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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섭 Nov 09. 2019

'서울 1964년 겨울'에서 '한국 2019년 여름'로

김병섭-인천영종고-dasidasi.tistory.com

지식이란 대답의 나열이 아니라 질문과 대답의 연쇄이다.

먼저 정확하게 묻고, 정확하게 답하려 애쓴 후에야

우리는 비판하고 공감하며 상상할 자격을 얻는다.

먼저 정확하게 이해하려 애쓴 후에야

내가 당신을 사랑할 자격을 얻듯이.     


가.

"모르겠습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깨끗한 음성을 지어서 대답했다.

- 김승옥, [ 서울, 1964년, 겨울] 중에서...     

문제는 이 부분이었다. '할 수 있는 한 깨끗한 음성'이라니. 대체 왜 그는 '할 수 있는 한', 그러니까 '있는 힘을 다해서', '깨끗한 음성'을 지어낸 것일까?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다. 우리에게 모름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모른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말 문제는, 있는 힘을 다하는 그의 노력이다. '자신은 정말 모른다'는 신뢰를 얻어내기 위한 그의 노력. 대체 그는 왜 그렇게 자신의 무지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이 질문의 답은 그를 대답하게 한 먼저의 질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로부터 '모르겠습니다'라는 대답을 이끌어 낸 질문, 그로부터 할 수 있는 한 깨끗한 음성을 짓게 만든 그 질문, 그것은 무엇일까?     

"데모가? 데모를? 그러니까 데모..."

- 김승옥, [ 서울, 1964년, 겨울] 중에서...     

데모... 그러니까 진짜 문제는 바로 '데모'였다. 그가 할 수 있는 한, 있는 힘을 다해서, 깨끗한 음성으로, 자신은 전혀 모른다고 말하게 한 그 질문의 근원은 '데모'였던 것이다. 대체 그 데모는 무엇이었기에, 그는 '데모'에 대해 그토록 무지해 보이려 애를 썼던 걸까?     

이 부분에 대해서 소설은 더 이상 말해 주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만큼 당대의 사람들에게 당연한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이 발표된 것은 1965년. 당대의 사람들이 당연하도록 깊이 '공감'하고 있는 데모, 당대의 사람들이 당연하도록 깊이 '두려워'하고 있는 데모, 그 '데모'는 대체 무엇일까?

그래서 알아본 1964년 대한민국 서울의 데모. 놀라운 사실들이 쏟아졌다.

지금도 한국과 일본의 가장 첨예한 외교적 현안이자 지금도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거대한 분노와 공감을 불러오는 사건- 일본군 성노예와 일본군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1964년의 이야기들.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과 일본이 최초로 협정을 맺었던 1964년. 독도의 영유권을 제 3 자에게 맡기고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자에 대한 개인 배상을 미뤄두고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자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포기하는 한일협정을 체결했던 그 해 1964년, 그 한일협정에 분노하며 반대하는 10만여명이 저지선을 뚫고 청와대 앞까지 진격했던 1964년,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시켰던 1960년 4-19 혁명이 있은지 겨우 4년 밖에 지나지 않은, 그래서 분명히 저들에게 다시 419 혁명을 떠올리게 하며 대통령 탄핵이라는 공포에 떨게 했을 1964년, 그래서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1964년, 계엄령 선포로 박정희 정부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공동체의 문제나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말하고, 글쓰고, 모이고, 의견을 내는 것이 전부 거부된 1964년, 그럼에도 자신들에게 향하는 비판이 두려워 인혁당 간첩 사건을 조작하고 처벌했던 1964년, 그리하여 공동체의 문제나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말하고, 글쓰고, 모이고, 의견을 내는 이는 모두 구속되고, 고문 당하며, 처벌 받았던, 무엇보다 그로 인하여 공동체의 문제나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말하고, 글쓰고, 모이고, 의견을 내는 이는 모두 북괴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간첩으로, 배신자로 의심받고 비난받고 핍박받고 조롱받게 만든 그 해 1964년.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은 일본과 일제강점,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하여 당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당대에 너무도 당연했던 분노와 정의, 감정과 논리가 모두 거부된 시대, 우리를 우리이게 만드는, 공동체를 공동체라 부를 수 있게 하는 공동의 분노와 정의, 공동의 감정과 논리가 모두 거부된 시대, 정치, 경제, 공동체의 의제나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말하고, 글쓰고, 모이고, 의견을 내는 것이, 그러니까 민주주의의 기본권인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모두 완전히 금지된 시대- 서울의 1964년에 관한 소설이며 앞으로 다가올 시대- 서울의 기나긴 겨울에 관한 소설이므로, 1964년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소설 수업의 시작은 먼저, 1964년이어야 할 것이다.     



