 교사도 좋아할 리 없다. 그러니 동료의 눈치를 보며 미안해하는 일도,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하며 아쉬운 소리하는 구차함도 엄마교사의 몫이 된다.

학생들에게 낮 동안 친절하게 상담하고 가르치다 집에 오면 에너지가 고갈되어 내 아이가 묻는 말에는 짜증과 신경질을 내며 함부로 대할 때가 많다. 내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직장에서 힘을 다 쏟고 왔으니 집에 오면 넉다운 상태인 건 당연했지만 아이한테 미안하고 남의 자식 잘 키우려다 내 자식은 뒷전인 것 같아 씁쓸했다. 새 학년 첫 시험을 앞둔 반 아이들을 응원하고 싶어 ‘시험 잘 보는 약봉투’를 만들기도 했다. 색색의 젤리와 약국에서 주는 칸막이 약봉투를 사서 칸마다 젤리를 나눠 담고, 포장해서 복약지도까지 적어 넣었다. “하루에 한 봉씩 복용할 것. 효과를 믿는 사람에게만 효험이 나타남. 기억력 쑥쑥약, 찍으면 다 맞는 약, 스트레스 풀리는 약 등등” 반 아이들에게 쏟는 정성의 반만이라도 아들에게 전해줬으면 세상 다정한 모자간이 되었을 텐데. 아들과 내가 필요한 말만 하는 무뚝뚝한 사이인 게 내 책임 같다. 자식 또래의 아이들과 늘 생활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엄마교사는 교사로서 하는 행동을 자식을 대할 때 행동과 자동 비교하기 쉬운 환경에 놓여있는 것 같다.

같은 행동을 학생이 했을 때 내게 일어나는 감정과 아들이 했을 때 생기는 감정이 다를 때면 나는 죄의식을 느낀다. 내 자식과 남의 자식에게 느끼는 심정이 같지 않은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다가도 내 자식은 귀하게, 남의 자식은 소홀히 여기는 것 같아 교사로서 죄악이라는 마음이 든다. 가령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상관 말라면서 탱자탱자 노는 학생을 보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래 네 인생이지 하며 마음이 쉽게 놓인다. 같은 반응이 내 아이에게서 나오면 불안과 걱정이 화학 반응하여 화로 폭발한다. 때로는 엄마의 강한 애착이 오히려 아이를 망치기도 한다는 걸 알지만 학생들에 대해 애착이 약한 건 교사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생각도 함께 있다. 엄마들이 학교에 인사 와서 ‘자식처럼 생각해주세요.’ 한다거나 옆 반 담임 선생님이 자기반 애들을 ‘아들~, 딸~’로 호칭할 때면 나는 우리 반 애들을 자식처럼 느끼고 있나? 아니라면 교사자격이 없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가 그런 논리에 반발심이 들었다가 널을 뛰었다.

엄마와 교사. 두 역할은 서로 다르고도 같아 겹치고 엇갈리면서 엄마 역할, 교사 역할이 분리되지 않는 데서 오는 괴로움까지 얹혀 있다. 돌봄 노동이 여자에게 기울어져 부과되는 문제, 노동 시간이 과다해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이 없는데 책임은 각자 개인이 져야하는 우리나라의 노동현실 문제 속에 상대적으로 애 키우기 좋다고 알려진 엄마교사도 예외일 수 없다. 아빠교사는 어떨까? 학교에서 아침 일찍 시작하거나 밤늦게 끝나는 업무가 주어질 때 ‘육아’ 때문에 곤란하다고 얘기하는 아빠교사를 본 일이 별로 없다. 아빠교사의 집에서 돌봄의 몫은 여전히 여자 쪽으로 기울어 있음을 보여준다.

아이 키우는 워킹맘이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겪는 어려움과 고통은 직종을 가리지 않고 융탄 포격을 맞는다. 엄마교사는 출퇴근 시간과 육아휴직 후 돌아올 자리가 지켜진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여건이 낫다. 더 열악한 상황에 있는 워킹맘들에게는 엄마교사의 애환을 드러내는 일이 배부른 소리로 들리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얘기하는 일이 나 보다 더한 누군가를 떠올리면 미안해진다. 미안한 건 사실이지만 감정과 분리해서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적정 근무시간을 지키고, 필요할 때 육아휴직을 하는 것은 권리이자 인권이다. 특권이 아니라 공공재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눈치 보지 않고 권리를 편안하게 누릴 수 있게 바뀌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방향이 아닐까.

