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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섭 Nov 09. 2019

당신이 묻고 확인하고 따지며 파고들어야 하는 이유

김병섭-인천영종고-dasidasi.tistory.com

지식이란 대답의 나열이 아니라 질문과 대답의 연쇄이다.

먼저 정확하게 묻고, 정확하게 답하려 애쓴 후에야

우리는 비판하고 공감하며 상상할 자격을 얻는다.

먼저 정확하게 이해하려 애쓴 후에야

내가 당신을 사랑할 자격을 얻듯이.    

 

1. 

반전의 반전의 반전.     

이강백 작가님의 희곡 '파수꾼'은 권력의 비리와 구조를 파헤치는 스릴러다. 진실을 알리려는 개인과 거짓을 지키려는 권력의 대결. 이런 장르의 이야기는 보통 한 두 개의 반전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 되는데, 이 작품에는 무려 5번의 반전이 등장한다. 놀라운 것은 그 반전 하나하나가 놀랍도록 치밀하다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2개의 반전은 이 작품의 이야기 전반을 다시 돌아보게 하며 읽는 이에게 서릿한 질문을 선사한다. 

"거짓으로 완성된 구조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첫번째 반전- 양철북 '다' : 진실을 알아낸 인물 

첫번째 반전은 이리떼는 없다는 것이다. 마을 경계에서 양철북을 치는 임무를 맡아 망루에 온 '다'는 망루의 사람들이 모두 잠든 어느 날, 걱정스런 마음에 홀로 망루에 올랐다가 진실을 알게 된다. 이리떼는 없었다. 이리떼가 나타났다는 외침 속에서 그가 본 것은 오직 흰구름 뿐. 이리떼가 없다면 이리떼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구성된 이 시스템은 모두 잘못되었다. 이 진실을 밝히면 경계를 위해 들이는 이 많은 사람들의 노동과 수고가 거두어질 것이며, 마을의 사람들은 더 자유롭게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진짜 시작은 여기부터. 이리떼가 없다는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미 있었다. 그는 누구인가?     


두번째 반전- 촌장 : 진실을 이미 알고 있는 인물

진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은 '다' 이외에도 있었다. 그는 '촌장'이다. 마을의 권력자인 그는 '다'가 식량운반꾼에게 보낸 편지, 식량운반꾼이 그에게 배송한 편지, 그래서 식량운반꾼이 온 마을 사람들에게 '이리떼가 없다'는 소식을 알리게 한 그 편지를 들고 '다'를 찾아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고백. 

그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다. 이리떼는 없다. 그러나 진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질서'다. '이리떼가 있다'는 전제 아래 만들어진 마을의 질서. 이리떼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경계와 공포, 마을 밖 공동의 적으로 인해 완성된 마을 사람들의 '단결'. 이 단결 안에서 그들은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며 마을의 공동체성을 확보한다. 촌장은 이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질서가 주는 단결과 안정, 평화와 공동체성은 쉽게 이룰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고, 계속 유지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실을 이미 알게 된 '다'에게 그러한 주장은 닿지 않았다. 결연한 '다'를 보고 촌장은 결국, 함께 마을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기로 한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하루의 시간과 한 번의 거짓말. 이것이 세 번째 반전이다.     



세번째 반전- 하루의 시간과 한 번의 거짓말 : 진실을 알리는 조건

촌장은 '다'에게, 분노한 마을 사람들이 그 동안의 거짓에 대한 분노로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처참한 죽음을 묘사하며 촌장은 '다'에게 진실을 함께 알리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하루만 기다려 줄 것, 둘째, 한 번만 거짓말을 해 줄 것.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동정에 호소하는 마을의 최고 권력자를 두고 고민하다 '다'는 결국 그의 조건을 따르고, 결국 진실을 알리는 데 실패한다. 하루의 시간, 한 번의 거짓말은 촌장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하루'라는 조건으로 촌장은 '다'를 방심하게 만들었다. 그 하루 동안 촌장이 의도한 것은 자신의 거짓을 진실로 만들고 '다'의 진실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한 번'이라는 조건으로 촌장은 '다'에게 거짓말을 부탁한다. 이번 단 하루만, 촌장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도록 사람들의 분노가 잠시 식을 때까지 기다려 주기를, 이번 단 한번만 '다'의 양철북으로 이리떼가 있다는 거짓말을 해 주기를. 들끓는 사람들의 분노와 머리를 조아리는 마을의 최고 권력자의 비참을 보다 '다'는 그의 조건을 수용한다. '다'는 자유와 평화를 그리는 사람이었다.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도 어느 한 사람의 처참한 죽음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는 실패했다. 

