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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섭 Jul 16. 2024

누군가의 부끄럽지 않은 이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시인 윤동주가 ‘십자가’에서 만들어 낸 인물은 교회 앞에서 첨탑에 걸린 해를 보며 휘파람을 불다가 깊은 생각에 잠긴다. 만약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 있다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시가 쓰여진 시점은 1930년 대이다. 이러한 배경 모사와 시대로 보았을 때 과거 우리나라의 종교 대 탄압 시기라고 추정할 수 있다. 울리지 않는 교회 종소리 대신 휘파람을 부는 부분은 종교 탄압으로 인해 교회 종소리도 조선인 마음대로 울리지 못했던 현실적인 우리의 과거를 알려준다. 




휘파람은 예로부터 딴청을 피우거나 적막함을 해소하려고 불기도 했는데 십자가 속 인물은 휘파람을 불며 교회 근처에서 서성거렸다고 했다. 그 말은 즉슨,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피와 땀, 목숨까지도 내어드리리라 다짐했을 텐데 희망도 꿈도 없어져 가는 현실에 과연 내가 희생을 한다고 해서 될 일인가, 생각보다 더 큰 일이 아니였던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또한 쫓아오던 햇빛은 삶의 목표이고 높기만 한 첨탑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첨탑에 햇빛이 걸려있다고 표현했으니 도달하기 힘든 삶의 목표가 있어 괴로워하고 있다고 보인다. 




4연에서는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는데 괴로웠다가 행복하다고 표현한 것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이는 역설법으로 보인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다가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죄를 사하여 주었다. 예수라는 사람에게는 왜 그런 권능이 있었을까? 왜냐하면 흠 없는 어린양이였기 때문이였다. 예수는 사람들이 와전된 하느님의 나라를 믿고 행위적인 종교의식만 추구하고, 정말로 가난하고 맘이 아프고 몸이 아픈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음에 괴로웠을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형받았을 때 그가 마땅한 죗값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그가 희생당했다는 사실은 잘 몰랐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세상을 떠나고 난 뒤 깨달은 이들이 많아졌고 그 복음을 전하며 나누는 이들이 생겨났다.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괴로우나, 이로써 인류를 구원했다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윤동주는 기독교인이였고 나 또한 그렇다. 윤동주의 또 다른 작품 ‘서시’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이 내가 항상 지니는 신념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어서 이런 시들을 남겼던 것 같다. 나 역시 윤동주 시인의 이러한 신념을 본받고 싶다.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러가겠습니다.”


 내가 가장 인상적이였던 시구는 5연에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러가겠습니다.”라는 부분이다. 바로 윗줄에 ‘꽃처럼 피어나는 피’라는 부분에서 그저 자살하는 게 아닌 순결하고 고귀한 희생인 것을 강조하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피를 흘려 목숨을 바치겠노라 맹세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두워가는 하늘 밑이라는 표현은 일제 강점기에 대한 부정적인 현실과 실제로 해가 저물어 잘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이라는 두 가지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깜깜한 하늘 밑에서 피가 흘러 죽어가고 있어도 어두워서 이를 아무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죽어 희생한다 한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국을 위해 뒤에서 묵묵히 독립운동을 했던 우리 조상들의 굳건한 다짐을 이 시구에서 잘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는 혼란했던 일제 강점기에 시인이 아닌 독립운동가로서의 윤동주의 마음가짐도 잘 나타낸 것 같다.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오래 전 봤던 뮤지컬 ‘영웅’이 떠올랐다. 영웅은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암살한 사건을 담고 있다. 나는 십자가를 읽으면서 뮤지컬 영웅에 마지막 장면이 계속 상기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한데 사형 집행을 앞둔 안중근이 항소를 고민할 때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가 아들에게 쓴 편지를 낭독하는 장면이다. 이 편지는 실제로 조마리아가 아들 안중근에게 쓴 편지이기도 하다. “만약 항소를 한다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마음 먹지 말고 그냥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자식을 잃는 어머니의 슬픔을 감히 헤아리지 못한다. 아들을 하느님 곁으로 보내며 그 긴 밤을 어떻게 보내셨을까 상상할 수도 없다. 오직 나라에 대한 애국심 하나로 고귀한 희생을 하는 모습이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인상 깊었다. 이러한 점들에서 시 ‘십자가’와 뮤지컬 ‘영웅’은 많이 닮은 것 같다. 




“누군가의 부끄럽지 않은 이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는 70년 뒤 나의 장례식을 찾아온 이들에게 내가 지난 삶 동안 어떤 사람 이였는지 이야기 할 때 잘 해내지는 못하더라도 언제든 최선을 다했던 사람 이였다고 기억되기를 바란다. 또한 그런 나의 마지막을 지켜주며 본인들도 그렇게 살겠노라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윤동주의 시 십자가에서 인물은 초반에는 암흑한 현실에 좌절하였다. 하지만 5연에 들며 당차게 희생한다고 선언하는데 이 부분에서 모두들 제 스스로 안주하며 살아가지만 어쩌면 더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살아가는게 아닌가 싶었다. 




윤동주는 어려웠던 시대에 자신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십자가’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희생 하면서 까지 독립을 위해 힘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나 또한 하느님 곁으로 가게 될 그 날까지 햇빛에 닿을 수 없더라도, 첨탑이 그토록 높더라도, 종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도, 여유롭게 휘파람을 불며, 십자가를 올려다보며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누군가의 부끄럽지 않은 이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 빵은 내 몸이고 이 포도주는 나의 피다.”


 이 시는 제목부터 십자가이기 때문에 제목에 걸맞는 창작물로 십자가 모양 빵을 구워보면 좋을 것 같다. 예수는 12명의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그림 ‘최후의 만찬’에 나와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포도주와 빵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며 “이 빵은 내 몸이고 이 포도주는 나의 피다.”라고 얘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때 이 빵의 모양이 십자가였다면 제자들에게 더 큰 뜻을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출처: https://howahha.tistory.com/entry/누군가의-부끄럽지-않은-이가-되도록-노력할-것이다 [프리라이팅-명예의전당: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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