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면 많이들 우울해한다. 그런데, 나는 앞자리가 3, 4로 바뀌었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너무 정신없이 살던 때고 신경 쓸 일이 많아서다.
하지만 무의식에서는 본능적으로 50세를 위한 마음의 준비했나 보다.
주변의 50대, 60대를 보며 '나는 저 나이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를 상상했던 것 같다.
초라해지고 싶지는 않고 은근한 멋이 있었으면 했다.
나이가 든 분 중 돈이 있는 분은 있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시는 분은 찾기 힘들다.
나에게 '은근한 멋'이란,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힘'이다.
'좋아하는 것'에는 '일'도 들어간다. '일'과 나의 '생활'을 따로 떼어내서 '독립'을 외치기에는 나의 인생 대부분을 일터에서 보냈으므로 그 시간도 소중하다. 일이 지긋지긋할 때도 있지만, 일에 미련을 버리는 훈련도 필요할 정도로 내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버렸다.
눈가 주름, 깊어지는 팔자 주름, 그리고 여기저기 보이는 흰머리와도 더 친해질 자신도 있지만, 눈빛은 탁해지지 않고 싶었다.
가끔 70, 80대 인데도 눈빛에 총기가 어리신 분들을 본다. 연륜이 쌓이셔서 사람들에 대한 이해는 넓게 하시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여전히 찾아 하시는 분들이다. 이분들 가만히 보면 눈빛이 여전히 반짝반짝하다.
젊을 때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눈빛이라 티가 나지 않다가, 나이가 들면서 그 빛이 하나둘씩 꺼지다 보니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으신 분들 간혹 뵈면 반갑다.
젊은 시절의 외모는 어차피 나이가 들면 사라진다. 하지만, 눈빛을 잃지 않고 자신감이 있으면서 마음이 너그러운 분들의 미소는 갈수록 아름다워진다.
아이가 태어나면 성별을 구별하기 어렵다. 나이가 들면 다시금 성별을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아이들의 미소는 성별을 떠나 닮아 있고, 노인들의 처진 입꼬리도 성별을 떠나 닮았다.
나이가 들었을 때 미소의 원천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 슬며시 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부처님의 자애로운 미소, 성모 마리아의 미소가 아름다운 줄 몰랐다. 이제는 선남선녀의 해사한 미소보다, 화가들이 그렇게 표현하려 애를 쓴 그런 은은한 미소에 눈이 자꾸만 간다. 매일 조금씩 짓는 미소가 쌓이고 쌓이면 그런 은은한 미소와 닮아있을 것만 같다.
30대, 40대 중반까지만 해도, 숨 가쁘게 바쁜 날이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였고 10년 후도 이렇게 일과 육아에 매몰되어 살 것만 같더니 어느 순간 조금씩 길이 보이는 듯했다.
내가 걸어온 길을 걷고 있는 부모들을 보면 힘내라고, 잘하고 있다고 도닥여 주고 싶다. 끝날 거 같지 않는 날의 끝이 곧 오니까. 나에게도 누가 이런 말 해 줬다면 좋았을 텐데 그저 코 앞만 보고 달리고 넘어지고를 반복했다.
40대를 보내고, 드디어 49세가 되었을 때, 다행히 내 나이가 참 예뻐 보였다. 40대도 10년 간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면서 하고 싶은 걸 미루고 살긴 했으나 그래도 이루어 놓은 것도 있으니 더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이루어 놓은 것의 의미는, 흔히 말하는 사회적 성공이나 부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에 대한 책임감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그래도 꽤 열심히 살았다. 점차 일과 육아에서 '나'에게 무게중심을 옮겨가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50세가 되었을 때 무척 반가웠다. 숨 가쁘게 살았던 40대를 마감하고 50대부터는 천천히 쉬어가며, 조금 더 나에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도 되었다. 앞으로는 '마감'이나 '납기일'없는 인생이 시작되겠구나 하며 50세를 시작했다.
무엇보다 50세를 기쁘게 맞이할 줄 알게 된 나 자신이 대견했고, 앞으로 50대는 내가 또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아이도 컸으므로 그만큼 여유가 생겨서 50대, 60대는 하고 싶었던 것들을 천천히 하나씩 하면 재미있겠다 싶기도 하고, 설사 새로 무언가를 안 해도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어떻게 무르익을까도 궁금했다.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吾十有五而志于學(오십 유오이지우학)],
30세에 뜻을 세웠으며 [三十而立(삼십이립)],
40세에는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어졌고 [四十而不惑(사십이 불 혹)],
50세에는 하늘의 뜻을 알았고 [五十而知天命(오 십이지천명)],
60세에는 귀가 순해졌고 [六十而耳順(육십이 이순)],
70세에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칠십 이종심소욕 불유구)].”
학창 시절 처음 접했던 공자님의 말씀을 지금까지 수차례 접할 때마다 무덤덤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은 이 말씀을 자꾸 곱씹게 된다.
공자님은 40세가 불혹이라고 말씀하셨으나, 나는 50세가 되어서야 겨우 불혹의 끄트러미에 도착했나 싶다. 일을 계속해야 하나, 이 선택이 옳은가, 이 길이 최선인가, 저 길로 가볼까, 지난번 선택이 잘못된 건가,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저 말의 의도는 뭘까, 나도 좀 쉬고 싶다. 등의 생각이 가끔씩 튀어나왔다.
일하는 사람, 아이 키우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는 그런 생각들이다.
그런 흔들림과 유혹에서 이제 겨우 중심을 잡게 되었으니 때늦은 불혹이다.
40대 언젠가부터, 명품을 살 것이 아니라, 내가 '명품'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몸매가 예쁘면 아무 옷을 걸쳐도 옷태가 날 테고, 피부가 깨끗하면 화장을 하지 않아도 빛을 날 것이며, 책을 많이 읽으면 교양이 쌓여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떤 선택을 할지 고민할 시간에 방법을 찾고 실천을 해 나가면 뭔가 되어 있겠지 생각했다. 이게 내가 생각한 '어설픈 명품'이었다.
그런데 명품가방, 명품시계도 진정한 명품이 아니라 '과시를 위한 고가품에 불과하구나'를 갈수록 느낀다.
명품은 '오랜 기간 사람들에게 가치를 인정받은 고급품'이다. 그러나 실제 명품 브랜드를 들여다보면, 하나를 고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유행처럼 지나치거나 싫증이 나는 물건이 많다.
그렇게 세상을 다시 쳐다보니 아무나 '명품'이 되는 게 아니었다. 진짜 명품이 되려면 내면에서 풍기는 향기가 공기를 감싸야하는데, 그런 분은 따로 있다는 것을 책에서 자꾸 배우게 된다. 지금은 '내가 명품이 되면 되지'라는 거한 생각보다, 언제 만나도 '너 여전하구나'라는 말을 계속 듣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올해도 벌써 한 달이 흘렀다. 항상 그렇듯 큰 목표 없이 시작해도 조금은 성장해 왔으므로 하루치 행복에 집중하려 한다. 지금까지 내가 거쳐온 그 어떤 나이대보다 오늘, 찰나의 행복을 제대로 느낄 나이대일 듯하다.
공자님은 50세에 지천명에 도달했으나, 나는 60세나 70세도 좋으니 언젠가 하늘의 뜻을 깨달으면 좋겠다.
천천히 현실에 순응하고 맞춰가며 오늘의 하루는 성실히 살되, 나의 즐거움을 찾아다니고, 나의 내면을 다듬어 나가면 지천명, 이순, 희수, 미수에 순서대로 다가가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