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기준이 있다. 물론 내 인생에서 포기할 수 없는 것인 '이거'다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내가 관심이 있고 시간과 돈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은 '그 무언가'가 있다면 내 삶에 있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삶의 가치나 기준은 천천히 바뀌어 온 거 같다.
기본적으로는 성실한 성격이라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책임감을 가지고 해 왔던 거 같고, 이왕 하는 일이라면 '잘'하려는 성향이 강해 성취형 인간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이런 스타일은 에너지를 집중하기 마련이라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비슷한 강도로 임하기보다 나도 모르게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된다.
학창 시절에는 기본적으로 학업에 무게를 두며 좋아했던 취미생활을 조용히 해 왔다면,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내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일'과 '육아'를 다 잘 해내고 싶어 한동안 '나 자신'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일을 잘하고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나'인 줄 알았던 거다.
어려서부터 말랐고 소식을 해서, 부모님이 걱정이 참 많으셨는데 신기한 점은 유제품, 빵을 먹으면 토를 했고 한식을 좋아하며 편식은 하지 않아 감기를 제외하곤 별다른 질병 치례는 없었다. 너무 적게 먹어 키가 작나 했는데 이것도 다행인지 여자들이 대부분 중학교에 성장이 멈추는 반면, 나는 고2, 고3에 키가 커서 거의 170cm 가까이 되었다. 이 키에 몸무게는 46kg 전후였다. 당시에도 이해가 가지 않던 건 여전히 소식을 했었다.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불러 포만감은 충만했으나 부모님은 '새 새끼 모이만큼 먹는다'라며 한 숟가락만 더 먹었으면 하셨던 기억이 있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유제품 거부반응이 봉인 해제되어 우유, 치즈, 버터를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그 덕에 파스타, 피자, 햄버거 등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못 먹는 음식이 없게 되었다.
'건강한 음식'에 대한 개념이 없이 살았지만 돌이켜 보면, 간식으로 과자는 일절 손에도 대지 않았고 김을 구워 먹는 걸 가장 좋아했고 과일을 즐겨 먹었다. 식사를 할 때는 밥보다는 반찬을 골고루 먹었다.
그러다 임신과 출산을 하며 먹는 음식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가 되어서야 '먹거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셈이다. 앞으로도 계속 일을 할 거라서 아이가 태어나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선물이 뭐지? 하고 고민을 하던 중, '모유수유'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션이 19세가 되었으니 벌써 20여 년 전 이야기니까 당시 일터는 여성이 모유수유하는 것이 '낯선 일'을 넘어서서 '극성'이라고 치부되기까지 했던 사회적 분위기였다.
게다가 일 강도가 높은 IT컨설턴트라 모유수유는 전무후무 했다. 어찌 되었건 눈물겨운 노력을 해서 2년간 완모수를 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내가 먹는 먹거리를 신경을 썼다. 임신기간과 수유기간을 합하면 3년인데 아이에게 줄 영양분을 내가 만든다고 생각하니 아무거나 먹을 수가 없는 거다. 집에서야 양질의 재료를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지만 워킹맘이고 매일 야근, 철야니 하루 세끼를 다 바깥에서 해결해야 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건강'한 음식으로 식사를 하려 했다. 아이가 태어나서는 몸에 좋은 음식을 먹이기 위해 온 가족 식단의 재료가 여전히 양질로 이어졌다. 더 다행인 점은 션 식습관이 너무 좋아서, 가리는 음식이 없으며 야채도 너무 잘 먹고 과자는 손에도 안 댄다.
션파 역시 건강과 요리에 관심이 많은 스타일이고 시댁은 원래부터가 건강한 식단으로 사시는 분들이라 우리 집 식사는 다채롭지 않아도 다른 집에 비해 몸에 해로운 음식은 상대적으로 덜 했다.
이리 장황하게 나의 이야기를 적은 이유는, 바로 이 책 [조금씩, 천천히, 자연식물식] 때문이다.
처음에 이 책을 받았을 때는 두툼한 두께에 놀랐지만, 내용은 쉽게 적혀 있겠지, 그래프나 도표가 많은가 보다 그리 생각했다. 표지가 워낙 감수성을 자극하는 예쁜 스타일이라 편하게 책을 펼쳤는데.. 세상에, 백과사전이 따로 없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 시작하는 이의철 교수의 약력은 정말 화려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교수님의 그 많은 타이틀에 대해 납득이 간다. 그저 타이틀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가지고 활동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 서두에 있는 추천서도 다른 책의 몇 배라 갸우뚱했고, Part1 왜 자연식물식인가?를 읽을 때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생각보다 무게감 있는 내용이었으며 육류뿐 아니라 식용유, 살탕, 우유, 유제품, 계란, 고기, 생선 등을 모두 피하라고 하니 '응? 채식주의자로 가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각종 근거자료를 제시하며 한국인의 먹거리의 변화에 따른 질병과 비만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너무 타이트하게 먹거리를 제한하므로 당연히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던 것이 Part2 만성질환의 모든 것, Part 3 자연식물식 실천하기, Part4 자연식물식을 둘러싼 걱정들, Part5 지속 가능한 삶을 읽으면서 책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저자의 삶의 가치에 대해 공감이 되면서 내가 먹어온 먹거리들을 다시금 되짚어 보게도 되었다.
