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자가 본 <헤어질 결심>

<적, 녹, 청> 세 가지 색깔의 사랑에 대한 탐구

by 까나리

※ 들어가기에 앞서, 본 글은 뉴욕정신건강의학과 강은호 전문의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강은호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업로드함을 알립니다. 원저자의 허가 없이 내용 전체를 투고하거나, 저자에 대한 레퍼런스 없이 일부를 인용하는 행위를 절대 금합니다. ※




사랑은 대상과의 전면적인 연결에 대한 열망이다. 사랑의 열병 상태에서, 사람들은 상대가 나의 전부가 되고, 내가 상대의 전부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종종, 이러한 전면적 연결에 대한 소망과 ‘전부’라는 일체감에 대한 욕망은 ‘불가능’이라는 단어의 다른 이름들이 되기도 한다.


마음의 국경, 사랑의 식민지


‘속속들이 알고 싶다’라는 표현이 있다.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의 상태가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누구를 만나고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저녁은 안 먹고 왜 자꾸 아이스크림만 먹고 담배를 피워 대는지, 앵무새에게 먹이를 주며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지, 금붕어를 바라보는 눈동자 너머에 어떤 생각이 깃들여 있는지, 특히 나에 대해 어떻게, 얼마만큼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등등 상대의 모든 ‘속’을 알고 싶어진다. 상대라는 세계 안에 들어가는 유일한 시민이 되고자 하고, 그 세계의 ‘구석구석’에 머물고 싶어진다. 이렇게 되면 ‘속속들이’와 ‘구석구석’은 비유를 넘어서, 현실의 생각과 행동,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실제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 ‘속’은 경계의 안쪽이다. 따라서 사랑은 서로의 경계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는 일종의 ‘상호침투(interpenetration)’의 과정이다. 내가 상대의 안으로 들어가는 만큼에 비례해서 상대도 내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내 안에 들어온 대상의 존재감이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내 마음에 거대한 사랑의 식민지가 건설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자 의미의 원천이었던 사랑이, 자신의 마음에 대한 통제 불능이라는 극도의 취약 상태를 유발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게 된다. 상대의 작은 눈빛, 별 뜻없는 한 마디 말과 행동, 잠깐의 침묵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감정 상태를 경험하거나 견디기 힘든 조바심과 갈급함을 느끼는 상태가 된다. 이때 사랑과 재앙(원전 사고처럼), 애(愛)와 증(憎)은 사실상 한 동전의 앞뒷면이 된다.


완벽한 사랑의 불가능성과 내 마음에 대한 통제 불능이 맞물리면서 실망과 분노, 공포가 생겨난다. 의심과 혼란이 이어지기도 하고, 강렬한 의존(또는 소유) 욕구와 버려짐에 대한 불안에 휩싸이기도 한다. 일체감에 대한 소망과 함께 사랑이라는 이름의 바다 또는 블랙홀에 빨려들어가 자신을 잃어버릴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 등이 뒤섞이면서 원자로의 내부와 같은 상태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원전이 위치한 ‘이포’는 영화의 무대가 되는 지리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격정적인 사랑이라는 ‘핵반응’을 앓는 사람들의 심리적 공간에 대한 은유로도 읽힌다.


상호침투로 인한 이러한 ‘원전 사고(?)’, 즉 심리적 핵반응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대표적인 시도 중 하나가 나르시시즘(자기애(愛))적인 방식이다.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해서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에 관한 신화처럼,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세계(또는 내면) 안에 타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라는 속담이 있다. 마음을 ‘곳간’ 또는 ‘곡식 창고’로 비유한다면, 이 곡식 창고를 채우는 가장 기본적인 곡식 알갱이들은 중요한 대상들과의 관계에서 겪게 되는 ‘의미 있는’ 경험들이다. 이런 중요한 타자와 의미 있는 것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세계 안에 오직 자신만이 존재한다는 면에서, 나르시시즘의 핵심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이 아니라 결핍과 내적 빈곤, 공허다. <헤어질 결심>은 결핍된 세 사람, 기도수, 해준, 서래의 나르시시즘적 사랑 방식에 대한 영화다.


