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인터뷰, 배우 '고은결' 님
Q. 자기소개
- 한 삼일째 자기소개서 쓰고 있는데... 고은결이고요, 서른여덟입니다. 직업은 예술노동자예요.
Q. 지금 사랑하고 있나요?
- 사랑할 때 있고 안 할 때 있어요. 스위치처럼 자주 깜빡깜빡거려요. 제가 여유가 있으면 사랑하는데 여유가 없으면 스스로도 별로 사랑하지 못하고 막 파괴적이어지거든요.
연인이든 부모님이든 연기든 여유가 없으면 깜빡 꺼져버려요.
예전에는 늘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렇지 않더라고요.
Q. 연기(마임)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 사랑 때문인데요. 그러니까 이거는 중학교 때... 너무 긴데 괜찮으시겠어요? 이 이야기 진짜 너무 마르고 닳도록 해서 이제 안 하고 싶었는데.
중학교 때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랑 어른이 돼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어요.
그 친구가 "넌 뭐가 되고 싶어?" 그래서 "나 시인이 되고 싶어."
근데 걔네 아버지가 시인이셨어요.
시인은 돈이 안 된다, 그래서 자기가 돈이 되는 걸 찾아보겠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짜리가 일주일 뒤에 카피라이터(CopyRighter)를 찾아온 거예요. 뭔지 아세요? 저도 몰랐거든요. 복사 전문가인 줄 알았더니 광고 문구 제안, 예를 들면 '고향의 맛 다시다' 이런 거 쓰는 거 있죠?
Q. 캐치 프레이즈 말씀하시는 걸까요?
- 맞아요, 그런 거 하는 사람! 그게 다 카피거든요. 광고 문구를 다 카피라고 그래요. 저도 몰라서 한 달 동안 그게 뭔지 찾아봤어요.
그 친구는 미술을 했는데 자기는 이제 비주얼 디자이너가 되겠다, 그래서 나중에 필드에서 너는 카피를 쓰고 나는 비주얼 아트 디렉터가 돼서 만나자 뭐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그걸 믿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렇게 이제 스무 살이 되고 광고과로 대학을 가서 걔를 한 일 년 만에 만났어요.
제가 "너 무슨 전공으로 학교 갔어?" 물어봤죠. 어렸을 때 한 약속이지만 저는 잊지 않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미술 관련 과를 간 줄 알았더니 유아교육과인가 사회복지과를 간 거예요? 그래도 뭐 그거야 달라질 수 있으니까.... 나는 나와의 약속만 기억하고 있으면 오케이다.
그래서 "혹시 우리 약속 기억해?" 그랬는데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거예요. 이미 난 전공이 정해졌는데... 그 학교 가야 되는데!
그때 이후로 전공에서 겉돌기 시작했어요. 비뚤어졌어요. 비뚤어졌다가 학교에서 '판토스'라는 마임 동아리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때부터 계속하게 되었어요.
순애보에 대한 반발심으로....
Q. 연기(마임)의 매력
- 조금 배워서 많이 폼 잡을 수 있다!
연기도 그렇고 마임도 그렇고 도드라지는 테크닉이랄 게 많이 없거든요. 그래서 '진실성'이 정말 중요해요.
마임은 그런 기술의 스펙트럼이 상대적으로 좁거든요. 그래서 노력대비 폼을 제일 잘 잡을 수 있어요.
예를 들면, 무용은 꽃을 표현하기 위해서 몸을 막 찢고 던지고 구부리고 해야 되잖아요.
근데 연기는 꽃을 보는 행위로 끝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엔 너무 쉽지 않나. 그래서 진실됨이 중요해요.
그전에는 저도 연기에 많은 사명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연기를 해서 세상을 바꿀 거야!' 막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사실 처음에 폼 잡을 수 있어서 시작한 게 좀 컸던 것 같아요. 무대에 서고 이러면 멋있잖아요. 그래서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그 친구를...
다분히 세속적이죠?
Q. 학구열도 남다르신 것 같은데, 항상 결과가 좋으신 것 같아요.
- 저는 참 운이 좋은 편이에요. 그래서 이만큼 배우면 이만큼 할 줄 알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연기가 그렇다니까요? 조금만 배우면 이만큼 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래서 좀 더 배워봤어요. 학교를 더 가보고, 그럼 이만큼 배워서 또 이만큼 더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지금도 계속 뭔가 배우고 싶긴 한데 뭘 배워야 될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Q. 재능의 영역인 거죠?
