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병섭 6시간전

죽는 날 아침이 전혀 서럽지 않다

나의 시선을 빼앗긴 시


“시선을 빼앗은 시”


나는, 여러 시를 둘러보던 중에 한 시를 발견했다. 모두가 알 법한 시인이었고, 나는 거기서 한 시에 시선이 빼앗겼다. 어떤 시인지는 마지막에 밝히겠다. 내가 읽은 시에 대해 느낀 점을 먼저 말하고, 나의 생각이 맞는지 시를 확인해줬으면 한다. 




시 속의 나는 죽어가고 있는 상황인 것 같았다. 가깝게는 느껴지지 않는 정체불명의 목소리들이 자신을 부르고 있는데, 시 속의 말하는 이는 도저히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으니 대체 누가 부르는 것이냐 하며 궁금해하고 있는 것 같다. 또 자신의 죽음은 슬퍼할 날이 아닌 기뻐할 날인데 왜 서럽게 부르는 것인지 생각하는 것 같다. 한 마디로 이러지들 말아 달라고, 부르지 말고 서글퍼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 같다. 




이 시를 쓴 사람은 독립운동을 해보려 하다 처음부터 들켜버려 실패해 버린 사람인데, 그런 자신을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 라고 자신을 표현할 것 같고, 일을 마치고 죽는 날은 조국의 독립이 아니었을까 하다. 자신이 죽거든 너무 서글퍼 하여 자신을 부르지 말라고, 일제에 붙잡혀 감옥에서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쓴 시가 아닐까 싶다. 




나도 이와 비슷하게, 나는 분명 괜찮다고 느끼는데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안타까워하고 도우려 하는 상황을 겪은 적이 존재한다. 도우려는 사람들도, 괜찮은 나도 누구 하나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시 속의 말하는 이가 그리 애타게 자신을 부르지 말라는 것처럼 나를 안타까워하며 도와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대로의 일을 마친 상태일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나의 시선을 빼앗긴 시는 윤동주의 <무서운 시간> 이다.



안타까움이라는 감정 ”


윤동주의 <무서운 시간>이라는 시가, 나의 시선을 빼앗았다. 그렇다면 나의 시선을 빼앗은 이유도 존재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 점을, 이 시 속에서 내가 마음에 들었던 구절을 분석하며 알릴까 한다. 




시 속의 구절 중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 나를 부르는 것이오.” 라는 내용이 있다. 나는 이 구절이 관심이 갔고, 그 구절을 분석해보기 시작했다. 이 시를 쓴 시인인 윤동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했다’ 는 것은 독립운동을 시작해보려 했을 때 바로 잡혀,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해보지 못한 자신을 나타낸 것 같다.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다’ 는 것은 자신은 이미 붙잡혀 하고 싶어도 독립운동을 못 하는 상황을 표현한 것 같다. 그런 그를, 부르며 다시 곁에라도 올 수 있을 것처럼 부르니, ‘어디에 내 한몸 둘 하늘이 있어’ 라며. 슬퍼하고 왜 이런 나를 그렇게도 그워 해주는 것인지 의문을 갖는 것 같다. 




이것이 나의 명대사라고 자랑스레 밝힐 정도의 구절은 아니나, 나의 눈길이 갔다. 저 구절들이 자신의 대한 혐오와 실패감인 것 같았고 자신이 자신을 그리 생각하는데 왜 주변에서는 자신을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것인지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 시가, 많고 많은 시들 가운데에서 나에게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을 전해주었고, 그 안타까운 감정이 마음에 들어서, 시선이 가고 분석을 하며, 시 속의 말 하는 이와, 시인에 대해 알게 되어간 것 같다. 




너에게 보내는 시 ”


나는 이 시를, 먼 미래인 70년 후 내가 죽을 때 나의 장례식에 온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죽을 때까지 언제든 못다 한 말들이 많을테니 시 한 편으로, 어떤 감정을 느꼈으며, 나의 생각이 어떠한지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알리고 싶다. 시의 내용을 인용하여, 내가 전달하고 하는 의미를 넣어 보내려고 한다. 




장례식에는 일반적으로 고인을 그리워 하며 서글피 울고, 고인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 살아생전 모든 것을 잘 했으리는 만무하고, 잘못한 일들이 있을텐데 그것을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이라는 시구에 빗댔다. 하고자 했으나, 못 했을 수도 있고. 애초에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을 수도 있는 나를 알고 있음을 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부르는 누군가가 존재하다면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텐데...’ 의 시구를 전한다. 이 시에서 일이란 독립운동을 알리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 일을 생이라고 생각하고 나의 생을 마치고 죽는 날 아침이 전혀 서럽지 않다. 나는 즐겁게 추억 한 켠을 가지고 갔다는 의미인 것을 알린다. 전혀 슬픈 날이 아니고, 그저 순리에 따라 가는 것이니 슬퍼할 필요도 나를 부를 필요도 없다. 나의 장례식에서 나를 위해 서러워 해주는 이들이 나를 잊고, 부르지 말고 자신의 남을 생을 잘 보내길 바란다. 나도 즐기며 떠날터이니. 