극단적인 병적 나르시시즘적 사랑(과연 이를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의 한 예가 바로 서래의 첫 남편 기도수의 방식이다. 그는 일방적인 침투만 시도하고 자신에 대한 침투는 허용하지 않는다. 기도수의 직업이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라는 점은 상당히 상징적이다. 출입국 관리소는 국경이라는 경계 내부로 외부인을 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첫번째 관문이다. 기도수의 역할은 타자를 일방적으로 투시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서래는 이 경계를 뚫고 들어온 밀입국자다. 따라서 서래가 밀입국자라는 설정은 실제 소재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관계, 마음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기도수와 송서래의 관계는 일방적인 침투만을 필사적으로 원하고, 침투됨을 원치 않는 서로에게 영원한 타자다. 이 상태는 일종의 대치상태, 정신의학적으로는 편집(paranoid) 상태가 된다. 이는 종종 끔찍한 결과로 이어진다. 대표적인 예가 송서래의 쇄골 골절과 골반에 새겨진 기도수의 이니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속속들이’, ‘구석구석’, ‘상호침투’라는 말들이 가지고 있는 은유성이나 상징적 의미는 완전히 사라지고, 일차원적이고 원시적인 사고가 당사자를 지배하게 된다. 서래를 물건으로 취급하게 되는, 은유로서의 ‘소유’가 글자 그대로 ‘소유’가 되는 원초적인 심리 상태로 퇴행하는 것이다.(기도수의 이니셜이 새겨진 지갑을 떠올려보라. ‘넌 내꺼야’라는 사랑의 밀어가 끔찍한 도착 상태로 바뀌는 순간이다.). ‘상대의 ‘속속’들이 들어가고 싶다’는 ‘침투’에 대한 은유적 소망 역시 은유성이 사라지고, 서래의 갈비뼈와 쇄골을 부러뜨리는 문자 그대로의 ‘침투’, 폭력으로 귀결된다. 영화에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지만, 기도수는 아마도 서래의 일상 ‘구석구석’을 일일이 감시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마음에 깊숙히 들어와버린 서래의 존재감, 자신의 매우 취약한 내면과 낮은 자존감을 부인하고, 서래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준의 방식 역시 섞이고 스미는 것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기도수의 사랑 방식과 메커니즘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송서래의 내부를 투시한 엑스레이 사진을 바라보고, 신체 사진을 찍어 벽에 걸어놓고, 쌍안경으로 서래의 ‘속속’을 알아가면서 일방적인 침투를 시작한다.


연결감


모든 일에는 댓가가 따른다. 자신의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타인과 경계가 섞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일방적인 침투는 해준이 승승 장구할 수 있었던 요인이지만, 필연적으로 고립감과 외로움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해준은 ‘산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게 힘들어 보인다. 그는 늘 죽은 사람을 찾아다니는 인물이다. 살인 사건이 벌어질 때 그는 인공 눈물을 넣고 ‘정신을 똑바로’ 차린다. 강도에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우리 모두 그러한 경험을 늘 하고 있지 않은가. 인공 눈물을 넣는 행위는, 정신을 좀 차리고 살아있는 느낌을 느끼려는 행위다. 찬물로 세수를 하거나 가볍게 자신의 얼굴을 때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병적인 경우 자해에 이르기까지 심리적 죽음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위라는 연속 선상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정말 아이러니 하게도, 해준은 죽은 사람을 대할 때에야 비로소 ‘산 사람’이 된다. 그가 겪고 있는 만성 불면증은 그의 고립과 외로움, 존재론적 불안의 결정적인 알리바이다. “잠복근무때문에 잠을 못자는 게 아니라, 잠을 못자서 잠복근무를 하는거야”라는 말은 해준의 심리적 결핍을 정확히 드러내는 대사다. 다시 말하자면, 해준은 표면적으로는 완벽한 경찰, 완벽한 남편처럼 보이지만, 이 한 마디는 은연 중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자백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에게 있어 가장 취약한 상태는 아마도 잠에 빠진 상황일 것이다. 어느 누구의 잠도 서로 섞일 수가 없다. 잠의 시간은 우리 모두가 취약한 단독자이며 절대적으로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때다. 잠에 든다는 것은 세상과의 끈을 모두 놓는 것이며, 심지어 내 스스로의 의식으로부터도, 내가 단독자라는 인식과 감정으로부터조차 잠시 이별하는 것이다. 죽음을 ‘영원한 잠’으로 흔히 표현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죽음에 가까운 듯한 취약한 상태로의 진입을 견딜 수 있어야 쉽게 잠이 들 수 있다. 실제 임상에서도, 수면을 방해할만한 명확한 원인(예를 들어, 심한 스트레스나 우울증, 통증 등의 질환들)이 없는 심한 만성 불면증 환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잠에 드는 순간 자신의 의식과 잠에 대한 통제의 끈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속 잠을 통제하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수영을 처음 배우는 초심자들이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어떤 통제의 노력을 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물에 계속 빠지는 것처럼, 잠과 자신의 의식을 통제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불면증이 심해진다. 이 통제는 취약성에 대한 불안에 다름 아니다.