나.

1. 파리

나에게 파리는 날 수 있으며 동시에 잡힐 수 있는 존재이다. 나에게 파리는 자유로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존재, 그러므로 나에게 파리는 내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이다. 권력이란 상대의 자유를 허락하며 동시에 박탈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파리를 사랑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충분히 논쟁적이다. 권력은 곧 사랑이라는 전제 없이는 불가능한 표현. 그러나 이러한 논의 전에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이, 그가 권력을 행사하는 대상이 고작 '파리'라는 것이다. '파리'라니..

그러나 이에 대하여 안은 긴장한다. 그는 나의 '파리' 이야기를 듣고 섣불리 동의하는 대신, 나를 관찰한다. 겉으로는 사소해 보이는 나의 말들, 그러나 그 말의 이면에는 자유와 통제와 권력이 있다. 그의 파리 이야기에 동참한다면, 자유와 통제와 권력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위험하다.     

지금 이곳은 서울-1964년-겨울, 박정희 정부의 허락 없이 공동체의 문제나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하고 글쓰고 모이고 의견을 내면, 그러니까 자유와 통제와 권력에 대해 말하고 글쓰고 모이고 의견을 내면, 그 자체로 구속/ 고문/ 처벌의 이유가 되며 간첩이며 배신자로 핍박받고 조롱받을 수 있는 지금 이곳은 서울, 1964년, 겨울.

그러나 아직 대화를 포기할 수 없다. '소통'에 대한 그리움이 안에게는 아직 남아 있다. 어떻게 이 대화의 가능성을 이어갈 수 있을까?

그래서 안은 나를 관찰하고, 신중하게 멈춘다. 그가 멈춘 곳은 '모른 척'. 은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모른 척', 더 이상 상대의 은유를 파고들지 않는 '모른 척'으로 그는 나와 대화를 멈추고, 동시에 이어간다.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는 안은 아직 나를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안이 꺼낸 주제는 꿈틀거림. 나의 반응이 뜨겁다. 나에게 꿈틀거림이란 추억이다. 추억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다. 그것이 슬픈 것이던 기쁜 것이던... 그러나 즐겁게 이어가던 그들의 대화는 결국 부서진다. 할 수 있는 한 깨끗한 음성으로 연기된 나의 완강한 거부감에 부딪혀... 꿈틀거림을 꺼내며 안이 결국 하고 싶었던 이야기, 김이 결국 피하고 싶었던 이야기... 그것은 데모, 결국 그것은 데모였다.

김은 데모에 대한 대화를 거부했다. 이젠 떠나야 할 때였다. 이미 몇 번이나 겪은 일이었다. 그러나 김도, 대화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소통'에 대한 그리움이 김에게도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가 던진 대화, 안이 놀라고 반색하며 함께 했던 대화, 자유나 통제, 권력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으며 공동체의 문제나 타인의 고통, 그러니까 정치라던가 경제, 정의나 윤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며 '사실'에 바탕하며 '거짓이 아닌', 이런 대화들...     

“평화 시장 앞에서 줄지어 선 가로등 중에서 동쪽으로부터 여덟 번째 등은 불이 켜져 있지 않습니다…….” 나는 그가 좀 어리둥절해 하는 것을 보자 더욱 신이 나서 얘기를 계속했다. “…… 그리고 화신 백화점 육 층의 창들 중에서는 그 중 세 개에서만 불빛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해질 사태가 벌어졌다. 안의 얼굴에 놀라운 기쁨이 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빠른 말씨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서대문 버스 정류장에는 사람이 서른두 명 있는데 그 중 여자가 열일곱 명이고 어린애는 다섯 명, 젊은이는 스물한 명, 노인이 여섯 명입니다.”

“그건 언제 일이지요?”

“오늘 저녁 일곱 시 십오 분 현재입니다.”

“아” 하고 나는 잠깐 절망적인 기분이었다. 그 반작용인 듯 굉장히 기분이 좋아져서 털어놓기 시작했다.

“단성사 옆골목의 첫번째 쓰레기통에는 초콜릿 포장지가 두 장있습니다.”

“그건 언제?”

“지난 십사일 저녁 아홉 시 현재입니다.”

“적십자 병원 정문 앞에 있는 호도나무의 가지 하나는 부러져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실에 근거한(-거짓이 아닌) 소통을 나눌 수 없다는 마음을, 이렇게라도 해야 사실에 근거한(-거짓이 아닌) 소통을 나눌 수 있다는 마음을 그들은 공감했던 것이 아닐까.

