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100명에게 묻다.

여덟 번째 인터뷰, 발레리나에서 사회복지사로

by 산토끼


Q. 자기소개

- 29살, 여자... 별명은 봄! MBTI는 일곱 번 했는데 일곱 번 다 ISFJ.



Q. 지금 사랑하고 있나요?

- 네, 우선 가족. 가족들은 사랑보다는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미워, 밉고 진짜 안 맞아. 근데 이제 혈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이지.


내가 진짜 남으로 만났잖아? 절대 친구로도 안 두고 애인으로도 안 둔다.


특히 언니랑은 사이가 엄청 나빴는데 나이가 들면서 힘이 빠져서 그런지, 이제는 어느 정도 조율하면서 살아가는 중이야. 배려가 중요한 것 같아. 서로 좀 참아주는 거.


언니가 결벽증이 심했어. 나랑 엄마랑 아빠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어느 정도 자기 선을 풀었어. 그리고 언니가 좀 예민하단 말이야. 그런 점도 이제는 어느 정도 넘길 수 있지.


그냥 스스로를 다독여. 최대한 이해해 보려고 하는 편이야.


솔직히 완벽하게 다 이해는 못 하겠거든?


타협하는 거지 뭐, 조금씩.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거 같애.



Q.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랑이 있어?

- 와 나도 왜 이런 거 물어보면 배신밖에 안 떠오르냐...


아, 외할머니가 지금 치매가 심하시거든.


근데 지금보다 덜 할 때 계속 나만 찾으셨대. 어릴 때 나를 많이 예뻐해 주셨고 내가 외할머니 손에 자랐거든.


한 번은 내가 밥을 너무 안 먹어서 등짝을 때렸대. 근데 그게 너무 마음에 남아서 볼 때마다 그 얘기를 하셨던 게 기억이 나.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손녀를 내 손으로 때렸으니까 얘도 기억을 하고 있겠지 하면서.


근데 난 전혀 생각이 안 나. 난 할머니랑 놀았던 기억 밖에 없어.


그리고 할머니가 치매 걸리기 전에도 맨날 엄마 아빠 둘만 외할머니 댁 가면 나부터 찾으셨대.


나 언제 오냐... 나 언제 볼 수 있냐...



Q. 이제 조금씩 남자친구와 결혼을 준비하고 있잖아요. 결혼을 결심한 계기가 있나요?

- 되게 사소한 건데, 맛있는 걸 보면 꼭 하나씩 떼와.


밖에서 음식을 먹거나 맛있는 게 있으면 그거를 꼭 포장해서 오거나, 회사에서 누가 제주도 갔다 왔다면서 간식을 주면 그럼 그걸 하나라도 꼭 내 거를 챙겨 와.


그래서 나는 '아, 이 사람이랑 살아도 내가 밥 못 얻어먹진 않겠구나.'라고 생각하고, 항상 나를 1순위로 두고 있구나 싶어. '육체가 곁에 없어도 마음속으로는 항상 나를 생각하고 있구나.' 이게 컸던 것 같아.


레전드였던 게, 내가 연애 초에 한 번 심하게 아팠어.


그때 오빠가 충청도에 출장을 갔었거든? 근데 오빠가 바로 내려와서 죽 포장해서 먹이고 약까지 먹여서 나 집 들어가는 거까지 보고 다시 올라갔어.


그때 딱 '이 사람이랑 결혼해도 괜찮겠다.'라는 마음이 생기더라.


그리고 오빠가 상당히 나긋나긋해. 화를 거의 안 내.


내가 화가 나도 나를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야. 그게 나한테는 굉장한 장점이야. 오빠가 일단 들어주고 우선 나를 진정시켜. 그러고 난 다음에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리고 요리도 잘해. 진짜 잘해!




Q. 결혼해서 어떤 가정을 꾸리고 싶어?

- 난 좀 우드 계열의 포근하고 아늑한 곳에 살고 싶고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그래서 주택 살고 싶은데 또 애들도 키우고 이러려면 아파트가 좋을 거 같고... 아무래도 보안이 잘 되는 편이니까?


근데 그럴 수가 없는 환경이라면 주택에서 최대 높이까지 돌담을 쌓을 거 같애.


그리고 딸 하나, 아들 하나 낳고 싶은데 오빠는 딸 둘 낳고 싶대.


딸이 떼쓰면 그래도 어느 정도 자기가 포용을 해줄 것 같대. 근데 강도가 지나치면 힘들 것 같대.



Q. 딸도 떼쓰고 아들도 떼쓰잖아. 안 키워봐서 모르겠는데 차이가 많이 나나?

- 자기가 아들이어 봤잖아.


게다가 형제라서 위에 형이 있는데 형이 진짜 별나게 컸어. 지금은 멋진 어른이시거든? 직업이 소방관이셔.


근데 어릴 때는 오빠를 침대 위에 세워놓고 무슨 레슬링 기술이 어쩌고 하면서 자빠트려서 다치고 하여 간에 난리도 아니었대.


