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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깐 KKan Jul 10. 2016

지독한 일들과 슬픈 자의식의 관계

한야 야나기하라, <리틀 라이프> (2016)



다른 사람의 인생을 타인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이 앞다투어할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세상에 홀로 남은 게 아니고서야 타인의 시선을 피하고 살기란 어렵다. 사회를 이루며 살아온 인간에게 긍정적인 평을 받는 사회 구성원이 되는 일은 생존과 직결된, 무시할 수 없는 과업이다. 타고나거나 운이 좋아 사회 안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수월하게 살아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사회에 구성되어 살아가는 일 자체가 버겁기도 하다. 부정적인 자의식을,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후자에 속한다. 사회에서 퇴출당하지 않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문제없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가면을 쓴다.



한야 야나기하라의 소설 속 '주드'는 전적으로 가면을 쓰는 부류다.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후부터 열여섯이 되기까지 온갖 성적 학대와 갖가지 끔찍한 폭력을 당한 그는 스스로를 혐오한다. 주드가 겪은 일들은 개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끔찍함을 모아놓은 것만 같고, 그는 학대를 받던 시절부터 시작한 자해로 자신을 더 깊은 수렁으로 빠뜨린다. 그가 겪은 일들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지옥 같지만, 그에게 쏟아지는 애정 또한 비범하다. 다리를 저는 주드 곁엔 그를 보살피며 좋아해주는 세 명의 친구가 있다. 그중 '월럼'은 주드에게 더욱 각별해, 늘 비밀이 많은 주드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과장되지 않게 돕곤 한다. 주드는 월럼의 애정이 깊어질수록 가면 속에서 더욱 혼란스러워한다.



스무 살 전후로 만난 친구들 외에도 주드를 친자식처럼 여기는 헤럴드와 줄리아, 그의 주치의이자 친구인 앤디 등 주드는 어린 시절 받은 학대를 보상이라도 받듯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의 상처는 심리적으로 너무나 크고, 물리적으로도 고통이 남아 있어 주드는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급기야 자신의 부정적인 믿음을 완전히 확신하게 되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는 자기 삶을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기회를 다시 한 번 놓아버리고 만다.



부정적인 자의식을 늘 갖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주드의 입장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하면서 두 권으로 이어진 소설을 읽어 나갔다. 주드가 겪은 학대와 주드에게 다시 주어지는 사랑은 내가 온 마음으로 이해하기엔 너무나 잔인하고 또 너무나 따뜻하다. 주드를 향한 사랑은 부러울 정도로 엄청난데, 정작 주드 자신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월럼과 헤럴드, 그리고 앤디는 주드에게 이런 사랑을 이해시키고 주드가 삶에 애착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데도, 불안에 떠는 주드. 그의 인생은 얼마나 어린 시절에 잘못 심어진 믿음이 치명적인 것인지, 아동 학대가 어떻게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통감하게 한다.



상상하기 어려운 주드의 고통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주변에 어쩌면 그렇게 드물지 않게 또 다른 주드가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그들 대개는 주드가 받은 사랑을 경험조차 못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득하다. 주드 외에도 맬컴, 제이비, 그리고 월럼 역시 나름의 부정적인 삶의 면모를 겪지만 주드의 고통 앞에선 마치 견딜 만한 것처럼 보인다. 이 슬픈 소설은, 그 많은 사랑으로도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가 있다는 걸 여실히 말해주는 비극이고, 한편으로는 나 같은 범인들에게 삶을 감사하며 살게 하는 처방전이기도 하다. 남의 고통을 보며 자신의 삶을 위로받는다는 게 부끄럽긴 하지만, 이미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영영 알 수 없었을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하려 시도했으니 작은 의미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잠들면 돼, 그는 생각하며 맬컴의 담요를 끌어당겨 덮고 소파 위에 누웠다. 기분 좋게 피곤했지만, 그 시절 그는 늘 피곤했다. 정상을 가장하기 위해 매일 해야 하는 노력이 너무 커서 다른 데 쓸 에너지가 없는것 같았다. (1권, 143쪽)


그들의 이런 점이, 여전히 압도당할 수 있는 능력이, 성인이 되어서도 인생에서 놀라운 경험이 계속 주어질 거라는, 대단한 시절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믿음이 부러웠다. 처음 성게 알을 먹었을 때 그들의 반응을 보면서 조바심과 강렬한 질투를 느꼈던 기억도 난다. 어른이면서 여전히 세상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1권, 391쪽)


주드는 케일럽이 옳았다고 결정한 거야. 자기는 역겨운 인간이라 그런 일을 당해서 싸다고. 그게 최악, 제일 괘씸한 일이었어. 케일럽이 그가 늘 하고 있던 생각을, 늘 배워왔던 바를 확인시켜줬으니까, 이미 생각하고 있던 바를 믿는 게 생각을 바꾸는 것보다 늘 더 쉬우니까. (1권, 540쪽)


모두들 늘 새로운 면을 보여준다는 걸 그는 알게 됐다. 어렸을 때는 서로에게 줄 게 비밀밖에 없었다. 고백이 유통화폐였고, 폭로는 친밀함의 형식이었다. 친구들에게 자기 사생활 이야기를 자세히 하지 않는 건 우선은 신비, 다음에는 일종의 쩨쩨함, 진정한 우정을 막을 인색함으로 간주되었다. (2권, 292쪽)


"주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데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데는 유효기간이라는 게 없어. 어떤 나이가 되면 사라지는 그런 일이 아니야." (2권, 3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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