 너를 위한 추억 ”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여러 감정을 느꼈다. 그중에서도 서러움과 걱정에 대한 감정이 더욱 컸다. 시 속의 말 하는 이를 그리워 하며 부르는 이들의 감정이 느껴져서 서러움을 느꼈고, 그런 그들을 걱정하며 눈을 감고 있는 말 하는 이를 기억해서 걱정이란 감정을 느꼈다. 남겨진 자들을 위한 추억 한 켠 남겨두고 가고 싶어, 한 가지의 아이디어를 내놓아 본다. 남겨진 이들에게 나 또한 남겨질 수 있는 어떠한 물건이 존재했으면 했고. 나는 그것을 무드등을 생각했다. 그저 일반 무드등이 아니라, 나와의 추억을 상기시킬 수 있는 특별한 무드등을 말이다. 




예를 들어, 나를 특정하는 어떤 사물이나 생명체의 모형을 새기거나 꾸미면 그 무드등을 볼 때마다 나를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왜 그 많고 많은 추억을 남길 것들 중에 무드등을 골랐냐 하면, 보통 밤이 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혼자이기에 더욱 두려워한다. 내가 그랬고, 나는 그 밤을 작은 빛으로 버텨내었다. 나처럼 그 밤이 두렵지 않길 바라며, 동시에 나를 추억할 수 있는 특징을 남긴 무드등으로 너의 밤을 지키고 싶다.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이, 이 밤이 너 혼자가 아니라고.




“ 또 다른 누군가 ”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또 다른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여느때와 같이 스마트폰을 사용하여, SNS를 보다가 발견한 것인데. 반려동물들은 자신과 함께 하는 이가 자신의 죽음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죽음이 다가온다 생각하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눈을 감는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그랬다는 사람들도 많고, 이런 내용으로 웹툰이나 만화 등 다양한 이야기로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이야기가 이 시의 내용과 많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숨는다고 영원히 발견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발견이 된다면 발견한 이는 자신의 반려동물을 부르며 서글퍼 할 터이니. 시 속의 말하는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 외에도 이러한 상황은 언제 어느때든 나타날 것 같다. 자신이 걱정하는 누군가가 죽는다면, 서글퍼 하며 그리워 할 테고. 그런 떠난 이의 이름을 부르며 그리워 할 테니까 말이다.




“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 ”


어릴 적에 장례식에 가 본 적이 한 번 있다. 가족이었지만, 나와는 깊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얼굴을 본 적도 없으며, 대화를 해 본적도,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장례식의 분위기는 매우 우중충 했던걸로 기억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그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만 인지하고 내 기분이 저 아래 심연마냥 낮지는 않았던 것 같다. 모두가 검은색의 옷을 입고 있었고, 아직 어려 검은 옷이 없던 나는 내가 가진 옷 중 제일 단정한 옷을 골라 입혀졌다. 




시 속의 상황과는 많이 달랐던 것 같다.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사람들은 없었던 것 같고, 고요했던 것 같다. 고요하다고, 울지 않는다고 슬픔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지독한 슬픔. 그것이 소리를 나타내지 못하고 그 자리를 맴돌았다. 그때의 나는 장례식의 예절을 알지 못해서 부모님이 하시는 인사를 따라 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에는 그저 앉아, 장례식에서 주는 과자를 조용히 먹었던 것 같다. 나는 그날, 그저 자리를 채웠다가 귀가했다. 




그때의 나에게는 문안이라도 드린 것이 최선의 예의였지 않았을까. 그곳엔 이름이 들리지 않았다. 불렸을 수는 있으나, 들리진 않았다. 귀가하는 도중, 그저 작은 울음소리 만이 내 귓가에 꽂혔을 뿐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길 바랐을까, 시 속의 말하는 이처럼 부르지 않기를 바랐을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한 번도 손을 들어보지 못 한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모든 것을 알게 된 이제서야, 어머니의 작은 아버지인 그 분이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에 기대어 평안하시길 희망한다. 



출처: https://howahha.tistory.com/entry/지독한-슬픔-그것이-소리를-나타내지-못하고-그-자리를-맴돌았다 [프리라이팅-명예의전당:티스토리]

이전 24화 누군가의 부끄럽지 않은 이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