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은 하얀색의 크림파스타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
내가 정한 시는 윤동주 시인의 또 다른 고향이라는 시이다. 이 시를 70년 후에나 있을 내 장례식에 찾아온 이들에게 바치고 싶다. 그렇다면 이 시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기에 끌렸던 걸까? 이 시를 시 속의 ‘나’인 말하는 이와 이 시를 쓴 시인 윤동주의 관점에서 한번 해석해 보았다.
먼저 시 속에서 말하는 ‘나’는 백골이 되어버린 자신, 즉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시에서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이 사람이 자기 고향을 떠나서 어딘진 모르겠지만 어딘가를 갔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딘가를 갔다가 돌아왔더니 자신의 백골이 따라 누운 것이다. 그리고 그 백골을 보면서 눈물을 짓는다고 한다. 백골을 보고 눈물을 짓는 것은 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눈물을 짓는 대상이 나, 백골, 혼으로 나뉜다. 분명 나눴지만, 그 뜻은 이 세 대상이 모두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나와 나의 백골, 나의 혼이 모두 눈물을 짓는다면 그건 ‘내’가 눈물을 짓는 것이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해석으로는 고향에 돌아왔다는 건 출발지와 도착지가 고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향에서 죽어서 떠돌다 돌아오거나, 멀쩡히 나갔으나 죽은 후 고향으로 돌아온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첫 번째 상황이라면 집에서(고향에서) 죽은 뒤 인정하지 못해서 떠돌던 혼이 이제 마음을 다잡고 저승(자연)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고, 만약 두 번째 상황이라면 불가피한 상황이나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의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게되어 봉변을 당한 후 지친 상태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슬피 우는 상황이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시에서 시인 윤동주는 유명한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일본에 붙잡혀서 죽게 된다면 그의 유골(백골)만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우리나라를 사랑했던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일본에서 죽은 후 우리나라로 백골로 귀국을 한다 하더라도 윤동주라면 죽은 자신의 백골이 자신이 사랑하는 나라(고향)에 묻히는 것이 영광이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 간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시에서 흘린 눈물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닌 기쁜 마음에 흘리는 눈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죽은 윤동주가 백골과 함께 고향 (대한민국)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도 생각한다.
나를 알기를 중요시하라
이 시를 장례식에서 누군가에게 바치게 된다면 나는 한 구절에 반드시 밑줄을 친 상태로 전해줄 것이다. 누구든 이 구절을 보면 나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 구절은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어둠을 짓는 개는 나를 쫓을 것일 게 다.’ 이 구절은 언뜻 보면 그저 지나가는 시적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구절을 보고 정말 배워야 하는 자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이 구절을 해석해보면 이 구절에서 ‘나’는 어둠을, 즉 죽은 상태, 빛을 내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빛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어둠은 살아있지 않은 상태를 표현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나’를 어둠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어둠을 짓는 개는 나를 쫓을 것일 게다.’ 이 부분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어둠에 비유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을 빛에 비유하고 밝게 생각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어둠이라고 인정한 것은 정말 안타까우면서도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자신을 어둡게 비유한 것은 자신의 상태를 판단 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 다음 구절인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자신의 어두운 면을 인정하는 구절이 정말 멋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나의 장례식에 온 사람들에게 이 시를 준다면 저 부분이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신의 안 좋은 면을 알아차리는 것은 정말 힘들지만, 꼭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시를 쓴 윤동주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봐도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생각이 안 든다. 그는 일본의 간섭이 정말 많은 시절에 독립운동가이다. 그런 그가 이런 시를 썼다는 것은 자신이 일본에 잡혀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자신의 할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의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를 받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정말 많은 좋은 시중에서 이 시를 결정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바로 이 시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현재 상황을 인정하며 그에 맞게 살아가겠다는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명을 다해 저승으로 가겠지만 장례식에 온 사람들은 나를 상관하지 않고 내가 없는 그들의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시를 보내고 싶었다. 시의 내용처럼 나는 할 일을 다 하고 가니 남은 이들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다. 그래서 또 다른 고향이라는 시를 정하게 되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내가 죽은 것이 마냥 슬프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죽은 것을 덤덤히 받아들이지는 못하더라도 그로 인해 앞길을 막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좋은 밑 발판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훨씬 크다.
어디든 갈 수 있는 파스타
이 시는 정말 좋은 시이다.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고 모두가 이 시를 제대로 느껴봤으면 좋겠는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의 인물을 분석하고 그 분석을 토대로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보았다.