자기가 아들이어 봐서 아는 거야. 힘들 다는 거를. 어느 정도냐면 어머님도 아들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것 같대.


근데 나는 나란히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싶어.


그리고 차별 없이 키우고 싶어. 딸이라고 해서 더 부둥부둥한다던가 아들이라고 해서 더 강하게 키운다던가 이런 거 없이.


아 근데 진짜 진짜 절대로 안 되는 거 있어.


발레.


내가 이미 겪어봤으니까 발레는 절대 안 돼.


취미? OK. 근데 뭐 전공을 한다? 절대로 안 돼. 차라리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할 거 같애.



Q. 아니 너 나랑 같이 무용과 나왔잖아

- 나는 솔직하게 발레가 하고 싶어서 대학에 간 건 아니야. 나는 원래 방송댄스 같은 거 배우고 싶었어!


내 초등학교 졸업사진 보면 나 엄청 뚱뚱하거든? 말도 못 하게 뚱뚱해요. 겁나 많이 먹어가지고.


뚱뚱하다고 왕따도 당했는데 중학교 올라가면서 더 이상 왕따 당하기도 싫었고, 한참 질풍노도의 시기라서 미모를 좀 가꾸고 싶었어.


그래서 춤 학원을 다니겠다 한 건데 엄마가 막 어린애들이 배 까고 춤추고 무슨 그런 거 하려고 하냐면서... 그냥 여기 앞에 발레 학원 있으니까 조신하게 발레나 한 번 배워봐라 해서 시작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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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발레는 타이즈에 레오타드 입고 하는 건데...

- 아 그니까..! 어쨌든 취미로 하다가 원장님이 꼬셔서 전공으로 바꾼 건데 솔직히 대학 떨어지면 미련 없이 물리치료과를 가고 싶었어.


근데 웬걸 대학에 붙어 버렸네? 그래서 그냥 다니게 된 거야.


입시 자체도 엄마 아빠가 너무 원해서 시험 친 거야. 나한테 선택권이 딱히 없었어.


그래도 전공하면서 힘들지만 최선을 다했던 거 같애. 일찍 가서 연습도 혼자 하고 안 되는 거 계속 노력하고...


그러면서 성취감도 느끼고 했는데 이걸로 대학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던 것 같애.


고3 때 내 정체성이 유실된 상태였는데, 그냥 막연하게 이걸 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이걸로 가야지. 그냥 이왕 이거하고 있는 김에 하자.


사실은 엄마 아빠의 인생을 산 느낌이야.


그래서 늦은 나이지만 사회복지학과로 다시 진학했어.



Q. 고등학생 때 성적에 맞춰서 아무 과나 가는 친구들, 취업이 잘 된다는 이유만으로 과를 선택하는 친구들이 많았어. 심지어 예체능으로 대학에 왔는데도 무용이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워낙 어릴 때부터 하다 보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혹은 부모님이 원해서 오는 친구들도 많았어. 혹시 지금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


- 난 솔직히 지금까지도 많이 후회하거든. 무용으로 4년제 졸업했잖아. 심지어 재수해서 온 거라 그전에 다른 학교에서도 1년을 다녔어. 총 5년을 버린 거야.


만약 내가 그때 사회복지학과를 갔다면, 나는 지금 사회복지사가 됐을 거고 많은 시간과 돈을 아꼈을 거야.


내가 지금 서른을 코 앞에 둔 나이에 다시 대학을 다니고 있잖아...


제발 한 번쯤은 자기 진로를 고민할 때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생각해 봐. 내가 이걸 했을 때 되게 성취감을 얻는다던가 그런 거. 제발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엄마 아빠 말에 휘둘리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했으면 좋겠어.


고등학생이라고 해서 자기 의사 결정권이 없는 거 아니야. 그리고 생각보다 대학교 중요하지 않아. 아예 중요하지 않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너희가 걱정하는 그 정도 아니거든?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대학교에 아무 과나 가지 말고, 이게 직업이 되었을 때 너의 적성과 맞물려서 성취감, 자기 효능감, 자아실현 등 여러 가지로 긍정적인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지가 정말 중요해.



Q. 그래도 무용하면서 한 번도 좋았던 적 없어?

- 있긴 하지. 나는 무대에서 나는 냄새가 좋았어.


공연장 바닥의 고무 냄새, 처음 선 무대에서 느껴지는 낯선 향기에 설렜지.


그리고 내가 살면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한 번이라도 있었다는 거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있었지. 일반인은 무대설 일도 잘 없거니와 내가 언제 이렇게 큰 무대를 서보겠어.


그래도 그 외의 것들이 너무 버거웠어.


엄청나게 무거운 의상, 다이어트, 연습, 하루도 멀쩡한 날 없는 발...