이 두꺼운 책에서 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연 건강식을 하자'다.
자연 건강식이란 가급적 자연 상태의 식물성 식품들을 최대한 가공을 하지 않고 먹는 것이라고 하겠다. 생채식이나 과일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탄수화물도 포함한다.
육류, 생선뿐 아니라 우유까지 제한하는 자연 건강식을 하면 단백질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을까, 성장하는 아이들은 괜찮을 까 등의 여러 의문이 든다. 이런 질문에도 저자는 책에서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고 있다. 다른 모든 궁금증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되지만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자연 건강식을 줬을 때 키가 제대로 자랄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저자는 키가 클수록 암 발생 위험이 증가하니 음식을 통해 남들보다 빨리 억지로 키를 키우게 하지 말고 자연 건강식으로 키도 천천히 크고 사춘기나 초경이 늦게 오게 하여, 유전적 잠재성만큼 키우자고 이야기하므로 '키'에 관심이 많은 부모님들은 선택에 있어 망설일 수 있겠다 싶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완벽한 자연 건강식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친구들에 비해 야채, 과일 (물론 육류, 생선도 좋아했다.)을 즐겨먹고 다른 간식 (과자, 빵, 유제품)은 일절 손에도 대지 않고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발육이 상당히 느렸고, 사춘기도 오는 둥 마는 둥, 초경도 늦었으며 늘그막에 키도 많이 컸다. 나의 경우만을 가지고 이야기 하기에는 '일반화의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나의 성장의 비밀(?)에 대한 설명을 잘해 준 거 같다. 부모님들도 내가 키가 큰 것에 대해 의아해했으니.
몇 해 전부터는 건강을 위해 운동에 관심을 더 가지게 되었다. 내 삶의 가치를 '일'과 '육아'에서 드디어 '나'로 넘어오게 된 시점이지 않은가 한다. 운동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먹거리에 대해 더 찾아보게 되었다. 어떤 음식을 어떤 식으로 먹어야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를 자연스레 찾아보게 되었는데, 이때 키토제닉 식단이나 간헐적 단식 등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유튜브를 보면 이에 대한 정보가 넘쳐날 정도인데, 저자의 책을 읽다 보니 단편적 지식으로 이것이 진리인 것처럼 알려주는 정보들이 많았구나 싶다. 운동을 하는 이유는 건강이지만 다이어트는 항상 동반이 된다. 아무래도 운동량이 부족하거나 음식의 질에 따라 불필요한 지방층이 쌓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운동 트레이너들이나 다이어트에 성공한 분들이 자신의 비법을 소개하면서 매번 등장하는 것이 '인슐린 저항성'이다. 우리 몸이 최적의 건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혈당조절 및 다양한 기능을 하는 인슐린이 적절 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하는데 현대인들은 인슐린이 필요 이상 분비되는 경우가 많다. 인슐린 저항성은 혈당을 조절하기 위해 더 많은 인슐린이 필요해진 상태, 즉 몸 안의 세포들에 인슐린에 대한 내성이 생기면서 더 많은 인슐린이 필요해진 상태를 뜻한다. 이런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대사증후군이 생기게 된다. 유튜버나 블로그에서는 유행처럼 이런 인슐린 저항성을 낮추기 위해서는 탄수화물을 제한해야 하며 단백질, 지방으로 식단을 채우라고 한다. 실제 의학 전문가들은 그 원인이 명확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데 말이다. 식이섬유, 항산화물질을 섭취할 수 있는 탄수화물을 제한할 것이 아니라 설탕 및 액상과당 같은 정제된 당분을 제한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사실 내 맘을 마지막까지 사로잡은 챕터는 Part 5 지속 가능한 삶이다.
내 삶의 가치가 '일', '육아'에서 '나'로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도 내 아들은 고등학생이므로 부모로서 역할은 끝나지 않았으므로 '나'로 넘어왔다는 삶의 가치는 이제 시작이라고 봐야겠다. 아이를 키우며,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며 조금씩 나도 생각하게 되는 부분은 사회적 문제나 미래다. 환경문제도 그중 하나로 미래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나부터 지금 당장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차 든다. 바로 이 part 5가 그런 주제를 다룬다. 삶에 대한 태도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게 만들어 준다. 음식에서 벗어나서 기본적인 사람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생각거리, 그리고 지구를 위해 현명한 소비 선택을 하게 말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방대한 정보에 감탄을 했는데 맨 뒤 참고문헌을 보고 말문을 잃었다.
이 책 한 권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논문과 자료를 찾아보셨는지..
처음 편하게 누워 읽다가 마지막엔 책상에서 정독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평소 궁금했던 내용을 이리 상세히 차근차근 풀어준 저자에게 감사하다.
건강도 중요하지만, 내 입이 즐거운 식단 역시 중요한지라, 저자가 말하는 '자연 건강식'을 철저하게 따르지는 못할 듯하다. 하지만, 해로운 음식은 더 멀리 할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