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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지 Mar 13. 2022

어느 길로 가도 정상이더라

길에서 느끼다, 원물오름

제주의 자연은 하나로 규정하기 힘들다. 사계절이 다 다르고, 동서남북이 다 다르다. 어떤 오름은 푸르름을 자랑하나 어떤 오름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겨울의 오름은 퍼석퍼석하기 짝이 없으나, 곶자왈에 가면 그 작은 이끼들이 녹음을 뽐내고 있다.


낯선 곳을 홀로 걷는 기쁨을 알게 된 후로, 틈나면 어디론가 가고 싶긴 한데 문제는 방향감각이 심각하게 없다.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내 자리 찾아가기도 힘들어할 정도니 말 다했다.

그러면서도 제주 올레길 완주했다는 것은 나에게 큰 훈장이나 다름이 없다.


운전도 못하다 보니, 유명하다는 곳은  못 가겠고 지도를 찾아보니 원물 오름이 있어 가 봤다.

지도는 길이 간단했는데, 막상 가보니 길인 것 같으나 지나가기 힘들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아서, 메마른 오름 그 자체였기 때문에 마른 가지들이 잔뜩 있었고, 내 허리 정도까지 오는 가시나무들이 즐비하다.

길을 막지 않았으면 좋겠으나 마른 나뭇가지들과 가시나무들이 종종 앞을 막고 있어서 옷에 걸리기 일수였고, 키 작은 나무가 떡하니 길을 막고 있다.


한 명 겨우 지나갈 것 같은 좁은 산길인데 웬 갈래길은 이리 많은지 어느 길로 가야 하나 고심하다가 어차피 곳곳에서 길을 막아대는 키 작은 나무, 가시나무 때문에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갈 수밖에 없었다.


길을 잃으면 어쩌지 싶다가도 작은 오름이고, 나무들이 모조리 키가 작아 시야를 막지는 않아서 위로 위로 올라갔다.


정상에 오르니, 시야가 탁 트이면서 주변 경관이 보인다. 눈앞 장애물만 집중해서 헤쳐 오르다가 갑자기 벌판이 있고, 멀리까지 보이는 시원한 풍광이 펼쳐지니 이 작은 오름이 주는 큰 선물인 것 같았다.


올라오는 내내 이 길이 맞나, 어느 갈래길로 가야 하나 의심을 품었는데, 다 올라오고 보니 어떤 길로 가도 '정상'이었다.

나보다 앞서 온 누군가가 길이 막혀 있으니 옆으로 비켜 갔고, 그렇게 한 두 명이 땅을 밟다 보니 또 작은 샛길이 만들어진 건가 보다.

어떤 길은 돌아갈 수도 있고, 어떤 길은 지름길 일 수 있으나, '이 작은 오름 뭐 볼 거 있다고 이 고생이람'하고 돌아갔다면 평생 보지 못할 멋진 풍광과 시원한 바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겨우 20분 남짓한 정상에 오르는 이 길이, 우리 인생과 닮았다.

어느 길로 가건, 위로만 올라가면 정상에 닿는구나.

비록 둘러가기도 하고, 가시가 내 옷을 잡아끌어도 그냥 가기만 하면 정상이구나.


이렇게 오늘도 길이 나에게 가르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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