스스로의 취약성을 버텨내는 힘은 처음부터 혼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자장가의 역할을 생각해보자. 자장가는 노래 자체나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 내가 잠든 동안에도 누군가가 나를 지켜주는 이가 있다는 증거 전달이 그 기능의 핵심이며, 이를 통해 대상과의 근본적인 신뢰, 일체감이 형성 되어야 아이는 충분히 잠에 잘 들 수 있다. 잠투정을 받아주던 엄마가 잠든 사이에 도망을 가버리거나, 자신을 덮쳐버릴 수도 있다거나, 외부의 적대자로부터 보호가 충분하지 못할거라든가 하는 불안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제대로 잠이 들 수 없을 것이다. 안정된 상황이 반복되고, 달래주는 대상의 이미지와 기능이 충분히 내면화돼서, 아주 무의식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다독거릴 수 있을 때 잠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이 된다. 해준의 개인사가 제시되지는 않지만, 최소한 해준은 이러한 내면의 대상과 관계에 대한 상당한 결핍이 있는 인물로 보인다.


해준에게는 이러한 역할을 제공해주는 이가 서래다. 잠복근무 중에 해준이 차 안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는 것은 이미 마음 속에 서래와의 정서적 연결성이 상당한 정도로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서래가 해준의 잠을 유도하는 데 쓰인 투명한 해파리의 이미지 역시 상당히 상징적이다. 잠에 든다는 것은 그토록 연약해보이는 해파리의 상태로 진입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 의미가 충만한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 내는 것은, 각자의 두꺼운 갑옷을 벗고 서로의 취약성을 함께 보듬고, 기대고, 상호 의존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서로의 경계 안으로 깊이 들어가고, 연결감이 깊어지는 것에 대한 또다른 예는 산사에서의 장면이다. 서래가 해준의 외투(외투 역시 개체를 보호하는 경계이자 껍질이고, 갑옷이며 제2의 피부다)를 열고 저고리에 12개, 바지에 6개의 주머니라는 해준의 ‘구석구석’ 들어 있는 물건들을 ‘속속들이’ 꺼내보도록 허용하는 것은 이미 이 둘 사이에 상당한 정도의 상호침투를 통한 연결감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들의 연결은 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는 것에서 절정에 이른다. 과거 ‘기미 상궁’들의 역할에서 쉽게 생각해볼 수 있듯이 음식은 타인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신뢰를 상징한다. 음식 역시 외부에서 내 몸에 침투해서 작용하는 물질이다. 상대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음식을 제대로 섭취할 수가 없다. 신뢰가 바탕이 되어 있는 음식 섭취는 영양분이 되고, 음식을 같이 먹는 행위는 서로간의 깊은 연결과 유대감을 확인하는 행위다. 그렇지 않다면 음식은 구토나 설사, 또는 시술이나 수술 등을 통해 배출/제거되어야 할 이물질(예를 들면, 몸에 박힌 총알처럼)이 되거나 독(poison, 서래의 펜타닐 알약처럼)이 된다(흥미롭게도, 해준이 서래를 위해 주문하는 스시나, 총알, 펜타닐(독), 해준의 분노의 등가물인 핫도그 모두 비슷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특히 핫도그는 사실상 서래를 상처주고 모욕하기 위한 서준의 총알이다.) 다시 말해, 이 둘이 같이 먹는 음식은 내 안에 들어오는 타자, 결국 사랑하는 대상의 대치물이다.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사랑의 언어, 파국의 언어


사랑의 언어는 시적이다. 좋은 시는 해석에 있어 열려 있다. 이러한 ‘열려 있음’은 ‘모호성(ambiguity)’이 특징이다. 시의 모호성은 부정확성과는 다르다. 이 모호성은 어떤 면에서는 특수한 방식으로 매우 정확하기도 한 특성을 지닌다. 모호성을 거부하면서 사랑을 나눌 수는 없을 것이다. 모호성으로 인해 사랑과 시는 결이 계속 늘어나고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반면, 해준의 아내 정안의 언어는 분명하다. 모호성이 없다. 섹스리스 부부의 55%가 이혼하고, 몇번의 섹스가 고혈압, 심장병 등 건강에 어떻게 좋은 지 분명하게 말한다. 분명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결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분명성은 역설적으로 가난한 언어다. 이토록 가난한 언어 안에서 사랑을 나누고 연결감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걔(해준과 정안의 아들)가 정확히 이해되는데?”라고 정안이 말할 때, 나는 오히려 그 아들의 안부가 걱정되기도 할 정도였다.


