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nner’s Block

달리다가 벽을 만났다

by 깡작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글을 멈추게 만든다.
작가들은 그걸 슬럼프라 부른다.
Writer’s block.
거대한 벽 앞에 서 있는 기분.

요즘 달리기에서 그 벽을 만났다.
몸이 초기화된 느낌이다.
숨은 금방 차고
다리는 말을 듣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모르던 때가 더 좋았다.
러닝화도, 워치도 없던 시절.
그저 뛰기만 해도
하루가 조금 견딜 만해지던 때.
그땐 달리기가 목적이 아니라
도피였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
하루를 견디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
몇 킬로를 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땀이 나고 숨이 차면
그걸로 족했다.

좀 달릴 줄 알게 되자 생각이 많아졌다.
잘 달리고 싶어 졌고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속도, 페이스, 자세, 기록.
달리기보다
달리기에 대한 생각이 앞섰다.
손목의 워치에 점점 더 의지하게 됐다.

잘 쓰려는 글이 한 글자도 못 나가듯,
잘 달리려는 몸은 결코 가볍지 않다.
힘은 더 들어가고 숨은 더 빨리 찬다.

벽에 부딪힌 건
몸이 아니라 잘하려는 욕심인지도 모른다.

작가들이 말하는
슬럼프의 해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잘 쓰려하지 말고 그냥 쓰는 것.
그러다 보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고.

달리기도 비슷하지 않을까.
잘 달리려 하지 말고 그냥 달리는 것.
페이스는 잊고 몸의 흐름에 맡긴 채,
오늘의 몸이 허락하는 만큼만.
생각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그냥 달리기.

더 높은 벽이 되기 전에
오늘은 밖으로 나간다.
러너스 하이는 없고
러너스 다이만 남아 있지만,
그래도 멈추지는 않는다.

완벽한 페이스는 아니어도 괜찮다.
오늘의 몸이 허락한 만큼,
오늘의 호흡이 닿는 데까지.
잘 달리기보다
멈추지 않는 쪽을 택하며
나는 지금도 아주 조금씩
앞으로 가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맞바람 맞고 달려 나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