'다'는 그 한 번의 거짓말로 인해, 거짓의 세계에 편입되었다. 이제 그의 진실은 힘을 얻지 못하며 적어도 이전보다 절반은 힘을 잃어버렸다. 진실을 한 번에 말하지 못한 '다'는 이제 자신의 거짓이 거짓임을 증명해야 하는 일도 해야 하며 그것은 그의 진실의 힘을 더 떨어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떼가 나타났다는 외침이 '다'에 의해 외쳐지고, 들끓는 분노가 집요한 질문과 확인으로 이어지지 않고, 경계와 공포의 양철북 소리에 다시 놀랍도록 안정과 평화로 찾아오고,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후, 촌장은 이전과는 달리 짧고 분명하게 내뱉는다. 

"넌 이곳에서 일생을 지내야 한다."

"마을에는 오지 마라."

동정과 부탁의 조아림에서 순간에 명령으로 돌아서는 촌장 앞에서 '다'는 얼어 붙는다. 무대를 채우는 바람 소리. 어느 순간 이리떼가 나타났다는 가의 외침이 들리는데, '다'는 그를 따라 양철북을 친다. 그는 촌장이 유지하는 질서에 결국 순종한 것이다. 

이강백 작가님의 파수꾼은 이 장면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이것만으로도 여운이 가시지 않는 강렬한 마무리이지만, 이 작품의 반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촌장이 남기는 이상한 말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사로 인해 우리는 촌장이 어떻게 진실을 알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다'는 어린 시절의 촌장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네번째 반전- 추억 : 촌장이 늘 그리워하던 것

"넌 내 추억이야" 

이 작품이 끝나갈 즈음, 촌장이 남기는 이상한 말. 

"넌 내 추억이야. 너에게는 내가 늘 그리워하던 것이 있다."

그러니까 촌장에게 '다'는 추억이다. 그것도 아프고 괴로운 추억이 아니라 그리워하던 추억. 그랬다. 촌장도 '다'와 같은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도 '다'만큼이나 순수한 열정과 순수한 분노로 떨쳐 일어났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 시절은 그에게 그리운 추억으로 남았으며 내내 그리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억일 뿐, 오늘의 현실은 아니다. 오늘, 이곳에서 촌장은 '진실을 알리는 자'가 아니라 '거짓을 지키는 자'로 살고 있다. 촌장이 오늘도 '진실을 알리는 자'로 살고 있었다면 그에게 '다'는 그리운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혹독한 오늘의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진실을 아는 자'에서 '거짓을 지키는 자'로 나아가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대사에 답이 있다. 그것은...

그것은 '딸기'다.

"내 마음은 너와 함께 딸기 따기에 가 있다. 넌 내 추억이야. 너에게는 내가 늘 그리워하던 것이 있다." 

그에게 진실을 알려 준 것은 '딸기'였다. 그는 야생딸기를 사랑했다. 어린 시절 야생딸기를 따러갈 때면 그는 즐거웠다. 너무 즐거워서 경고문도, 덫도, 이리떼가 나타났다는 파수꾼의 외침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경고문과 덫을, 이리떼가 나타났다는 파수꾼의 외침을 따라 다녔다. 경고문과 덫이 있는 곳에서 더욱, 이리떼가 나타난다는 외침이 있을 때면 더욱 그는 많은 야생딸기를 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떼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그가 사랑하는 딸기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 반복된 경험이 그에게 진실을 알려 주었다. 이리떼는 없다. 

'다'가 촌장의 추억이며, '다'에게 '촌장'이 그리워하던 것이 있다는 것으로 짐작하건데, 처음에는 촌장 또한 '다'처럼 진실을 알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 또한 거짓의 비효율과 부당함에 대해 분노하고 진실이 가져다줄 진정한 자유화 평화를 바랬을 것이다. 거짓을 향한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분노. 진실을 향한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염원. 