시의 언어가 그렇듯, 사랑의 언어는 지속적인 해석과 해설, 설명이 요구된다. 시의 해석에 있어 종종 문학평론가와 같은 중간자가 필요한 것처럼, 일종의 통역사가 필요할 수도 있다.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이들 사이의 언어에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해준과 서래의 모국어가 각각 한국어와 중국어로 다르다는 것은 사랑의 열병에 걸린 이들의 상황을 잘 상징하는 설정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사랑의 언어는 사실상 이런 외국어로 대화하는 것과 같은 경우가 많다. 끊임없는 설명이 필요한 경우가, 설명에 설명이 필요한 경우가 발생한다. “저보다 한국말 잘하시네요”라고 말할 때의 해준은 서래에게 분명함을 요구한다. 하지만 해준이 자신의 말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할 때 그는 이미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된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통역사 역할은 스마트폰 번역기나 경찰에서 의뢰하는 통역사다. 사람이 통역을 해도 부족할 판에 스마트폰 번역기라니. 게다가 사랑의 자기장 안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언어를 외부에서 통역/번역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완전한 일일까. “나에게 선물하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갖다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라는 번역기의 번역이 관객들에게 미소를 짓게 하는 것은 이러한 언어 해석의 불일치와 어려움이 아직은 심각한 균열이 아닌, 사랑의 풍부한 깃털들이 자리할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가 아직은 시작 단계로 원자로 안에서 핵반응이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에 이런 여유가 가능한 것이다.


사랑의 격랑은 상대가 내게, 내가 상대에게 모든 것이기를 요구한다. ‘나랑 너무 잘 통한다’ ‘나랑 케미가 잘 맞는다’는 말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찰떡’ 궁합이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그림1.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무제(완벽한 연인들), 1991


현대 미술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완벽한 연인들>이라는 작품은 동그란 벽시계 두개를 나란히 벽에 전시한 작품이다. 이 두 시계는 쌍둥이처럼 시, 분, 초를 똑같이 가리키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도 해준과 후배 형사의 사격 연습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서로 다른 인물임에도 거울에 비친 해준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순간적인 착각이 들 정도다. 상대에게 이런 ‘정확’하고 ‘완벽’한 일체감을 원하는 마음을 정신분석가 하인즈 코헛은 “쌍둥이 전이(twinship transference)”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이런 순간에 연인들은 시간이 멈춘 듯한 무한한 일체감과 연결감, 완벽하게 이해받고 공감받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영화에서 손목 시계가 클로즈업 되는 장면들이나 해준이 서래의 알리바이를 깨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이유가 서래의 시간과 숫자(138)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이들은 사랑의 시공간 안에서 연결되어 있을 수 있지만, 시간을 공유하지 못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 시계가 멈춘(시간이 멈춘 세계는 죽음의 세계다) 이들은 삶과 죽음처럼 전혀 섞일 수 없는 세계에 속하게 된다.


이러한 ‘정확성’과 ‘완벽한 사랑’에 대한 욕망은 언제든 쉽게 관계의 균열과 실망, 의심의 상태를 가져온다. 이는 종종 맹목과 증오와 폭력으로 이어진다. 기도수는 말할 것도 없지만, 해준에게 연결되기 위해 서래는 살인(철성의 엄마)과 이를 통한 살인 유도(주식 브로커 임호신)도 서슴치 않고, 이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해준)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서래)는 이러한 균열이 극대화 되어, 상호 스밈이 전혀 허용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두 대사는 곰곰히 생각해봐도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두사람의 대화는 전혀 소통되지 않는 채로 ‘완벽하게’ 엇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은 무조건적인 이해를 요구하고 있고, 다른 쪽은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과 분노에 휩싸여 있다. 이들의 질문은 사실상 ‘말’이 아니다. 상대의 경계를 뚫고 들어가 자신의 통제하에 두고, 자신만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주입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총알이고 펜타닐 알약이다. 대화는 총격전이자 화학전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산과 바다, 그리고 피: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vs. “깊은 바다에 빠트려요”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할수록, 사람들은 종종 심리적인 딜레마에 처하게 되곤 한다. 상대에게 더 다가가고 싶고 연결되고 싶은 강렬한 소망과 함께 스스로에 대한 통제감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다. 사랑의 감정은 분명 ‘내’ 감정인데도 내 뜻대로 잘 조절되지 않는 내 안의 타자가 된다. 이때 사랑은 내 안에 박힌 총알이고 어느 순간 들어온 펜타닐 알약(마약)이다. 열병같은 사랑을 앓을 때 많은 사람들이 소위 ‘뽕(마약)맞은 느낌’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심지어 모든 치료에도 전혀 효과가 없이 십년, 이십년 ‘히키코모리’처럼 살아오던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서 갑자기 심한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만큼 사랑의 힘은 강력하다. 반대로 강력한 만큼 사랑이라는 이름의 ‘뽕’에 대한 불안이 커질 수 있다.