진실한 소통에 대한 그리움과 소통에 대한 탄압의 공포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그 공감이 이 어이 없고, 이어지지 않는 대화에서도 그들을 기쁘게 한 것은 아닐까.     



다.

난데 없이 안과 김 앞에 나타난 사내. 그는 난데 없이 자신의 고통을 쏟아냈다. 겨우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비켜가며 겨우 사실에 근거한 대화를 성공시켜 즐거웠던 이들 앞에 완전한 개인으로서 완벽히 개별적인 대화를 성공시켰던 이들 앞에 그가 난데 없이 나타나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아내를 팔았다. 아니 정확히, 아내의 시체를 팔았다. 사랑했던 아내였다. 아내가 죽기 전에 돈은 아내를 위한 도구였다. 수원, 안산, 서울을 다니며 온갖 영화와 쇼를 보았다. 아내의 죽음이후, 아내는 돈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사내는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이들이, 가난에 찌든 인간이 결국 어떤 결말에 이르는지를 보여주었다. 아내의 시체를 팔아 얻은 돈은 4000원. 지금으로치면 40만원 정도의 이 돈을 받았으나 문제는 갈 데가 없다는 것.

어디로 갈까?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어디로 갈까? 넥타이를 사고 귤까지 까 먹었는데,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지 모르는 그들은 먹고 마시는 욕망을 해소했던 장소 - 중국집으로부터 스무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 묻는다. 어디로 갈까?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이에게, 기껏해야 먹고 마시는 욕망을 해소하는 게 전부인 이들에게는 그것이 해소되고 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겨우 찾아낸 곳은 불구경. 타인의 불행을 보기라도 해야 나의 불행을 잊을 수 있는 것일까? 먹고 마시는 것이라도 해 내는 이 삶에 대해 안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매일 저녁 8시 먹고 마시고 난 후 우리가 둘러 앉아 함께 텔레비젼 뉴스를 보는 일이란 여기 이곳에서 그들이 하는 불구경 같은 일은 아닌가?)

그러나 사내에게 나타난 것은 아내의 환영이었다. 일렁이는 불꽃 사이에 나타난 아내, 그곳에 남은 돈 20여만원을 던지는 사내. 그러니까, 아내의 시체를 팔아 생긴 돈을 아내의 환영이 보인 곳에 던진 것이다. 물론 환상이지만 그의 환상 안에서 그는 아내의 시체를 판 돈을 아내에게 돌려준 셈이다. 괴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월부책값을 받으러 갔을 때 그렇게 감정이 폭발한 것도 아내의 시체를 팔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다시 확인한 것 때문이 아닐까. 아내의 시체를 팔아버린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다시 확인한 것 때문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이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여관에 도착한다.

안과 나의 대화는 여관방을 결정하는 평범한 대화이지만, 각 방을 쓰자는 안과 함께 한 방에 들자는 나의 대화를 개인과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치환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안: 개인주의로 삽시다

나: 걱정이 되는데... 공동체로 살아 봐요

안: 나는 공동체가 피곤해요. 개인으로 살 거요.

사내: 나는 개인주의가 무서워요.

안: 이게 다 개인을 위한 거에요. 개인주의로 살겠소.

나: 아니, 그러지 말고, 화투를 치는 거라도, 공동체로 살아 봅시다.

안: 나는 정말 피곤해요. 개인주의로 살겠소.

나: 나도 공동체가 피곤해요. 개인주의로 살죠.     

그렇게 하여 그들의 공동체는 부서졌다. 결국 그들은 개인화 된 것이다. 그들의 개인화를 시작하게 한 것은 '피로'였으나 그들의 개인화를 완성한 것은 '거짓'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의 개인화를 완성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거짓'인 것이다.

오늘 아침 눈을 뜬 순간부터 늦은 밤 잠들기까지 오늘 하루를 완벽하게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오로지 개인으로 남고 싶다면 그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당신은 하루 종일 '거짓'을 말하면 된다. 당신의 모든 생각, 모든 감정, 모든 논리, 모든 기록 그 모든 것들에 대하여 거짓으로 대하기. 그럴수만 있다면 당신은 오늘 하루, 완벽한 '개인'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나와 안이 원한 것은 '개인화'가 아니었다. 그것 또한 변명이었을 뿐... 그들이 진심으로 바란 것은 타인의 고통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도저히 어떠한 일에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었다.