그러나 촌장은 결국 그 순수한 열정을 꺽는다. 어쩌면 그도 역시 그의 어린 시절 마을의 질서를 지켰을 권력자에게 설득 당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충분히 가능하며 그럴 수 있다. 오늘의 권력이 늘 오늘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별스런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확하게 보아야 할 것은, 이 작품에 그러한 상상의 여지는 등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보다 선명하게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딸기다. 촌장이 사랑했던 딸기. 경고문과 덫이 있는 곳에서 더욱, 이리떼가 나타난다는 외침이 있을 때면 더욱, 그가 많이 얻을 수 있었던 딸기. 이리떼에 대한 그의 반복된 경험이 그에게 준 것은 진실만이 아니었다. 이리떼에 대한 그의 반복된 경험은 그에게 '이익'도 안겨 주었던 것이다. 권력이란 이익이 모이는 자리에서 비롯되는 것. 아마도 촌장의 권력 또한 거짓으로 유지되는 질서, 그 질서가 확보해 주는 촌장의 이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아직 반전은 끝나지 않았다. 이 희곡에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다'이고 진실을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은 '촌장'이지만, 그들 외에도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뛰어난 스릴러에 등장하는 진짜 범인은 늘 곁에 있었으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 희곡에도 등장하는 그 사람. 그는 누구일까?     



다섯번째 반전- 늘 곁에 있었으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사람

이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다시 돌아보자.

마을사람들: 진실을 전달 받았으나 결국 거짓에 속는 사람들. 거짓을 발견했을 때 끝까지 묻고, 끝까지 의심하며, 끝까지 증명하기를 포기한 사람들. 경계와 공포를 두려워하지만, 경계와 공포 속에서 누리는 안정과 평화에 중독된 사람들. 

마을사람들의 입장에서, 이 평화와 안정에 편들며 항변할 수 있다. 거짓이면 어떤가? 우리는 이렇게 즐거운데. 그럴 수 있다. 세상에 우리가 모르는 진실이 어디 한둘인가? 우리가 섬기는 거짓이 한들인가? 우리 모두가 평화와 안정 속에서 공동체로 행복할 수 있다면 그딴 진실과 거짓 쯤 무슨 문제인가?

나 역시 동의한다. 나 또한 순결한 진실의 수호자나 결벽한 거짓의 증오자는 아니다. 사람살이가 뭐, 그런 거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런 마음에도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정말 이 마을은 평화롭고 안정적인가?"

마을의 평화, 그 뒤편에는 개인에 대한 폭력이 있다. 마을의 평화 그 뒤편에서 어느 개인은 폭력과 모함과 조작으로 인해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이 마을이 만든 질서의 최종 목표는 마을 사람들의 행복이 아니다. 이 마을이 만든 질서의 최종 목표는 '단결'이며, 이 단결을 해치는 것은 처벌하고 추방해야 할 적이다. 그러므로, 마을의 단결을 위해 복종하지 않는 개인, 마을의 평화와 안정이 거짓으로 만든 것이며, 우리가 진정한 평화와 안정을 누리지 못하는 사이 누군가 권력과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개인, 단결을 깨고 혼란의 시간-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할 그 시간을 가져오는 이는 마을의 적이다. 그들을 이 마을의 촌장이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여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식량배달꾼'이다. 

그는 파수꾼 '다'가 부탁한 편지를 읽고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의 부탁대로 촌장에서 그 편지를 건넨 후, 자신도 알게된 진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 결과로 그가 받은 것은 진실을 알리 그의 노고에 대한 칭찬과 감사와 격려가 아니라 처벌과 응징과 혐오였다.  

문제는, 이 불행한 개인이 식량배달꾼이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는 데 있다. 진실을 무너뜨리고 거짓을 지키며 그가 유지하는 마을의 질서 속에서 권력과 이익을 누리는 촌장이 진실을 알리려는 또 다른 개인에게 다른 행동을 취할 리 없다. 오히려 그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과 권력에 반하는 개인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언제든 거짓말쟁이로, 첩자로, 적으로, 이리떼를 섬기는 불온한 마녀로 단죄할 것이다. 

이 모든 거짓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사람이 있다. 파수꾼 '다'가 진실을 알게 된 것은 우연한 사고였을 뿐이다. '다'는 '나'의 후임이었을 뿐이다. 평생을 양철북을 치며 이리떼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하며 살아온 파수꾼 '나'. 그는 촌장이 바라는 이상적인 인물일  테다. 아마도 그의 바람은 온 마을 사람들이 '나'처럼 살기를 바라는 것이리라. 이리떼가 존재한다는 것을 신념으로 삼으며 이리떼에 대한 경계와 공포에 신속히 대응하고 그러한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는 인물. 