내 삶과 마음이 절벽의 로프에 매달리듯 상대에게 전적으로 매달려 있다는 감정은 역설적으로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열병같은 사랑의 딜레마의 한쪽 극단은, 사랑이 깊어질수록 언제 내가 상대에게 버려질 지 모른다는 공포가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수가 혼자 산(사실 산이라고 해야될지 절벽이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마의 산’같은 그 공간은 아마도 ‘요새’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같다.)으로 가는 것은 이 때문으로 보인다. 로프에 매달려 절벽을 ‘정복’하고 내려오기를 반복하는 것은 서래와의 관계에서 버려짐에 대한 극도의 불안을 사람이 아닌 무생물에 전치(displace)시켜서 극복하려 하는 무의식적인 시도로 생각된다. 기도수에게 서래의 자장가(?) 또는 ‘해파리 최면(?)’은 너무 위협적이다. 그만큼 기도수는 취약하고, 취약한만큼 악해질 수 있다. 그는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요새 같은 곳 위에 서서 타인을 내려다볼 수 있을 때에야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만의 자장가(말러의 교향곡)를 듣는다. 일견 이는 자족적인 삶처럼 보이지만, 절벽 위의 공간처럼 좁고 위태로와서 타자를 허용하기 어려운 삶이다. 그게 기도수의 내면이다. 그리고 기도수는 타자를 허용하지 않는 그토록 공고해보이는 공간의 취약성이라는 지독한 역설 때문에 어이없이 쉽게 죽는다.


사랑의 딜레마의 반대 편 극단은 ‘바다’와 관련된 것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라는 낭만적인 가곡도 있긴 하지만, 사실 어떤 이들에게 사랑의 대상은 호수 정도가 아니라 크기가 가늠이 안되는 바다 또는 대양(ocean)이 될 수도 있다. 내 마음을 내어줄수록, 내 안의 사랑의 식민지가 커지고 상대에게 종속되는 느낌이 커질 수도 있다. 이러한 종속, 또는 의존의 느낌이 극단적으로 커지는 경우, 그 자체가 스스로를 조절하는 ‘나’라는 주체감이 사라진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이때 사람들은 상대라는 바다에 압도되어 존재가 녹아버리거나 소멸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간, 쓸개 다 빼준다”는 표현이 그렇지 않을까. 간, 쓸개, 심장, 다 빼주다 보면 결국 남는 게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녹여버리고 사라지게 하는 원전 사고도 마찬가지다. 철성의 엄마와 주식 브로커 임호진의 관계 역시 단순히 주식 사기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내 마음의 지분을 상대에게 모두 넘긴 후 자신의 모든 것이 녹아 사라져버린 사랑의 포로들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 로망 롤랑은 프로이트와의 서신에서 사랑의 대상과 관련된 대양감(oceanic feeling)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이 대양감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시간이 영원히 멈춘 듯한 무한한 연결감, 일체감, 황홀감과 동시에 존재 소멸의 근원적인 공포감 양쪽 모두와 관련된다.


송서래가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식은 ‘대양’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완전히 녹여버리는 것을 통해 상대 안에 영원히 존재하는 병적인 환상을 통하는 길이다. ‘상대라는 바다’라는 것은 은유다. 하지만 이상적인 사랑에 실망하고 분노한 서래의 마음의 사태 안에서 이 은유와 실재의 대양은 구분되지 않는다. 해준 역시 마찬가지다. 서래에게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트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라는 해준의 말은 경찰로서 넘지 말아야 할 해준의 선 넘은 사랑이다(이런 면에서 해준과 서래의 관계는 경계침범(boundary violation)으로 붕괴해버리는 상담가와 내담자를 떠올리게 되기도 한다.). 서래는 말 그대로 자신을 깊은 바다에 빠트리는 것으로 사랑과 분노의 극대치를 완성하는데, 이 방식은 해준이 서래에게 폰을 바다에 빠트리라고 한 것을 사랑으로 해석하고, 이 방식을 모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죽는 방법의 선택까지 서래는 자신의 언어와 방식을 갖지 못한다. 방향은 전혀 달라 보이지만 이는 결국 기도수의 방식만큼이나 병적이고 충격적이다.


