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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섭 Nov 09. 2019

스스로를 한심해할 수 있는 권리

김영희-경기 천천고-blog.naver.com/hehe26

통통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 요즘.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들이 강제 소환되고 있다. 체중이 조금이라도 늘면 엄청나게 날카로워졌던 과거와 현재(너무도 편안히 통통버전을 받아들이고 있어 문제)의 차이가 무엇인지 자주 생각해본다.     

방학 내 열심히 놀러 다닌 대가로 3kg의 체중을 얻었다. 애정하는 사람들과 맛난 것 먹으며 좋은 걸 보고 다닌 일이 넘 신났더래서, 살찐 게 하나도 아쉽지 않다. 죽을 때 주마등으로 떠오를만한 기억들을 잔뜩 쌓음. 유일한 불편은 여름 전에 입던 옷들이 좀 낀다는 건데, 그거야 뭐, 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빼면 되지.      

운동을 갈 때마다 필라테스 선생님이 내 몸을 과하게 염려해주셔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불만이 없는데 하도 큰일난 것처럼 ‘급찐 살은 급히 빼야 하는데’ ‘이 옆구리를 어째’ ‘우리가 어떻게 만든 몸인데(깊은 한숨)’ 하셔서, 이건 아니다 싶은 맘이 불쑥불쑥 들었다. (워낙 식단조절 잘하고 운동 열심히 하는 모범생이어서, 선생님이 나 살찐 걸 보고 많이 놀랐다. 이분 입장에선 무조건 믿던 수강생에게 뒤통수 맞은 느낌이라 당황한 거지, 나쁜 사람은 아니다. 애제자가 국어시험 답안지 백지로 낸 거랑 똑같다.) 오늘은 급기야 뭘 먹는지 궁금하니 식사 사진을 찍어 오란 말씀을 하심. 이 운동을 그만 둬야 하나 3초 정도 생각을 하다, 그러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말라지려고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살려고 하는 거라고. 나는 지금 내 몸이 싫지 않다고. 선생님이 자꾸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싶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즐겁게 시간 보내며 여행한 건 잘못이 아닌데 그렇게 말하니 내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다고.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염려하지 않아도 체중 조절할 생각이라고, 하지만 내 속도대로 천천히 하고 싶다고. 난 지금의 내가 맘에 든다고. 

3년 동안이나 매주 두 번씩 몸 부딪혀가며 만나온 사이라 얼굴을 붉히거나 흥분하지 않고 담백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필테 샘은 ‘그래요?’ 놀라가며 내 말을 듣고선(‘지금 몸도 좋아요.’라고 말했을 때 가장 놀라워 했다. ‘그래요오???’) 회원님 편한대로 하시라며 인정해줬다. 뭐, 남한테 인정받을 일은 아니지만. 그 사람도 나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뭐야, 살찐 몸이 좋다고?’라는 생각이 투명히 드러나긴 했지만. 여튼, 이분도 나름의 노력을 했다.     

뭔가 레벨업한 느낌이라 남은 운동을 할 때에도, 타닥타닥 걸어 집에 올 때도, 엄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할 때에도, 기분이 좀 들떠 있었다. 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기록해두고 싶다. 그리고 기억해두고 싶다. 오늘의 일을.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우쭐함.     

요즘의 즐거움은,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내가 아는 최고로 맛난 음식을 사주며 대화를 하는 일. 내가 이 사람에게 뭔가를 해주었단 효용감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이와 최선을 다해 ‘따순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단 게 좋다. 음식 칼로리, 다음날 체중 고민하지 않고 온전히 그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앞으로도 나를 지키며, 나를 안아주며, 사랑하는 이들과 시공간을 ‘온전히’ 공유하며. 그렇게 살아야지. 지금의 내가 좋다. 애써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루.     

지금은 왜 별로 불쾌하지 않지?     



“내면이 성장하셨군요!”란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고.

지난 시절의 나는, 체중이 는 것을 마치 죄진 사람인 마냥 사과하고 다녔다. 체중이 불었는데 누굴 만난다, 그럼 마주 앉자마자 요즘 살이 찐 이유를 설명하는 거다. “회식이 있었어.” “빵을 너무 많이 먹었어. 새로 생긴 빵집 진짜 맛있더라, 짜증나.” 발언의 마무리는 항상 ”이제 살 뺄 거야.” “실컷 먹었으니 당분간 참아야지. 금방 빠질 거야.” 라는 식의 다짐으로 끝났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내 몸의 특성일 뿐인데. 내가 살이 찐다고 누가 피해를 입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미안해하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변명은 미안할 때 하는 거잖아. 

체중 강박이 있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살이 찐 나를 못 견뎌 했나보다’ ‘살이 찌면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것 같았어’라고 여겼는데. 체중이 느는 걸 못견뎌 했던 본질적 이유는 ‘사과하고 다니는 상황’이 싫어서였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지금 체중 문제에서 비교적 가벼워진 ‘정확한’ 이유는 자기애가 커졌다거나 내면의 힘이 강해져서가 아니라, 똑똑해져서다. 내 몸의 상태에 대해 남들에게 사과하고 다닐 이유가 전혀 없단 걸 알게 돼서. ‘기승전체중’이라 할 정도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탐색은 무조건 체중으로 끝이 난다. 그 경험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됐어, 그 경험을 이런 식으로 극복했기 때문의 지금의 내가 됐어, 그 경험을 이러이러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됐어. 왜 이렇게 체중 이슈에 꽂혀 있나, 20년이 다 되어가는 비만 청소년의 경험에서 왜 아직 자유롭지 못한가, 를 자주 궁금해했다.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으니까. ‘사과하고 다녔구나, 자신에 대해서.’라는 이유를 찾은 후, 감을 잡았다. 내가 그 기억에 왜 그렇게 꽂혀 있었는지. 그것 말곤 내가 가진 특성들을 변명하듯 이야기할 일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성적 좋고 성격도 좋은 딸내미로 자란데다, 대학 입학도 사회인 진입도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남보기에 그럴듯한 성과를 거두며. 가진 것을 내세웠으면 내세웠지 위축되어 우물쭈물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 본 경험이 없었던 거다. 내가 가진 조건과 상황에 대해 변명하며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체중 관련 경험들이 너무 강렬했던 것. (상대가 뭐라 하기도 전에) 스스로를 한심한 사람 취급하며 변명하듯 꺼내놓는 일은 체중이 화제에 오를 때 뿐이었다. 체중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특성을 부끄러워하며 설명해야하는(사실은 화제가 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는 방식으로 ‘숨기기’ 위함이었다.) 경험이 그때 뿐이었단 게 문제였던 거다.