먼저 이 시속에서의 나를 분석하였다. 이 시에서 나는 자신의 할 일을 끝마치고 정승으로 가는 길에 놓여있지만, 마냥 슬퍼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줄 알고 인정하는 사람이다. 이런 시속에서의 ‘나’와 시속에서의 배경을 나눌 수가 있을 것 같다. 먼저 살아있는 ‘나’와 죽어서 백골과 혼이 되어버린 ‘나’로 나눌 수 있다. 또 배경으로는 내가 살아생전 어딘가로 가게 되기 때문에 고향이 아닌 어딘가와 고향, 그리고 저승이다. 이 시의 처음 부분에서는 어딘가를 갔다 온 ‘나’를 그 다음에는 고향에 온 죽어있는 ‘나’ 그리고 또 다른 고향으로 가는 ‘나’ 여기서 또 다른 고향이 칭하는 곳이 내 생각에는 저승이나 자연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 다른 고향은 내가 시작되었던 곳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자신이 자연에서부터 생겨나 자라왔으니 또 다른 고향으로 자연을 표현할 수도, 혹은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하기에 태어나기 직전에 고향인 저승을 나타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인물과 배경 중에서 배경에 중점을 두고 레시피를 만들어보았다.
그 레시피는 먼저 각종 가니쉬로 접시의 가운데를 나누는 선을 만든다. 가니쉬는 무엇을 써도 좋겠지만 초록색이면 가장 좋을 것 같다. 그 후 위쪽에는 매운맛이 나는 빨간색의 파스타를 놓는다. 아래쪽은 하얀 크림 파스타를 놓는데. 그 후에 가운데 있는 가니쉬의 위쪽으로 크림소스를 흘려보낸다. 이게 내가 만든 어디든 이어주는 파스타이다. 이 레시프는 해석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 준비했다.
이 파스타는 이승과 저승 그리고 자연을 나타낸다. 먼저 저승이라고 볼 수도 있는 빨간색 파스타가 있는 곳이 바로 이승이다. 그 이유는 우리는 저승과 이승중 저승을 훨씬 두려워하지만, 이승에서 하는 고생과 역경들은 저승보다 훨씬 심하다고 생각했기에 비교적 힘들다는 느낌이 강한 빨간색을 이승으로 표현했다.
두 번째로 저승은 하얀색의 크림파스타로 표현했다. 그 이유는 전에 말한 이승을 표현한 파스타와 대비되도록 하기 위함인데, 저승에서는 고생한다기보다는 휴식을 취할수 있는 안식처의 느낌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보며 슬퍼하지만, 그들은 지금까지의 힘든 삶을 정리하며 깊게 잠드는 느낌을 받을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저승은 고생길이 훤한 지옥보다는 편한 느낌을 주는 천국의 느낌이 강하다고 생각해서 하얀 크림파스타로 표현했다.
세 번째는 가니쉬이다. 가니쉬는 물론 자신의 취향을 따라서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의도한 가니쉬는 바로 자연이다. 자연은 죽음이 정말 가까이 있지만 정말 안식처의 느낌이 가장 강한 곳이기도 하다. 동물들은 자연에서 약육강식의 규칙에 따르며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 살지만, 사람은 자연으로 휴양을 가기도 하면서 자연의 휴식처, 안식처의 느낌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 그렇기에 빨간색과 흰색의 중간 느낌인 초록색의 가니쉬로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구나 느끼는 자연이 다르기 때문에 레시피에서는 가니쉬에 자유를 두었다. 누군가에게는 자연이 죽음에 더 가깝고 누군가에게는 힐링에 더 가깝듯 누군가는 자연이 초록색이고 누군가는 자연이 검은색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가니쉬에 한해서는 절대적인 레시피를 두지 않았다.
마지막으로는 가니쉬는 넘어 흘러가는 크림파스타 소스이다. 소스를 흘러넘치게 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담았다. 첫 번째 의미는 저승과 이승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다. 자연을 사이에 두고 저승과 이승을 이음으로써 저승과 이승은 그렇게 멀지 않고 오히려 가깝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두 번째 의미는 자연이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안정된 삶을 선물하기도 하지만 언제 어떤 천재지변이 우리를 휩쓸고 갈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런 자연은 멀게만 느껴지는 이승과 저승을 하나로 이어주는 하나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을 표현하는 가니쉬 위로 파스타 소스를 이어서 표현했다.
마지막으로는 환생이다. 이 시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 고향이 저승일 수도 이승일 수도 있지만 마지막에 나오는 또 다른 고향이 저승을 암시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처음에 나오는 고향은 이승일 것 같다. 이승도 고향이고 저승도 고향으로 표현한다. 이건 죽어서 저승에서 태어났기에 저승을 고향으로 표현하고, 다시 환생하여 이승에서 태어나 이승을 고향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승을 나타내는 크림파스타 소스를 가니쉬 너머로 넘기면서 새롭게 환생하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