상대라는 ‘마의 산’에 온몸이 매달려 언제든 그 로프가 끊어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다시, 상대라는 거대한 바다 속으로 소멸해서 무(無)로 돌아갈 공포를 버티고 견뎌내야만 안정적인 사랑이 가능하다. 이 딜레마를 감당하지 못하면 혼란감이 극대화되고, 이에 압도되면 스스로의 통제를 잃고 ‘붕괴’될 것 같은, 붕괴된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컷이 말한 “붕괴의 공포(fear of breakdown)”가 이에 해당한다. 이런 붕괴의 공포에 압도될 때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져서 어쩔 줄 모르게 된다. 따라서, 이 영화 속 영화의 제목이 <적색 경보>인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하다. 이러한 ‘경보’가 극단에 이르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하거나 절대적인 무기력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폭력이 외부로 향하면 말 그대로 폭력이 되고, 스스로에게 향하면 자살 또는 자해가 된다. 해준이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라고 할 때의 그의 심리가 이러한 패닉 상태에 해당한다. 피의자와의 사랑이라는 넘지 말아야 될 선을 넘어 증거 인멸까지 지시한 해준은 ‘자부심 있는 경찰’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 그대로 붕괴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해준의 사랑의 색깔은 적색이다. 그는 피를 무서워하는 경찰이다. 피는 살아있음의 상징이다. 해준에게 살아있는 대상, 살아서 펄떡거리는 사랑과 욕망은 공포의 대상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가 죽은 사람들만을 찾아다니는 것도 이러한 연유일 것이고, 오랫동안 어느 누구와도 사랑의 감정을 나누지 못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붕괴되기 전까지, 해준이 사랑의 양 극단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식은 그의 직업적 역할을 통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버려짐에 대한 불안과 대상과에의 흡수가 주는 공포 사이에서 해준은 계속 진동하는 방식으로 삶의 평형을 유지한다. 기도수가 대상과의 관계를 절벽을 오르는 상황으로 대치시켰던 것처럼, 해준은 살인범을 뒤쫓는 관계로 대치시키는 방식으로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 한다. 뒤쫓아 가는 동안의 해준의 방식은 불나방처럼 삶의 모든 에너지를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에 집중시키며(이 극단이 송서래의 방식이다), 범인이 잡히는 순간(즉, 대상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된 경우 또는 합일이 된 순간) 이 관계는 끝이 나고, 새로운 대상을 찾아나선다. 실제 현실에서도 해준처럼 상대의 마음을 얻을 때까지 모든 노력을 기울이다가, 상대방이 마음을 수락하는 순간 사랑이 식어버리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경우가 꽤 흔하다. 이러한 사랑의 ‘쫓고 쫓기는’ 관계는 유년의 심리 발달에 상당히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놀이가 숨바꼭질이다. 해준은 대상과의 관계에서 적절한 거리와 친밀감 유지를 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인물로 생각되는데, 살인범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숨바꼭질을 반복하면서 이러한 감정적 어려움을 해결 내지 회피해온 것으로 생각된다.


곰팡이, 잉크, 청색과 녹색 사이, 그리고 안개


생각하면 할수록 이 영화, 정말 놀라운 작품이다. 대사 하나 하나, 배우들의 표정, 손짓, 몸짓, 그리고 순간적으로 스쳐지나는 이미지들까지 대양의 잔물결들처럼 수많은 의미와 상징들이 담겨 있다. 그중 대단히 흥미로운 장면이 곰팡이에 대한 장면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해준과 아내는 영화를 틀어놓은 상태로 부부 관계를 맺는다. 이때 영화 속 영화의 여주인공의 대사는 이렇다. “더 이상 갈 데가 없어. 이대로 죽게 두시오. (남주인공: “참 잔인도 하구나”)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곧바로, 해준의 집인지 서래의 집인지 구분이 안가는 장소 구석에 놓인 작은 탁자가 보이고, 벽면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다. 이 화면은 다시 엑스레이 투시 화면으로 바뀌면서 곰팡이의 형상이 송서래의 엑스레이 심장으로 바뀐다.