여유와 틈이 많은 사회를 상상해본다. 아빠도 엄마만큼 육아에 책임감을 갖고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문화, 아이들 등하교(등하원) 시간이 부모의 출퇴근 시간과 같게 제도화된 나라, 저녁이면 상점이 다 문을 닫아 누구나 집에서 충분히 쉰 다음 일을 시작하는 나라를. 단지 나만의 상상으로 끝나기 않기를 빌어본다.     



2.

"선생님, $%3#예요?"

"뭐라고?" 

나는 단어가 정확히 들리지 않아서 되물었다. 

"아니에요." 

학생은 퉁명한 말투로 거의 의자에 누운 자세로 툭 말을 던졌고, 이내 입을 닫았다. 수업 진행에 바빠 그냥 넘어갔다. 수업을 한동안 하다가 어느 순간 그 말이 뭐였는지 조합이 됐다. 

“선.생.님. 메.갈.이.에.요?”였던 거다.

왜 나한테 저 말을 하지? 수업이 끝나고 수업 장면을 되돌아보니 글을 쓰라는데 딴짓을 하거나 짝과 떠들던 학생 몇 명에게 지적했던 게 기억났다. 우연히 그들은 모두 남학생이었다.

그렇다면 그 애는 내가 남학생들을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혼내는 사람으로 본 거였어? 어처구니없고 화가 났다. 뻔히 그 남학생들이 떠들고 딴짓하는 것을 제 눈으로 봤을 텐데 어쩜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이처럼 학교 내에서 교사를 교사로 보지 않고 여자로 보는 시선을 흔히 경험한다. 관리자가 그러기도 하고, 나이 많은 선배 교사가 그러기도 하고, 이번처럼 학생이 그러기도 한다.

7년 전 남고에 근무할 때였다. 수업 후 책상에 남학생 여러 명이 나와 여교사를 둘러싼 후 질문을 해서 정신을 딴 데 집중하게 하는 사이 한 명은 휴대폰으로 치마 속을 촬영하여 돌려보다가 그 선생님을 좋아하던 다른 학생의 신고로 덜미가 잡힌 일이 있었다. 여교사는 그 학생이 있는 학교에서 수업할 순 없다며 퇴학을 요구했고, 학교가 처리를 지지부진하게 끌자 2학기에 비정기 전근을 신청해서 가버렸다.

그 과정에서 여교사가 너무 어려서 과민 반응하는 거 아니냐는 말도 돌았고, 그래도 학생인데 반성하면 용서하고 잘못을 고칠 기회를 줘야지 범죄자 취급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는 말도 들렸다.

그때 나는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같은 여자로서 선생님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래도 퇴학시키기보다는 제대로 가르쳐야 하지 않나 싶었다.

생각이 정리되지 못하는 사이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한 채 '남학교에서 치마는 정말 입지 말아야겠어'라는 어설픈 교훈을 얻고 끝나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범죄였지만, 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여교사이중적 정체성을 갖는다

우리 사회에서 여교사의 정체성은 이중적이다. 교육에 대해 전문적 교육을 받아 권위를 갖지만 대놓고 남학생들로부터 남교사와 차별을 받기도 하고 교사라기보다는 여성으로 혐오, 무시, 깔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남자 선생님이 군대식으로 소리를 질러 손가락으로 까딱거리며 이리 오라고 하니 우다다다 뛰어와서 세상 공손하게 그 앞에 서는 남학생들을 볼 때면 저 애들이 평소 그 애들이 맞나 싶다. 교육학이고 뭐고가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지는 순간이다.

학교의 문화는 가부장적 요소가 많다. 교사는 공식 업무 외에 가부장제를 등에 업고 당연하다는 식으로 부과되는 비공식 업무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흔하다. 외부에 수업 공개를 하거나 대외적 행사가 열려 손님이 오는 날 다과 준비는 대개 여교사의 몫이다.

그날의 업무 분담에 교문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건 남교사에게, 교무실 구석 싱크대에서 과일과 차, 간식을 준비하는 것은 여교사를 대놓고 배정하기도 한다. 특히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교사가 과일을 깎고 있으면 둘러앉은 사람들은 예쁘게 깎네 아니네, 결혼하면 예쁜 딸을 낳겠네, 하며 평가를 한다.