지금은 안다. 내 체중의 증감이 남들에게 사과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란 걸.      

(아주 효과적인 ‘마음을 둘 집단과 아닌 집단을 구별하는 법’도 알게 됐다. 만났을 때 “나 살쪘지?” “너 살 좀 쪘다(혹은 “왜 이렇게 말라졌어.”)” “예뻐졌다”가 첫인사인 모임은 최대한 멀리한다는 기준을 만들었다. 외모 화제로 5분 이상 대화하는 모임도. 폄훼하는 건 아니다. 내가 그 모임에서 재미를 못 느끼는 것처럼 그분들도 나에게서 재미를 못 찾으실 거다.)     

문제는, 특성일 뿐인데 괜히 사과하고 다녀야 할 것 같은 항목들이 세상에 아주 많다는 거다. 성적도, 학벌도, 직업도, 수입도, 거주지도, 자가용 종류도, 혼인 여부도, 등등등, 등등등도. 그건 내 특성일 뿐이고, 설사 그 특성들이 내 맘에 차지 않는다 해도, 내가 남들 앞에서 쭈그러져 있어야 할 일은 아닌데.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걸 당연스럽게 여긴다. 나의 잘못인양, 내가 죄라도 진 것 마냥.     

사과 안 해도 돼. 변명 안 해도 돼. 설명할 필요도 없어.     



며칠 전 2학년 학생에게 상담 요청을 받았다. 1학년 때엔 성적이 곧잘 나오던 친구인데, 올해 진로 문제로 혼란을 겪으면서 마음이 잘 잡히지 않았단다. 내신이 4등급이 나왔는데 이 정도면 수도권에 있는 대학을 가지 못할까봐 걱정이란다.

“2학년 2학기, 3학년 1학기, 두 학기나 남아 있어. 기운 내.” 

“면접 넣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내신 100 반영이 아니니 괜찮아. 낙담할 때가 아니야.” 

...같은, 영양가 하나 없는 답을 하며 위로를 하고 있는데. 이게 뭔가 싶었다.

내신 성적이 2등급 이하면 큰일이 나나? 수도권 대학을 못가면 인생이 쫑나나? 대기업 입사를 못하면 사람 구실 못하는 건가?

뭐야, 위로 한답시고 하는 말들 진짜 구리다.

이게 어떻게 위로야, 특정 집단을 폄훼하며 ‘넌 거기 끼지 않을테니 염려마.’라는 말을 한 거다. 이게 뭐야. 똥 같은 말이다. 똥이다, 똥.

<현수동 빵집 삼국지> 수업을 하면서 가장 현타가 온 지점은,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영업을 하거나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게 될텐데 왜 학교에선 10%의 일자리(대기업 직원, 공무원 같은)를 바라보며 수업을 하고 진로지도를 하고 있지, 란 생각이었다.

현장 교육, 직업교육을 하잔 말이 아니다.(<- 제일 뜬구름 잡는 수업 하는 사람) 90%의 사람이 몸담게 될 상황을 이렇게 ‘없는 것처럼’ 취급하는 게 옳냐는 거다. 그쪽을 바라보기만 하면 큰일날 것처럼. 없는 것처럼 다뤄지다 보면 그 안에 속한 사람이 꼭 죄를 진 것 같잖아, 부족한 것 같아 스스로를 미리 변명해야 하잖아, 10% 안에 들지 못한 연유를 설명해야 하잖아.

숫자의 문제를 떠나. 규모가 크건 작던, 아니다, 그게 무엇이건간에 ‘없는 것처럼’ 다뤄지는 존재가 있어선 안된다. 드러나는 몇몇만 정상인 게 되어버린다고. 학교에서 당연시 학습되는 분위기가 아이들의 무의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것인가.     

90%의 세계를 수업 속으로 안고 들어오는 방법을 고민해야겠다.     

나는 서른 여섯에 깨달은 것들을, 얘들은 십대 때 알게 해버려야지. 똑똑하게 만들 거다. 스스로를 한심해할 수 있는 권리는 자기에게만 있는 거라고. 한심해할 수 있는 지점도,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에만으로 한정되는 것이지. 남이 가진 특성을 내가 가지지 못했단 이유로 한심히 여겨선 안된다는 것도.

마음으로 다가가 ‘넌 소중해’ 알려주고 안아주는 것 말고. 진짜 머리로 확실히 알려주고 싶다. 네 허락 없이 널 한심히 여기는 집단이 있다면 과감히 인연 끊으라고, 딱히 손해볼 것 없다고. 같이 있으면 즐거워지고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이들과 깔깔 웃으며 지내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다고.

아, 뭔일인지 밤에 잠이 오질 않아서 끄적끄적 쓰다보니. 진짜 제대로 의식의 흐름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난 한심하지 않아. 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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