우선 곰팡이는 해준의 아내인 정안 입장에서 보면 완벽해 보이는 결혼 생활에 일방적으로 침투한 서래, 또는 서래와 해준의 불륜 사건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서래의 남편인 두번째 남편인 브로커 임호준에게도 마찬가지다. 한편, 해준과 서래의 관계 안에 침투해서 경찰과 피의자 사이에 있어서는 안될 내용의 녹음 파일을 입수해 해준을 협박하려는 임호준이 해준과 서래에게는 곰팡이일 수도 있다. 결국, 해준과 서래의 비극적 과정에는 서래가 극단적인 방식으로 임호준이라는 곰팡이를 제거하려 했던 일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곰팡이 제거’ 문제는 서래의 죽은 남편 기도수의 성격에 대해 서래의 응급실 진료의사와 서래가 썼던 표현인 ‘깔끔한 성격’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깔끔함’은 불순물이나 혼종, 모호함을 허용하지 않는다. ‘깔끔함’이 가장 극단적인 폭력으로 나타나는 상황이 소위 ‘인종 청소’다. ‘깔끔함’은 타자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는 나르시시즘의 본질적 특성 중 하나다. 동시에 이 ‘깔끔함’은 강박증상이나 강박적인 성격의 특성이기도 하다. 강박이라는 동전의 뒷면은 ‘깔끔하지 못함’, ‘완벽하지 못함’에 대한 불안이다. ‘깔끔’하고 완벽한, ‘정확한’ 사랑은 없다. 모호함을 허용할 수 없는 기도수의 ‘깔끔함’은 마음의 빈곤과 황폐함, 그로 인해 불안에 다름 아니며, 결과적으로 서래에 대한 폭력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서래를 사랑하기 시작할 무렵의 기도수에게는, 애매한 상황에서 ‘정확’하고 ‘깔끔’한 표현을 찾지 못해 피식 웃는 서래의 웃음은 ‘먹물처럼 번지는’ 미소였을 테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애매모호함은 자신에 대한 비웃음과 경멸, 무언가를 숨기는 음험한 곰팡이같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싶다.


셋째, 벽에 슬어있는 곰팡이들이 서래의 엑스레이 심장으로 바뀌는 것의 의미다. 우선, 이는 서래가 (심리적으로) 많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책상의 서랍 손잡이마저 엑스레이 투시 사진을 자세히 보면 묘하게도 해골처럼 보인다. 서래는 자신이 안락사시킨 엄마와 외할아버지의 유골을 가지고 다니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서래에게는 죽음의 세계가 늘 함께 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것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물리적인 죽음이 그 하나고, 세상 어떤 것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철저한 무의미 상태가 다른 하나다. 삶이나 세상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심리적인 죽음 상태는 ‘마음의 곡식 창고’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볼 때 자아(self)의 공허와 황량함이다. 서래의 내면이 텅 비어있고, 자기 자신이라고 할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은 해준과 말다툼 할 때의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는 대사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애초에 이 대사는 서래 자신의 것이 아니다. 서래가 몰두해있던 영화 여주인공의 대사를 앵무새처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역시나 이 영화 참 흥미롭다. 서래가 키우던 새도 앵무새였다.). 다시 말해, 서래는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갖지 못한 앵무새같은 인물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를 갖지 못한 이는 껍데기다. 껍데기로 살아가는 인물이 스스로 삶의 충만함과 생기를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서래가 가지고 다니는 유골들, 죽음의 상태는 결국 서래의 심리적 죽음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생성하기 어려운 특성은 곰팡이처럼 기생적인 삶의 방식을 만들어낸다. 기도수와의 관계가 그랬을 것이고, 임호진과의 관계도, 해준과의 관계도 그렇다. 이러한 서래의 심리적 죽음, 또는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구분하기 어려운 심리적 좀비 상태, 그리고 기생적인 삶의 방식이 결국엔 파괴적이고 파국적인 사랑의 결말을 가져오고야 만 것이다.


