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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지 Aug 31. 2023

몸이 주는 신호, 나를 사랑하는 시간

대학생아들과 대화하기

/ 션과의 통화 시리즈 /


요즘 션과 긴 통화를 자주 한다. 션이 그날 있었던 일도 이야기하지만 갈수록 자기 생각을 많이 들려준다. 어제도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글로 남기고 싶어졌다. 이런 대화는 훗날 다시 읽으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더 성숙했는지, 생각이 바뀌었는지 알 수 있어서 좋다.


션은 지금 한껏 의욕에 차 있다.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일도 많은데 가능하면 그날 해야 할 일을 그날 하는 습관을 들이려고 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무리하는 날이 생기기도 하고 주말 같은 경우 피곤해서 곯아떨어질 수도 있다.

오늘은 보아의 영상을 보더니 10대에 열정을 불태우고 20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여유롭게 하는 게 너무 멋있다며 션도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쉴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보아는 12살부터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자신은 고등학생 때 좀 열심히 산 거고 그마저도 그렇게 빡세게 산 것도 아니라며 한참 공부량이 뒤지는 것 같다고 했다. 지난 주말에 낮잠이 와서 잤는데 또다시 저녁에 잠이 와서 '이렇게 많이 자면 안 되는데'라는 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아래와 같이 이야기해 주었다.



깡지 :

엄마가 지금까지 프로젝트 많이 했잖아. 프로젝트 한번 시작하면 일이 얼마나 많은 지 알지?

처음에는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 그동안 하고 싶었던 거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프로젝트 끝나고 다음 프로젝트 시작할 때마다 그 사이에 별로 한 게 없더라.

그때 괜히 엄마도 '내가 이렇게 게을렀나' 했거든. 아무것도 한 거 없이 시간이 훅 간거 같아서.


그래서 작전을 바꿨지. 프로젝트를 할 때 뭔가를 하나씩 끼워 넣었어. 안 그래도 바쁜데 그 틈바구니에 하고 싶은 걸 한 가지씩 한 거지. 어차피 바쁜데 조금 더 바쁜 게 대수야 하면서. 너도 봐서 알잖아. 운동을 시작하기도 하고, 책을 잔뜩 읽기도 하고.

일이 많을  때 이렇게 따로 뭔가를 하고 있으면 오히려 스트레스도 풀리고 엄마를 위해 뭔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것 같아서 신기하게 위안도 되더라. 게다가 생산적인 취미 생활을 하면 거기서 소소하게 성취감이 느껴지는 데 이게 또 정신건강에 좋은 거야. 일할 때도 오히려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

그리고 프로젝트 마치고 나면 뭔가 하나 해 놓은 게 생기니까 더 좋았어.


그러다 이 앞 K 프로젝트는 3년이나 한데다, 엄마가 맡은 역할 때문에 이 3년 내내 주말에도 프로젝트 생각이 떠나지 않았거든. 몸은 집에 있으면서 정신은 계속 사무실에 있는 상태였던 거지. 이때 프로젝트 마치고 다음 프로젝트 준비하는 몇 개월 동안 좀 빈둥빈둥하면서 제대로 쉬었는 줄 알았어.  

그런데 그다음 프로젝트 하면서  제주에 갔었잖아. 그때  서울로 출퇴근할 때와 재택근무시간 제외하고 제주에 있는 요일에는 아무도 안 만나고 혼자 있어보면서 올레길도 걷고 책도 읽고 하면서 정말 너무 좋더라고.  


처음에는 한 달, 두 달 만 이렇게 살아도 좋겠다 생각했는데 막상 1년 있다 보니까 그제야 '고갈된 에너지를 이제야 겨우 반 정도 채웠구나'를 알게 됐어.  그동안은 내 에너지를 얼마나 소진했는지조차 몰랐어.

그래서 제주에 1년만 더 있으면 좋겠다 싶었지. 많이 아쉽더라.


엄마가 말해 주고 싶은 건, 네가 평소에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에 주말에 잠이 오거나 피곤함 느끼는 건 당연하다는 거야. 엄마도 그동안 몸이 신호를 준 걸 무시하고 살았던 거고, 제주에 있으면서 충분히 시간이 주어지고 나니, 내 몸이 주는 신호가 보였어.


주말에 느끼는 피곤함을 느끼거나 좀 뭉그적 거리고 싶을 때, '긴장감 놓치면 안 돼', '게을러지면 안 돼'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오히려 '몸'에게 고마워해야 해. 

'아, 길게 가라고 지금 중간중간 쉬게 해 주는구나' 하고 몸이 하자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나중에 몸이 아프거나 마음에 병이 생겨. 몸이 원하는 신호를 읽어내는 게 나를 사랑하는 거야.


엄마도 이전에는 정신력으로 다 이겨낼 수 있다 그리 생각했나 봐. 그런데 몸은 꾸준히 신호를 줬었어. 그걸 무시하고 살았던 거지. 몸이 하는 말을 잘 들어줘. 좀 쉬라고 보내는 신호를 '내가 게을러졌나 보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쉬어줘.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야말로 길게 갈 수 있게 해 주는 거니까.


그리고 무조건 시간을 많이 투자한다고 원하는 목표에 빨리 도착하는 게 아니더라.

'효율적인 시간분배'는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고 집중해야 할 일에 시간을 할애하고 나머지는 단순하게 사는 거야. 이때 휴식이 반드시 필요한데, 친구를 만나도 좋고 취미생활하는 것도 좋지만 하루 10분이라도 명상이나 글쓰기 같은 거 해서 나와 만나는 시간 가지는 게 좋아.


그래야 스스로 돌아보고 나를 사랑하게 되거든.


안 그러면 남과 비교하고 다시 자기를 채찍질하게 돼. 채찍은 맞으면 아프잖아. 참고 맞다 보면 살이 터지고.






션이 "응"이라고 하면서 밝게 전화를 끊는다. 보지 않아도  여전히 하고 싶은 데로 할 것이다.

션은 겨우 스무 살 밖에 되지 않았으니  아직 어리고 젊다. 밤을 새우건, 한동안 고생을 해도 잠을 푹 자는 것만 해도 금방 회복한다.

요즘 션이 나에게 하는 말은 자신의 인생 상담 같기도 하고, 내가 션에게 해 주는 말은 '내가 이십 대로 돌아간다면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를 염두에 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자주 여러 가지를 묻고, 엄마가 하는 말을 잘 듣는 거 보면 션의 생각에 도움이 되고 있구나 싶기도 하다.

내 말이 많은 소수 의견 중 하나일 테지만, 션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면 좋겠다.



https://blog.naver.com/jykang73/223023596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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