그동안 근무했던 중고등학교의 남교장과 여교장 비율, 전체 교사 중 여교사의 비율과 부장 교사 중 여교사 비율을 비교해보면 학교가 얼마나 가부장적인지 일면을 알 수 있다. 예전보단 나아지고 있다지만 여전히 학교의 리더는 남자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고, 보조적 위치에는 여교사가 많다.

학생들에게도 이 문화는 그대로 답습되어 여학생은 부반장, 남학생은 반장 후보에 올리는, 지금은 믿지 못할 일들이 학교에서 자연스러웠던 때가 있었다. 소위 '학주'라고 불리는 학생부장은 특히 학교급을 가리지 않고 거의 남교사였고 지금도 많이 다르지 않다. 이유는 애들을 잡아야 한다는 건데, 왜 잡아야 하는지는 논외로 한다 해도, '잡는다'에는 강압적인 힘으로 누른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일이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학교는 올바른 것을 가르치는 곳이기에 더욱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최근 페미니즘 관련 이슈가 충격적 사건과 함께 터져 나왔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우리 일상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페미니즘 도서를 수업 중 학생들과 같이 읽고 토론하는 선생님들도 늘어나고 있다.     

편견과 차별적 언어로부터 깨어나는 학생들

독서교육을 위한 추천도서목록 중에는 페미니즘 도서가 있다. 목록은 관심 있는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함께 수업 중에 읽은 경험을 나누며 신중하게 만들었다. 신중하다는 것은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의 동의어이다. 실제로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는 수업을 고안한 선생님들은 여러 가지 두려움을 토로하였다.

50분의 수업 시간은 짧아 끝나도 논쟁거리는 남았는데 교사가 나간 교실에서 남은 여학생들이 준비 없이 자기들끼리 감당할 일이 두렵고 사례를 얘기하다가 남·여 학생 간 대결 구도가 되어 분노의 소용돌이로 이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실제 여학생과 선생님이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 사례를 공감하며 이야기하는 와중에 "김치녀들 클라스 좀 보소"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고 한다. '평범하고 착하던' 남학생의 이런 반응에서, 깊이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나왔다는 것에서 더욱 충격을 받았다는 수업 후기를 들었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두려움이다.

아직 학생들과 함께 읽기엔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선생님들도 많았다. 그런 경우 좋은 책의 목록을 공유하여 각자 읽고 교사인 나부터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는 방법을 택한다. 책을 읽고 나면 나의 경험이 그냥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여자'라는 이름으로 '가부장제'라는 구조 속에서 겪게 되는 일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이 인간 존엄을 얼마나 해쳐 왔는지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갖게 되고 표현해야 바뀐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까칠하다, 따진다'는 말을 듣는 것이 싫어 둥글게, 부드럽게, 쿨하게 보이려고 모르는 척, 대충 넘어가는 나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나'가 모여 가부장제 구조를 공고히 하는데 일조한다는 것, 조용히 넘어가면 조용히 묻힌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는 남성의 목소리로 속 시원히 문제를 얘기하고 있어서 훨씬 설득적이고 파급 효과가 크다는 책이다. <아빠의 페미니즘>은 경상도 남자로 태어나 기득권 버리기가 참 어렵고 반성을 많이 하게 되었다는 남자 선생님이 추천하였다.

스웨덴에서는 교육용 교재로 쓰인다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수업중 남녀의 차이가 의미심장하다. 남학생은 우리나라는 이 정도 차별을 받지 않는다고 했고, 여학생은 차별의 모습은 우리나 다른 나라에서나 비슷하다고 느꼈다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학생이 '페미니즘은 여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함께 잘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는 글을 쓰게 된 책은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이다.

수업 후 서평을 받아보면 학생들은 뇌가 유연해서 그런지 좋은 책을 읽은 후 금세 편견과 차별적 언어로부터 깨어난다. 나도 같이 배우고 깨닫게 된다. 책을 함께 읽는 자리에서는 교사와 학생이 따로 없다. 이것이 두려움을 이기고 조심스럽게 페미니즘 책을 학생들과 함께 읽는 의미가 아닐까.     



3.