현실에서의 사랑은 대체로 어중간하다. 곤잘레스의 <영원한 연인들>에서처럼 11시 42분 50초같은 순간들이 가끔 있긴 하지만, 많은 국면들에서는 자꾸 엇갈린다. 이 그림에서의 지독한 역설 중 하나는, 그러한 완벽한 일치의 순간은 하루 중에 극히 짧은 시간이라는 것이며, 반대로 계속 그 완벽한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 시계가 일치한 시점에 함께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좀 여담인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두 주인공의 사랑이 시작될 때, 시골가에서 보이는 나란한 부부의 무덤을 보며 은수는 말한다. “상우씨, 우리도 나중에 죽으면 저렇게 묻힐까?”). 게다가 현실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렇게 똑같은 시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할 수 없다.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조차도 그렇다. 원전이 폭발하는 순간에 원자로 안으로 다시 들어올 수 있는 그런 이상적인 사랑은, 슬프지만, 현실에서는 극히(?) 드물다. 우리는 영원히 상대를 ‘완벽히/정확히’ 이해할 수 없고, 상대에게 ‘깔끔하게’ 이해받을 수 없다. 대양의 물이 섞이듯 서로가 완벽하게 삼투되는 소망은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사랑과 삶, 세계는 이포의 안개처럼 많은 부분이 우리의 ‘정확한’ 이해와 인식 너머에 있다. “엄마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려고 간호사가 됐는데, 엄마는 전문적으로 죽여달라고 하네.”라는 서래의 말처럼, 삶은 해도 너무한 아이러니와 예측 불가능성으로 가득하다. 어떤 이에게 사랑, 사랑의 슬픔은 “잉크처럼 천천히 번지는” 어떤 것이지만, 다른 이에게는 벽에 번지는 곰팡이가 될 수도 있다. 펜타닐이라는 같은 성분의 물질이 엄마의 고통을 영원히 끝내준 약이기도 하지만, 법적으로는 엄마를 죽인 살인 도구이기도 하고, 또다른 살인을 유도한 범행도구이자 해준을 보호하기 위한 서래의 맹목이기도, 마지막엔 서래 자신의 자살도구이기도 하다. ‘조국’이라는 이름은 자신의 모든 삶과 목숨을 바쳐서 싸우게 만드는 산이나 바다 같은 거대한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재산이었던 호미산에 대한 권리마저 지워버리고 녹여버린 일방적이고 무책임한 대상이기도 하다. 서래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물건 내지 가축 취급을 했던 기도수가 서래 외할아버지의 행적을 좇아 훈장을 받도록 도와준 사람이었다는 사실 역시 언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또는 관객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아이러니다.


삶과 세계의 아이러니와 역설은 서래의 외투 색깔이 빛의 각도에 따라 녹색으로도 보이고 청색으로도 보이는 것으로도 상징된다. 수사관으로서의 해준의 물음은 녹색과 청색 중 어느 쪽이냐의 ‘깔끔함’과 ‘분명함’을 요구하지만, 현실 속 삶에서의 많은 것들은 녹색이었다가 청색이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하고, 다시 그 중간의 어떤 모호한 색깔이기도 하다. ‘적색’은 열정적인 사랑의 색깔일 수도 있지만, 해준이 늘 두려워하던 피의 색깔, 즉 ‘사건 또는 사고’의 색이기도 하다. 심지어 바다를 그린 서래 집의 벽지 그림에서 파도 하나하나들은 작은 산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첫장면에서 해준의 총알들은 과녁의 정중앙 부위를 관통하지만, 현실의 과녁들은 계속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다시 생각해보면, 서래가 살인을 분명히 했는가 안했는가 문제 역시 엄마를 안락사시킨 것 외에는 모두 이포의 안개에 가려진듯 깔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한편, 바다의 색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녹색도 아니고 청색도 아닌, 우리의 인식과 언어를 매순간 벗어나는 어떤 것 때문이지 않을까. 인간의 삶과 사랑이 만약 그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서로간의 만남과 사랑이라는 상호 침투 과정 이후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원자로와 같은 압력과 밀도, 고온을 견뎌내면서, 서로를 파괴하고 않고, 어쩌면 어정쩡하고 어쩌면 적당하다고 할 수도 있는,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온도에서 스미고 물들어서 무언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거리의 쓰레기가 될 수도 있었던 독비둘기(‘독’비둘기도 역시나 의미심장한 소재다) 깃털 하나, 널린 스시집에서 파는 스시 도시락 하나, ‘심장’, ‘단일한’, ‘마침내’ 같은 단어들이 더 이상 세상에 널려 있는 흔하디 흔한 큰 의미 없는 것들 중 하나가 아니라, 의미 없이 명멸을 반복하는 바다의 수많은 잔물결들 중 하나가 아니라, 매번 특정한 사람, 특정한 만남, 특정한 시절을 생각하게 만드는 특별한 의미를 띠게된 것처럼 말이다. 서래는 결국 해준의 마음 속에 영원한 미결 사건으로 남았다. 서래의 방식이 병적이든 아니든간에, 어쩌면 사랑은 애초부터 그 심연을 다 알 수 없는 영원한 미제 사건, 안개에 가려진 어떤 것일 지도 모른다. 삶도 그렇고, 사람도, 세상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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