사내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 그들이 보인 태도가 그러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으나 알고 있었다고 말한 안은 사내를 개인으로 남겨둔 것이 최선이었다고 말하고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으나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한 나는 사내의 죽음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말만 되뇌일 뿐이다.

변명이고, 변명이며, 변명이다. 그들은 단지 사내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완벽하게 도망가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을 마냥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소설 속의 지금 이곳이 다름 아닌 서울, 1964년 겨울이기 때문이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지 않아야 하는 시대, 공동체의 의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야 하는 시대, 자본화와 개인화를 강요받는 시대에 결국 그 자본화와 개인화를 내면화 해 버린, 자본화와 개인화로 내면화 당해버린, 그리하여 강제로 늙어져 버린, 그렇게 젊음을 빼앗겨 버린 서울, 1964년 겨울을 살아가던 이들의 내면에 대한 소설인 것인데...

그럼에도 그들의 늙음을 준엄히 조롱하고 그들의 무기력과 무반응을 비판하는 것은 결국 젊음의 몫일 것이다.     


라.

'서울 1964년 겨울'의 은유와 상징은 논리적이며 단계적이고 대단히 촘촘하다. 어느 문장 하나 허투루 쓰지 않으려는 기지와 처절함이 함께 보이는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마지막에 손에 잡히는 문장들이 있다.

그것은 묘사다.

배경묘사와 인물묘사가 나오는데, 이 소설을 여러번 읽고 나니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필연적이라 할 만큼 이 소설의 상황과 인물을 잘 그려 놓았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배경묘사...


1 우리는 갑자기 목적지를 잊은 사람들처럼

2 이쁜 여자가 '춥지만 할 수 있느냐'라는 듯한 쓸쓸한 미소를 띠고

3 소주 광고의 네온사인이 열심히 명멸하고

4 약 광고의 네온사인이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다는 듯이 꺼졌다가 켜지고

5 돌덩이처럼 거지가 여기저기 엎드려 있었고

6 그 돌덩이 앞을 사람들은 힘껏 웅크리고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를 은유로 전제하고, 이 소설의 맥락에 따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갑자기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2 이러한 시대 상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씁쓸함을 느끼며

3 술로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4 약으로 가끔 고장난 몸을 고치면서

5 다른 이의 아픔이란 이제 돌덩이같은 사물과 다를 바 없고

6 다른 이의 아픔에 대한 공감 없이 다들 외면하며 지나치고 있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인물묘사도 그러하다.

1 사내는 한쪽 눈으로는 울고 다른 쪽 눈으로는 웃고 있었고,

2 안은 도망갈 궁리를 하기에도 지쳐 버렸다

3 나는 악센트 찍는 문제를 모두 틀려 버렸단 말야     

이를 은유로 전제하고, 이 소설의 맥락에 따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1 사내는 아내를 사랑했으나 아내의 시신을 팔아버렸는데, 이는 사람과 돈이라는 가치관의 대결이고 사내 안에서 이 모순된 가치관은 여전히 싸우는 중이고 이 모순된 선택은 사내에게 슬프며 기쁜 모순된 감정을 불러왔다.

2 안은 사물, 곧 권력, 질서, 구조의 틈에서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했고 사물의 관찰자로서 자유롭고 싶다고 했으나 안은 결국 공동체나 개인에 대해 흥미가 없다고 고백했으므로 사물의 관찰자가 되고 싶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단지 그는 도망치고 있을 뿐이다.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공동체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3 나는 안이 '데모'에 대해 말할 때 모른 척 했고 손톱자국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좋음'에서 '혐오'로 바꿔 버렸고 사내를 받아들이지만 사내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으며 사내를 걱정하지만 사내의 죽음을 모른 척 한다. 무언가 관계가 깊어질 만한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는 결정적으로 어긋난 선택을 했다.      


덧말 1.

훌륭한 소설이다. 그러나 교과서에서 뺐으면 한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지나치게 훌륭하기 때문이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이 훌륭하다고 한 이유는 1.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였고 2. 당대의 인물상을 반영하였으며 3. 개인화와 자본화가 가져올 개인의 미래를 그려 놓았고 4. 이를통해 공포, 외면, 두려움, 소통, 사실, 자유, 통제, 공감, 돈, 사랑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하기 때문이다. 버릴 문장을 하나 찾기가 어려울 만큼 효율적이고 일상에서 철학을 길어 올리는 사유의 깊이가 대단하며 하나하나 꼼꼼하게 나눌 이야기가 참 많은 소설이다. 한마디로, 명작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교과서에서 뺐으면 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어렵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은유와 상징은 도저히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접근하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섬세하며 깊고 냉소적이고 폭력적이다.

