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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섭 Nov 09. 2019

가장 깊고 아득한 밤

김진영-경기 호매실고-blog.naver.com/2459466

황현산 선생님의 추모낭독회에 다녀왔다. mbc아나운서들과 황현산 선생님의 책 네 권을 출판한 난다 출판사의 콜라보로 진행된 이 낭독회는 미리 사전 신청을 통해 초대권을 배부했다. 선생님께서 별세하신지 오늘자로 1년이 되었다. 꽉 짜여진 프로그램 속에 추모의 감정을 녹여낼 틈이 보이질 않아 아쉬움이 많았던 낭독회였지만 그 아쉬움을 신형철 평론가, 김민정 시인, 가수 요조가 채웠다. 물론 처음부터 그 세 사람을 보러 나선 길이였지만.     

낭독회는 8명의 아나운서 들이 황현산 선생의 글 중 한 꼭지를 읽고 그 사이사이 김민정 시인의 편지, 신형철 평론가의 대담, 가수 요조의 시 낭독이 이어지는 형식이었다. 아나운서들의 목소리는 각각 분위기가 다르고 듣기 좋은 음성이었지만. 뭐랄까, 선생님의 글이 가진 감성을 잘 실어나른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성우들이 하는 시 낭송처럼 글과 감정이 약간 과잉되게 엇도는 느낌이랄까. 오히려 나는 요조의 시 낭송이 가장 듣기 편안했다. 아나운서 중에서는 가장 막내라는 김수지 아나운서의 첫번째 낭독이 제일 인상깊었다. 목소리가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는 아나운서였다.     

김민정 시인의 편지는 문장마다 '선생님'을 부르며 끝이났는데, 그 구절 구절이 어찌나 꾹꾹 참아내고 있는 눈물 같았는지. 뒤 배경으로 깔리던 김민정 시인과 황현산 선생님의 우산 쓴 뒷모습이 아련하게 마음을 울렸다. (실제로 이 때 많은 사람들이 훌쩍였다.) 또박또박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시인의 다정함과 단단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낭독이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마음 깊이 존경했을 때 그에 관해 저렇게 말할 수 있구나. 느껴지는 명문이었다. 들은대로 일부만 옮겨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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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었는데, 8월입니다 선생님.

작년 8월 7일까지는 계셨는데 올해 8월 7일에는 안계십니다 선생님. 있다 없고, 없는데 있음이 삶이고 죽음일까. 삶이고 죽음인가 나 혼자 묻고 나 혼자 대답하는 일로 생사라는 것을 공부하게 만든 선생님. 일년이 꼬박 갔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오늘입니다.

선생님이 없으니까 나는 슬플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슬픔이 정확하게 어떤 감정이더라. 선생님을 좇아 사전을 찾고 있는 나였던 겁니다. 

'서럽거나 불쌍하여 마음이 괴롭고 아프다.' 그렇다면 내 감정은 슬픔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에 대한 내 감정의 요체가 '필요'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겁니다.     

'꼭 소용되는 바가 있음.'

그런데 선생님 없음

그래서 나 슬픔     

<황현산 선생에게 부치는 편지_김민정 시인>     



신형철 평론가의 짧은 대담은 역시. 한 마디 한 마디가 지적 새로움을 주는 이야기들 투성이였다. 황현산 선생님의 글에 대해 쓴 <황현산의 부정문> 그리고 황현산 선생님의 살아생전 말하기 태도나 그에 관한 기억. 황현산 선생님을 말하는데에 자신은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그 분을 표현하는데에 이렇게 또 정확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서 실패한다는 것. 사소한 것에서 타협하지 않는 공동체가 가장 성숙한 공동체라는 표현.     


선생의 책제목 그대로 “밤이 선생”이라면, 

그는 지금 한국문학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밤이다.

