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깡지 Mar 20. 2022

엇나갈 수 없는 길

길에서 느끼다, 한라산둘레길-동백길

한라산 둘레길 2코스 돌오름길을 걷고 나서 슬그머니 욕심이 생겨서 4코스 동백길을 걷기로 했다. 봄이 되면 좀 더 파릇파릇한 초록이들을 볼 수 있을 텐데, 시간이 마냥 나를 위해 기다려주지 않을 듯하여 길을 나선 것이다.


4코스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성지였던 무오법정사와 4.3 역사를 간직한 주둔소, 화전민 터, 동백나무와 편백나무 군락지, 범벅이 오름, 어점이 오름 등을 지난다. 이중 동백나무는 전체 20km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고 들었다.


입구에는 역시나 2시 이후 입산금지라고 적혀 있다.

걸어보니, 비교적 평이했던 둘레길 2코스, 평지였던 3코스와 달리, 4코스는 나름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으며, 무엇보다 돌이 많은 길이었다. 운동화 신고 오면 발목이 제법 아플 듯싶다.


가장 큰 특징은 하천이 많다. 길을 가다 하천을 만나고, 또 길을 가다 하천을 만나는데 제주도 하천이 그러하듯 대부분 말라 있다. 일부 물이 고여 있긴 하지만 육지에서 만나는 맑은 물이 아니라 낙엽이 고여 그런 건지 어둑어둑하다.

비가 오면 하천이 범람한다고 주의 간판이 곳곳에 있다. 비가 온 직후는 많이 미끄러울 것 같다.

며칠 전 눈이 왔을 때 왔다면 아마도 고생 꽤나 했을 듯싶다. 다행히 그 사이 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무렵 다른 오름을 가 보면 바싹 마른 나뭇가지들을 볼 수 있는데, 곶자왈과 한라산은 역시 푸르름을 품고 있다. 습도도 제법 있어서 버섯 재배도 많이 하는 듯하고 양치식물도 만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동백길'인데 동백꽃이 다 진지 오래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계절 맞춰 오면 참으로 아름다울 듯하다.

의외로 횡재한 것은.. 편백나무 군락이다. 이렇게 아름다리 편백나무를 본 건 처음인 것 같다. 그것도 수백 그루. 숲에 온 느낌 제대로다.


동백길이라고 하나, 동백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걸음걸음마다 나무들이 바뀐다. 역시나 이름은 모르고 걷고 있지만, 이름이 뭐가 중요하라. 계속해서 나무들이 바뀌다 보니 지루할 틈이 없고 눈이 호강한다.


워낙 방향감각이 없어 이렇게 처음 가는 길을 갈 때 항상 지도 앱을 켜서 보고 걷는다. 그런데 동백길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길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길 따라 나무에 끈이 일일이 묶어져 있다. 밧줄 따라 걷기만 하면 되어서 길 잃어버리는 법 없이 편하게 잘 갔다.

제주도 올레길, 서울 둘레길을 걸을 때 갈래길이 나오거나 길이 희미해지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지도 앱을 봤고, 실수로 엉뚱한 길로 들어서서 다시 되돌아온 적도 있었다.

이렇게 방향을 고민하지 않고 걸은 길은 처음인 듯하다. 


그간 걸었던 길에서는 여기저기 기웃 거리며 걷다가 처음 보는 꽃이나 멋진 나무가 있으면 슬쩍 길에서 벗어나기도 했고, 높은 곳을 걷다가 경치 좋은 곳이 나오면 잠시 그 근처를 돌아다니며 쉬기도 했다.

그렇게 눈도장 찍으며 기억의 서랍에 추억 몇 자락 고이 넣어뒀다.

그런데  동백길을 걸을 때는, 내내 안내해 준 끈 덕분에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끈이 자연과 나 사이에 마음의 경계가 되었을까? 그 울타리 안에서만 머물렀다.


동백길의 안내를 위한 끈을 따라 걷다 보니,  편하고 익숙한 것만 찾으려 하는 삶이 떠오른다. 괜히 엇나갈 수 없는 길을 만들어 놓고 한눈팔지 말고 이 길만 걸어가라고 말해 주는 것 같다.

간사하게도 편하다고 느끼면서도 괜히 아쉬운 마음도 슬그머니 생긴다.


길에서 잠시 벗어나 봐야 들풀도 보이고, 나무도 보이고, 바깥 경치도 보이는데..

다음에 동백길을 다시 걸을 때는 조금씩 엇나가 보련다.

 



매거진의 이전글 앞선 발자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