일반계의 고등학교 1학년 수준에서 추론에 정말 익숙하지 않은 (혹은 추론'수업'에 정말 관심을 잃은) 학생들은 대개 9개의 근거를 마련해 주어야 남은 1개의 근거를 찾아 결론을 하나 만든다. 추론에 익숙한 학생들도 대개 5개의 근거를 마련해 주어야 남은 5개의 근거를 찾아 결론을 만든다.

그래서 학생들이 직접 질문과 해답을 만들고, 서로 묻고 답하며 즐겁게 몰입하는 소설은 대개 5개 내외의 상황과 설명을 작품에 직접 제시하고 나머지 5개 정도를 맥락과 상황 속에 제시하는 소설들이었다. 최소한 3개는 필요하다. 3개의 정보는 직접 전해 주어야 나머지를 탐구할 여력이라도 얻는다. 그 이상은 불가능.

그런데 이 소설은 10개 중 1개만 이야기하고 나머지 9개를 독자가 찾아내야 한다. 대단한 경험과 열정, 애정과 공부 없이는 제대로 즐기기가 어렵다. 1964년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시작부터 이 소설에 다가가기 어렵고, 그냥 읽어서는 도저히 그 은유와 상징을 찾아낼 수 없으며, 찾았다 해도, 그 은유와 상징이 이끄는 맥락을 따라가기 어렵고 그 맥락이 품고 있는 두려움과 슬픔과 괴로움과 비관에 대해 이 작품이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울분과 우울에 대해 거의, 전혀, 공감을 하기가 정말, 어렵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겠다. 이 소설이 태어난 해가 다름 아닌 1965년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소통을 억압하는 시대, 소통을 거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 타인에 대한, 공동체에 대한 소통을 금지한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소설을 거부하는 시대에 태어난 이 소설. 그러나 소설의 근원은 이야기이며, 이야기란 결국 타인과 공동체를 향하는 것, 그리하여 소설은 결국 금지를 넘어 소통을 향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이 그 금지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선택한 것은 은유와 상징이었다. 그러나 은유와 상징으로 이야기를 전하면서 은유와 상징을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은유와 상징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은유와 상징을 지켜야 하는 소설. 은유와 상징이 아니고는 소설의 출간이 불가능한 시대에 태어난 이 소설의 대화법.

전혀 은유와 상징이 아닌 것처럼 보이면서 은유와 상징으로나마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 정말이지 불가능할 것 같은 이 미션을 김승옥 작가는 정말이지 보란 듯이 훌륭하게 해냈다. 그 어려운 일을 해 냈다. 김승옥 작가님께 경외감을 느낀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국어교사로서, 15년 동안 일반계 고등학교 학생들을 만난 경험으로 돌아보건데...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이 소설을 교과서에 싣고 싶지 않다.

이 소설은, 대한민국의 국문학 혹은 국어교육학 학부생들이 꼭 읽고 함께 나누며 즐겼으면 하는 소설이다. 작품의 시대적 가치는 물론이고, 그 은유와 상징의 건축이 너무도 섬세하고 대담해서 정말이지 소름이 끼칠만큼 멋지다. 그 기괴한 아름다움이 정말 매력적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학부생들에 한해서다. 고등학생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일단 내 생각은 그렇다.      



덧말2.

김승옥 작가님이 깊이 절망했던 서울, 1964년. 그의 절망이 절망적으로 실현되었던 지난 50여년의 겨울. 그 긴 시간을 돌아 한국은 2019년 여름에 이르러서야 겨우, 이 소설의 절망을 넘어선 듯하다. 

일본의 경제 분쟁에 대한 입장 이전에, 그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찬반하기 이전에, 1964년 그 해 여름 우리가 우리이기에 함께 싸우며 공감해야 했던 문제- 국가가 국가이기 위하여, 공동체가 공동체이기 위하여 반드시 함께 공감하며 논의해야 했던 문제- 일본 식민지배의 피해자에 대한 연대와 공감, 보상과 위로의 문제를 다시 우리 공동체의 핵심 의제로 다루고 있다는 것. 여전히 어려움이야 많겠다. 그러나 오늘은 적어도 사실에 근거하여 소통하면서도 어떠한 타인의 고통이나 공동체의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 글쓰고, 모이고, 의견을 내는 것은 가능한 세상 아닌가. 

'서울, 1964년 겨울'에서

'대한민국, 2019년 여름'으로.

이에 대한 김승옥 작가님의 마음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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