- 재능은 아니에요. 제가 업계에서 계속해보니까 재능 있는 애들은 확실히 달라요. 달라도 뭔가 확실히 달라.
Q. 연기를 통해 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것
- 연기라는 건 어쩔 수 없이 대본이 있고 연출가가 바라는 대로 말하는 거기 때문에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딱히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마임을 통해서라면 이런 가치를 전하고 싶어요.
백마디 말보다 한 번 딱 안아주는 게 더 힘이 될 때가 있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10시간 동안 안고 있으면 "너 왜 이렇게 안고 있는 거야? 왜 그러는 거야?" 의문이 생기잖아요.
그럴 때는 "너 힘내라고."라는 말 한마디의 힘이 더 세요. 그때를 위해서 연기하는 것 같아요.
Q. 사랑하는 것 VS 돈
- 사랑이냐 돈이냐, 역시 돈이랄까... 왜냐면 제 주변에 사랑 충만하거든요. 주변에 사랑 전문가들이 넘쳐나요. 근데 마른 녀석이 있어요, 돈이라고. 지금 주변 친구들이 다 돈이 메말라가지고 허덕이고 있거든요?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라는 게 있어요. 오랜만에 듣죠? 우리가 배고프고 집도 없고 일주일 굶었는데 만 원이 떨어졌어. 이걸로 내가 공연을 보러 갈 것이냐 밥을 사 먹을 것이냐.
저는 밥 먹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일단은 문화예술이란 기본 욕구가 충족된 상태에서 향유할 수 있지 않나?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좀 사람이 먹고살만해야지 않나... 그런데 이 당근케이크 제발 한 입만 먹어주면 안 돼요? 제가 기다렸거든요. 여기로 이렇게.
여기 제가 일하던 곳인데 이 크림도 제가 직접 쳤어야 했어요. 맛있어서 잘 팔렸는데 힘들어서 죽을 뻔했어요.
Q. 사랑에 관한 작품을 할 예정이 있으신가요?
- 사실은 그동안 사랑에 관한 주제들로 작품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 늙고 노쇠해 버려서 사랑이라는 것이 크게 막 예전처럼 와닿지 않네요. 개인 작품으로는 안 할 것 같고 사랑에 관련된 작품에 캐스팅이 되면 할 거에요.
Q. 주변인들에게 사랑을 표현하시나요?
- 잘 못하는 타입 같아요. 오히려 친구들은 사랑한다 많이 해주는데, 친구들이 다 사랑의 전문가들 이어서 미쳤어요. 정말 미쳤어요. 사랑을 막 주머니에 넣어주고 손에 막 쥐어줘요. "이거 뭐야? 이 사랑이 여기 왜 있어?" 이런 느낌으로 다가... 그래서 오히려 좀 안 하게 되는 거 같아요. 너무 막 그득그득해가지고. "여기다 언제 넣었어? 몇 개나 넣은 거야?" 싶고 약간 빚지는 마음도 들고.
예를 들면 카카오톡 선물 받기도 받으면 빚을 지는 거니까 갚아야 되잖아요. 근데 되돌려 줘야 되는데 그 받은 사랑이 되게 크거든요. 내가 보기에 난 그만큼 널 안 사랑하는데 어떻게 해주지? 근데 걔네들은 충분히 사랑을 느낀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맨날 만나면 욕하고 비난하고 "너, 너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너 대학교 4년제 나와놓고 그 따위로 살지 마." 이러는데 애들이 그런 데서 사랑을 느끼나?
좀 제 친구들은 변태가 많은 것 같아요.
Q. 츤데레 타입인가요?
- 츤데레보단 지랄을 많이 하는 타입인데요, 커다란 위협적인 지랄을 하는 타입이 아니라 요만한 플랑크톤 같은 녀석이 여기서 "야! 인생 똑바로 살아!" 이러니까 다들 "허허 귀엽구나."그런 느낌으로 저를 보고 있는 게 느껴져요.