그러나 온마을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이리떼가 존재하지 않는 이 현실 속에서 반드시 촌장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이 있다. 늘 곁에 있었으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한 사람. 그리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대사 몇 마디밖에 없지만, 이 희곡의 설정 그 자체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한 사람. 

그는 망루에 오르는 유일한 사람, 바로 파수꾼 '가'이다. 

'이리떼가 나타났다'는 그의 외침을 따라 양철북은 울리고, 그 때야 마을의 경계와 공포는 시작된다. '이리떼가 물러갔다'는 그의 외침으로 사람들은 안도하고 그들의 평화와 안전을 축하한다. 그러해야 다시 맹렬하게 경계와 공포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가의 외침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며, 결말이었던 것이다. 

'가'는 그저 멍청이일 수 있다. 이리떼와 흰구름을 구별 못하는 그저 순진하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 수 있다. 더구나 '가'가 촌장의 또 다른 공모자라는 주장에 다른 명확한 근거를 본문에서 찾기는 어렵다. 다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가'를 의심할 정황 뿐이다. 그러나 그 정황이 이상하리만치 뚜렷하며 치밀하다.

'다'는 단 한 번 망루에 올라간 일로 이리떼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옆에서 흰구름만이 떠 있는 들판을 보고 '가'는 이리떼가 나타났다고 외쳤다. 그러나 이것을 그저 순진한 사람의 능력부족으로 이해하기에는 강력하게 의심스런 부분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다'가 촌장의 계략에 빠져 분노한 마을 사람들 앞에서 거짓을 말했을 때이다. 

"다: 이리 떼다, 이리 떼! 이리 떼가 몰려온다!"

이 말에 '가'는 어떻게 했는가? 파수꾼 '가'의 손이 번쩍 들려지며 그도 함께 외친다. 울려 퍼지는 북소리. 사람들의 분노가 사그라들고 다시 이리떼에 대한 경계와 공포가 사람들을 집어 삼키고 난 후, 그는 이상한 말을 외친다.

"북소리 중지! 이리떼는 물러갔다!"

'가'는 이리떼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리떼가 몰려온다고 외쳤다. 더욱 이상한 것은, 발견하지도 못한 이리떼가 물러갔다고 외쳤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이다. 그의 외침은 어떤 순간에 외쳐졌는가? 

그것은 촌장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었다. 촌장이 모든 권력과 이익과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말이다. 망루를 독점하고 진실을 판단하는 그 권력을 쥔 '가'의 정체. 그저 무능하고 순진한 착시로 보기에는 너무도 절묘한 순간에 너무도 중요한 말들을 외치는 파수꾼 '가'. 

이를 바탕으로 추정해 보건데, '가'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제 3의 인물, 촌장과 결탁하여 촌장의 권력과 이익을 지켜주는 인물, 진실을 은폐하고 거짓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을 수행하고 있는 인물로 의심할 수 있겠다. 

물론 더 구체적인 증거나 대사나 지문 한 줄 근거로 내세울 만한 것은 없다. 더 이상의 추론은 불가능한 상황. 여기에서 이 상상은 멈춰야 할 테지만...     



두려운 것은 오늘의 현실이다. 오늘 우리가 목격한 우리 사회의 망루들- 판사와 검사, 경찰, 그리고 ... 기자들....그러니까...그 기자들 말이다. 그들 저열한....-저들의 저 치밀하고 추악하며 섬세한 농단을 보고난 후,  '가'에 대한 나의 의심은 확신에 이르렀다. 사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우리 시스템 최후의 망루들이 어떻게 운영되었는가? 공공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운영될 것으로 믿었던, 오로지 사실과 거짓을 명확히 판별하는 데 노력할 것이라 믿었던 그 많은 망루들이 얼마나 처절하도록 치밀하게 개인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었는가?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군가는 의심해야 한다. 이 마을의 사람들처럼 그렇게 손쉽게 마을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누군가는 처절하게 묻고, 확인하고, 따지며 파고들어야 한다. 그것이 그나마 유지되는 이 마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면서도, 이 마을을 옥죄는 거짓을 깨고 좀 더 넓은 평화, 좀 더 넓은 안정을 확보하는 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일일 테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가'에 대한 의심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 물론, 그것이 스릴러를 즐기는 더 즐거운 방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안비밀이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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