남고에 근무한 첫해의 일이다. 생리량이 너무 많아 한 시간에 두 번은 생리대를 갈아야 하는 나는 생리 둘째 날이 수업 많은 날에 걸리는 게 제일 난감했다. 수업은 50분이고 내 상태라면 수업 중간에 생리대를 한번 갈아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바지에 생리혈이 샜다. 나는 교탁에 꼼짝없이 움직이지 않고 서서 아무 일 없는 척 수업하다가 끝종 치자마자 누가 볼 새라 교무실로 튀어갔다. 웃옷으로 엉덩이를 가리고 공강 시간에 바지를 사러 학교 근처 옷집에 바쁘게 다녀와서 다음 수업에 들어갔다. 어디에 옷집이 있는지 몰라 동네 사는 선생님까지 대동하고 갔던 당황스런 경험이다. 생리 보건휴가라는 게 있었지만 반 아이들을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하니 부담스러워 사용하긴 힘들었다. 양 많은 날이 주말에 걸리기만 바라면서 그때그때를 넘겼다.

나는 평생 생리를 540번 했다. 초경이 초등 6학년 때부터니까 지금까지 34년간 했고 주기가 23일로 한번에 5일 넘게 한다. 계산을 해보니 ‘7년 반 동안 매일’ 피를 흘리고 있었던 셈이다. 비중이 상당한데 그 대우는 상당했을까? 생리대 광고에서 생리혈은 파란색으로 표현한다. 헌혈 공익광고나 드라마, 영화 속 수술 장면에서는 피를 붉은색 그대로 드러낸다. 여자가 외계인도 아니고, 피를 파란색으로 드러내는 결정 밑에는 감추고 싶거나 혐오의 심리가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생리대를 사러 가면 요청하지 않아도 여직원이든 남직원이든 검정 봉투에 따로 넣어준다. 직원 교육 매뉴얼에 있는 걸까. ‘생리대는 가려야 한다, 드러내면 안 된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의학계나 보건 분야에서 월경(생리)로 인해 겪는 몸의 고통을 줄이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가. 고개를 젓게 된다. 여자라면 생리 전 증후군과 생리 중 불편함을 경험하게 되고 때로는 일상생활이 전혀 불가능할 정도의 고통을 겪기도 한다. 내 경우 생리 일주일 전부터 몸이 여기저기 쿡쿡 쑤시고 저리다. 기분이 다운되고 찌뿌듯하다. 중요한 시험이나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자리를 앞두고는 생리 날과 겹칠까 봐 불안하고 걱정된다. 생리를 시작하면 이번엔 통증이 문제다. 심한 사람은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하고 하루 종일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워한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늘 허리와 배가 쿡쿡 쑤시고 아팠다. 체해서 토하거나 몸이 차가워지면서 설사를 자주 했다. 음부 근처가 칼로 찌르는 듯 뜨끔뜨끔했다. 몸을 움직일 때와 걸을 때마다 울컥울컥 떨어져 내리는 핏덩어리가 말할 수 없이 불쾌했다. 신경이 쓰여 집중력이 떨어졌고 몸살처럼 아파서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일터에서 사람들은 어디가 아파도 몸을 가눌 정도면 출근해서 평소처럼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픈 사람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아픈데 쉬지도 못하고 일하면 서럽기도 하다. 여기에 여자라서 생리통까지 겹쳐있다. 예고된 고통이 평생 반복된다는 점에서 더 서럽다. 생리만 놓고 생각하면 여자인 게 너무 싫었다. 출산 능력은 여자만의 선물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선물은커녕 저주 같았다. 범인은 따로 있는데 출산하는 몸을 가진 여자라서 문제라 생각했었다.

아이 낳고 몇 년 후부터 급격히 많아진 생리량은 그후 5년간 심했다. 나는 생리 주기가 23일로 한 달에 두 번 할 경우도 있는데 양이 제일 많은 생리 둘째 날엔 한 시간에 초대형 울트라 생리대를 2번 갈아야 한다. 그런데도 병원에 가볼 생각을 못 하고 ‘그때 며칠만’ 그러고 마니까 대충 참고 넘어갔다. 늘 그러니 잘 돌볼 수도 있었는데 늘 그러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알고 보니 빈혈이 심했다. 아이 감기 때문에 동네 가정의학과에 간 날,

"애도 애지만 엄마가 검사 한번 받아야 할 것 같아요. 안색을 보니 빈혈이 심해 보이네요."

의사의 권유로 검사를 하니 정상 수치가 12인데 나는 8 이었다. 생리량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했다. 적어도 10 이상으로 올려놓고 철분제를 먹어야 한다며 철분주사를 맞으라 했다. 이 정도면 오후엔 엄청 피곤했을 거라고, 그냥 두면 심장에 무리가 간다는 것이다. 저녁에 피곤해서 실신하듯 쓰러지는 건 운동을 안 해서 내 체력이 약해진 탓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날 바로 링거를 맞았다. 시작한 지 27년 만에 생리를 이유로 한 첫 진료였다.