<황현산의 부정문_신형철>     


요조의 <황현산 선생에게 보내는 목소리>는 사실 내가 가장 몰입했던 순간이었다. 요조는 무대 위에 올라가 황현산 선생님의 책 <잘 표현된 불행>의 한 부분 '시는 포기하지 않는다.'를 낭독했고, 뒤 이어 '세월이 가면, 박인환' 시를 낭송하는 것 같더니 무반주에 조용히 노래를 시작했다. 약속되어 있었던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부르고 싶어서 부르는 노래. 그에게 주고 싶어 들려주는 노래. 기교가 섞여있지 않은 단정한 목소리였고, 다소 딱딱한 분위기의 행사였기에 갑작스런 노래가 더 멋지게 느껴졌다. 빈틈없이 꽉 짜여진 프로그램 안에 가늘게 균열을 내는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이런 답답하고 경직된 분위기의 무대에서 자신만의 리듬으로 그걸 돌파해내는 요조가 너무 좋다. 그 용기와 낭만을 사랑한다. 황현산 선생님께서 써 주신 '하하'라는 두 글자를 자신의 팔에 타투로 새겼다는 요조. 그래서 요즘 웃음이 헤퍼졌단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방식이 몹시 건강하게 느껴졌다.     

내가 조금 의아하게 느꼈던 부분은 김민정 시인의 글도 <황현산 선생에게 부치는 편지> 요조의 낭독도 <황현산 선생에게 보내는 목소리>로 황현산 '선생님께'가 아닌 '선생에게' 였다는 것이다. 우리 곁을 살다간 대중의 '선생'으로서의 그를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였을까. 극존칭이 가져오는 부담과 거리감을 해소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개인적으로 깊이 마음을 주었던 한 인간으로서의 '황현산 선생'을 추모하고 싶었던 마음이었을까. 그 어느 쪽이든 그 마음은 잘 전달되었다고 믿는다.     

내가 황현산 선생님의 글을 읽고 잠을 이루지 못했던 날은 이 글을 읽고 난 날이었다. 여성 살해에 관한 사회적 문제를 다룬 글이었는데. 그의 여성과 남성을 바라보는 통찰과 안목이 대단히 놀라웠다. 이런 시선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시대의 어른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나는 깊은 감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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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게 여자는 그가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는 사회의 얼굴이다. 어렸을 때는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어머니가 대신해서 전달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아내가 대신해서 요구한다. 남자를 붙잡고 잔소리하는 여자나 거꾸로 남자에게서 해방되려는 여자나 본질적으로 그 요구 사항은 같다. 남자는 저 '명령하는 사회'를 자기 힘으로 파괴할 수는 없지만 여자는 만만해서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살해된 여자에게 자기 서사를 만들 수 있는 입이 있다면 그 서사는 훨씬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사회의 요구를 전하기 전에 사회는 먼저 여자에게 명령한다. 가부장 사회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부터 다른일까지 삶의 실제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일을 담당하고 있는 여자는 사회의 막중한 명령을 자신의 어깨로 느낀다. 게다가 명령을 전달하는 여자는 남자를 달래기도 해야 한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가 어떤 마술로 저 명령을 말랑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여자에게 그런 마술은 없다. 여자는 살해당함으로써 마지막 마술을 베푼다.      

이 글을 읽는 남자들은 자기는 그런 남자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기 바란다. 가부장 사회에서 착한 남자건 나쁜 남자건 남자의 서사는 같다. 남자의 서사는 못난 살인자의 서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영웅의 서사다. 먼저 들어야 할 것은 희생자의 서사다. 역사의 발전은 늘 희생자의 서사로부터 시작한다.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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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 선생님의 책에 관해 서평을 꼭 한 번 써보고 싶었는데 지금껏 그러지 못했다. 대단한 글은 그에 압도되어 오히려 어떤 감상도 쓰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입 안에서만 꼭꼭 씹어 되새기기만 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로 이런 낭독회에 다녀오게 되어 참 좋다. 덕분에 황현산 선생님의 기일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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