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둘레길이 좋다는 소리를 들어서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야 단풍이 고운 가을에 가고 싶었으나 시간의 자유가 아직은 허락하지 않는 직장인이므로 '갈 수 있을 때 가보자' 싶어서 2월 말 어느 날 짬을 내어 길을 나섰다.
며칠 전 제주에 눈이 와서 한라산에는 눈이 쌓였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으나, 겨울산을 가본 적이 처음인 데다 제주 한라산을 가보는 건 더 희귀한 일이라 어느 정도 쌓였는지도 몰랐고 지금은 날이 풀려 별생각 없이 한라산을 향했다.
그런데 이런, 분명 반짝반짝 봄이 온 듯한 날씨였는데, 한라산에 가까이 가니 눈 덮인 도로와 나무들이 나타났으며 사람들의 옷차림도 두툼한 패딩에 중무장한 모습이다.
반면 나는 얇은 옷 서너 겹 정도 껴입은 가벼운 옷차림에 겨울산과 거리가 먼 해맑고 무지한 자연인이었다.
도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다시 오기 힘들겠다 싶어 호기롭게 출발하기로 했다.
한라산 등반하는 것도 아니고 말 그래도 '둘레길' 아닌가.
다행히 바람이 없는 날이라 춥지는 않았다.
걱정도 잠시, 아름다운 순백의 산길을 걸어가다 보니 저절로 흥이 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시작부터 물 웅덩이에 빠져, 바지며 신발이며 다 젖었다. 무릎을 넘기는 깊이의 물웅덩이 위로 살얼음과 눈이 덮여 있어서 길인 줄 알았다. 눈 쌓인 풍경이 좋아 옆 길로 두세 발자국 샌 것이 겨울 물벼락 받게 했다.
무식한 탓에 용감할 수 있어서 양말 꼬옥 짜고 탈탈 턴 다음 길을 계속 가기로 했다.
그렇게 걸어가는 한라산 둘레길은 겨울 산행에 초행인 나로서는 얼음왕국 같았다.
아무도 없는 이 아름다운 길을 온전히 나 혼자 차지한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시시각각 바뀌는 나무들 덕에 심심할 틈이 없다. 마치 뮤직비디오 장면이 바뀌듯 하얀 옷을 입었으나 새로운 나무들이 자꾸만 인사를 한다.
한참을 가다 보니, 길이 헷갈린다. 혹시나 하고 지도 앱을 켜 두었고 군데군데 묶여 있는 길안내 리본을 보며 가고 있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 조금 헷갈리는 곳이 나온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누군가의 발자국이 있다. 그 발자국을 쫓아가니 다시 길이 연결된다. 가끔 다른 생각을 할 때도 눈길에 희미하게 남겨진 발자국이 지도 앱보다 더 촘촘하게 방향을 알려준다.
눈길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누군가의 발자취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회에서 처음 했던 일이 우려했던 것보다 쉬웠을 때, 누군가가 이미 그 길을 닦아놓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그리고 내가 힘들게 했던 일은 이다음 누군가가 이 일을 할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