만 40세 정기 건강검진을 받는 해에는 의사 상담 서비스가 있었다. 그때도 빈혈이 계속됐다. 의사는 자궁에 혹이 있거나 뇌 쪽 문제일 수 있으니 산부인과나 신경외과에 정밀검사를 하라고 권했다. 덜 무서운 산부인과에 먼저 갔다. 검사 결과 자궁 내 혹이 있는데 위치가 좋지 않아 생리 때 지혈이 잘 안되어 양이 많은 거라고 했다. 왜 그동안은 알아볼 생각을 못 했을까?

“자궁을 적출하거나 혹을 떼는 수술을 하거나 선택하세요. 근데 혹이 위치가 안 좋아서 수술이 한 번에 안 되고 여러 번에 걸쳐 할 수도 있어요. 그러고도 깔끔하지 않을 수도 있고.”

“자궁을 적출하면... 부작용은 없나요?”

“아이 더 낳을 건가요?”

“아니요.”

“그러면 뭐~ 없어도 그만이죠.”

아이를 낳지 않으면 자궁은 필요 없는 장기인가? 몸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데 어떤 게 없어지면 연쇄적으로 영향을 주는 게 아닐까? 선뜻 내키지 않아 병원을 옮겨 다시 진단을 받았다. 옮긴 병원 의사는 수술 후 당일 퇴원해도 되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다. 거기서 혹 제거 수술을 했고 한 번에 깔끔하게 됐다. 내 몸을 아껴주고 싶어 병가를 내고 보약도 먹었다. 처음 병원에서 말한 대로 자궁을 들어냈다면 어땠을까. 전 병원 의사가 여자였는데 같은 여자로서 자궁 없애는 걸 여드름 짜내는 것쯤으로 취급하는 게 섭섭하고 미웠다.

수술 후 생리 량이 전보다는 줄었지만 여전히 많았고 생리통도 비슷했다. 허리는 뻑적지근하고 생리 끝 무렵에는 생리대에 살이 쓸려 아팠다. 천 생리대를 쓰면 덜 하다고 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허리가 덜 아팠고 유해 생리대 걱정이 없었다. 썩지 않는 쓰레기를 배출하지 않아 양심의 가책이 덜어졌다.

2017년. 생리컵(월경 컵이라 불러야 한다고 알고 있다.)을 알게 되었다. 2018년 1월, 식약처에서 첫 수입 허가를 했다. 외국엔 이미 널리 퍼져 간편한 생리 기간을 보낸 지 오래라는데 우린 생리대 회사의 반대로 수입조차 허락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화가 났다. 미국산 쇠고기는 뇌에 구멍 뚫릴 위험이 있다고 국민들이 그렇게 반대해도 잘만 수입하더니만 돈 때문에 여자들이야 고생을 하건 말건 뒷짐 지고 있었다니. 그간 천 생리대 빨아 쓰던 수고로움과 외출하거나 여행 갈 때 짐이 확 줄었다. 생리혈 덩어리가 뚝뚝 떨어져 나오는 불쾌한 느낌이 사라진 게 강력한 메리트고 허리 통증도 사라졌다. 하루 두 번 만 갈면 된다. 경제적 이득도 크다. 유효기간은 영구적이지만 보통 2년을 쓰라 하니 한 달에 1회로 치면 한 번 생리에 1,600원 정도가 든다. 생리대의 가격과 비교해보면 무지 싸다.

최근엔 생리대 광고도 달라졌다고 하고, 생리대 이외의 대안이 모색되기 시작했으며 여성의 몸 돌보기에 여성 스스로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다. 이제 몸 고생을 더 이상 참지 말았으면 한다. 있는 걸 가리거나 대충 참고 넘어갔더니 좋아진 게 없었다.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몸과 고통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당당하게 말하고, 의사들에게 생리통을 줄일 방법을 연구하라고 요구하고 싶다. 내 몸의 주인은 나이고 세상의 절반은 여자니까.

“어느 날 갑자기 남자가 월경을 하고 여자는 못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중략) 지체 높은 정치가들의 생리통으로 인한 손실을 막기 위해 의회는 국립 월경불순 연구소에 연구비를 지원한다. 의사들은 심장마비보다 생리통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한다.”(글로리아 스타이넘 저,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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