토슈즈를 신으면, 발가락이 숨을 못 쉬는 느낌이야. 안에서 발가락이 다 뭉쳐서 모여있는 느낌이야. 그래서 나중에는 엄청 빨개져있거든? 엄지발가락부터 새끼발가락까지 물집이 다 잡혀있고 새끼발톱이 아예 통째로 빠진 적도 있어.


적응되면 좀 괜찮긴 한데 고통이 덜해지는 게 아니라 맷집이 좋아지는 거야.


엄청 아픈데 참고 계속 신으니까 정신력이 강해지는 거지 고통은 사라지지 않아.


그래서 발레 하는 애들 독하다고 하는 거야.


그리고 발레는 유리한 체형을 타고나야 해. 그렇지 않으면 신체를 변형시켜.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 발등에 고를 내고 무릎을 휘게 만들어.


이상적인 발레리나의 다리. 무릎이 쏙 들어간 X자 다리와 곡선으로 휘어지는 발등



제일 기억에 남는 게 고3 때 의자 위에 다리를 올려서 선생님이 내 무릎 위에 앉아. 그리고 반대편에서 다른 선생님이 내 발등을 바닥 끝까지 눌러.


그러면 무릎이랑 발등이 동시에 펴지는 거야.


그렇게 발등도 무릎도 안 예쁜 데다가 160cm에 39kg까지 뺐는데도 불구하고 상체에 비해서 하체는 조금 통통한 느낌이었어.


최악의 조건이었지.




Q. 그래도 그런 힘든 과정을 견뎌내고 성장하면서 얻은 것도 있지 않아?

- 없어. 그렇게 노력해서 대학을 갔더니 실력이 아니라 교수 마음에 들어야 성적을 잘 받을 수 있는 환경이더라고.


각자 나와서 독무를 하는데 정말 잘하는 친구가 있었거든. 키는 좀 작았는데 테크닉이며 춤이며 다 잘했어.


그런데 어떤 애가 음악을 놓쳐서 중간에 멈추고 턴도 4개나 못 돌았는 데 걔가 A+ 받고 잘 한 친구는 C+ 받았어.


아무리 정답이 없는 분야라고 해도 그런 치명적인 실수를 했는데...


4년 내내 그런 식이었어.


이런 것들 때문에 발레를 시키기 싫은 거야.


비리나 불공평도 있지만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 다 겪어봤으니까... 이거를 굳이 내 자식한테 시키고 싶지 않아. 내가 내 돈 줘가면서 내 자식 무릎을 그렇게 들어가게 하고, 발등에 고를 내고, 발톱이 뽑혀가면서까지 시키고 싶지 않아.


그래서 난 한 번도 발레를 사랑한 적 없어.


그냥 신물 나.



Q. 그렇다면 현재 사회복지 관련 수업이나 활동은 확실한 애정을 가지고 진행하고 있는지

- 나는 시너지를 되게 중요하게 생각한다 했잖아. 약간 오지랖일 수 있는데 나는 남을 도와주면서 보람을 느끼는 게 되게 크거든?


그런 내 성향에서부터 출발했고 공부까지 하게 됐지. 그런데 과목들을 공부하면서 되게 흥미로운 거야.


나 원래 진짜 공부 머리 없거든? 그래서 맨날 밤새고 겨우겨우 시험 치고 그랬는데 사회복지학과에서는 굳이 그렇게 안 해도 내가 흥미를 가지고 학구열이 생기니까 머리에 잘 들어오고 훨씬 쉬운 거야?


그래서 공부하면서 되게 좋았고, 특히 심리학 쪽으로 재밌었어.


또 이번에 제대로 느낀 게 내가 요양병원에서 인턴 수료했잖아. 하면서 되게 힘들었지만 신청하길 정말 잘했다, 이거랑 좀 잘 맞네라고 느낀 점이 되게 많았어.


할머니, 할아버지들 손톱 잘라드리고 같이 대화하는 시간도 즐거웠고 물리치료실 모셔다 드리면서 인사 나누고 그런 시간도 즐겁고...



Q. 현재 사랑에 대한 고민이나 호기심

- 요즘 최대 고민이 그거야.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어떻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서로의 가족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Q. 사랑에 관해 영감을 받은 작품

- 기욤뮈소 책이 있거든.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라는 책인데 영화로도 봤어.


남자의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사랑이 인상적이었어. 우리나라는 그런 말이 있잖아.


"부부는 정으로 산다, 나중에는 다 의리로 산다."


난 그거 되게 싫거든. 영화처럼 끝까지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


매번 설렐 순 없겠지만 왜 사랑에도 종류가 있잖아. 편안한 사랑, 친구 같은 사랑 이런 거 있듯이 나는 매 순간 뜨겁지 않아도 미지근하게 오래오래 온기 있는 사랑을 하고 싶어.




Q. 사랑이 뭘까?

- 사랑은 행복이지.


가족들이 놀이공원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한 명이라도 표정 구기면 안 돼. 눈감아도 안 돼.


물론 부모님 얼굴은 좀 일그러지겠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웃음 나는 순간들이 있는 거거든. 그게 사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