Q. 친구와 연인을 구분 짓는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우정도 사랑의 일종이라고 생각해요
- 이거 친구들하고 요새 토픽인데, 친구와 연인과의 사랑을 어떻게 구분 지을 수 있을까? 성애적인 것으로? 또는 정신적인 것으로? 그렇다면 기준은 무엇일까? 이러한 이야기를 종종 나눕니다. 답은 나오지 않고 있어요.
Q. 추천해 주실 만한 사랑에 관한 작품
-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 그거랑 오늘 아침에도 이거에 대해서 글을 쓰다 왔는데 '100만 번째 산 고양이.' 최승자 시인은 거의 우리나라 현대 시의 초신성이에요. 저에게는 이 사람이 현대시를 열었어요.
Q. 연기와 사람 외에 또 사랑했던 것들이 있나요? 취미라던가
- 아 저 한껏 빠져들었던 게 있죠. 게임이랑 만화인데요. '창세기전'이라는 게임이랑 '에반게리온'인데 거기 모든 게 다 들어있습니다. 사랑했어요 정말. 그 두 콘텐츠가 당시에 제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줬어요. 데미안이라는 캐릭터가 "너의 의지는 나에게로 이어졌다, 이 의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어지겠지." 뭐 이런 말을 하는데... 이거 말해보니까 별로네. 근데 진짜 그때는 막 눈물 흘렸거든...
Q. 사랑이 나를 아프게 할 때도 있나요?
- 맘껏 아파합니다. 그걸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요. 보통 사람이 날 힘들게 하는데 좌지우지할 수 없으니까 그냥 마음껏 아파하고 마음껏 술 마시고 마음껏 자해하고... 정신적으로 되게 몰아붙이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이런 거... 잠 못 자고 막... 보통 다 그렇지 않나요?
Q. 사랑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 제가 진짜 사랑, 사랑, 사랑 타령 엄청 하는 타입인데 그거 아세요? 과시는 결핍이다. 그래서 '결핍'인 것 같아요. 이거는 빈칸으로 좀 남겨놔 볼까요? 어제 친구랑 전화하면서 "야 내일 왠지 사랑은 한 문장으로 이런 거 질문 나올 것 같다." 하면서 "야 그럼 이래야 되나? Love is Love." 막 이러면서 깔깔 웃었거든요. 근데 모르겠어요.
Q. 스스로를 사랑하시나요?
- 아니요. 저는 저의 원수입니다. 죽여버려야 돼요. 내가 나를 괴롭게 하잖아요. 막 기획서 안 써, 밤새, 막 하여튼 저를 괴롭게 합니다. 명예욕, 권력욕, 애욕 이런 거 다 제 안에서 솟아나는 것들이잖아요. 너무 괴롭고 좀 패버리고 싶어요.
두 명이잖아요? 뒤졌어요. 진짜 한 명 뒤졌어.
만나면 패버릴 거예요.
"어? 새끼야 정신 차리라고, 너라는 새끼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됐어."
아주 쌍욕을 박아줄 겁니다.
Q. 저는 세상에서 나만큼은 내 편이 돼줘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도 좀 스스로를 사랑하셔야 되지 않겠어요?
- 저는 금방 오만해지는 타입이에요. 타인들이 나를 많이 사랑해 줘서 오만해지지 않으려면 항상 겸손해야 됩니다. "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야!"라고 하면은 보통 겸손하잖아요? 저는 되게 간사한 사람이어서 사랑을 많이 받으면 '날 사랑 안 할 수 있겠어?' 이런 게 좀 있어서 경계해야 돼요. 그런 마음을.
Q. 사랑을 통해 배우고 깨달은 것들
- 이게 원하는 답이 아닐 수 있는데, 저 이제 사랑에서 뭔가를 배우는 건 그만하고 싶어요.
안 그러세요? 학교도 아니고 왜 거기서 뭘 그렇게 깨닫고 배워야 되는지... 뭘 그렇게 깨달아야 되는지...
김창완 노래 중에 다섯 살은 다섯 살의 인생을 살고 스무 살은 스무 살의 삶을 산다 하잖아요. 지금 과거를 막 부정해 봤자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것 같아요. 그래가지고 사랑에서 뭔가를 배운다기보다는 그냥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그리고 그때의 내가 그게 사랑인 줄 알았으니까.
근데 그걸 지금 비난할 수 없어.
그냥 인정해야죠.
그랬지 그땐, 그게 최선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