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나 동생이 아니라 엄마가 옷을 탐내냐고 물으니, "몰라, 괜히 내 옷 입어보고 그래, 샘내는 거 같기도 하고"라고 했다.
그냥 스쳐 지나간 대화였으나, 동생이 언니 옷 입어보고, 딸이 엄마 옷 입어보는 경우는 봤어도 그 반대는 보지 못해서 그런가, 아직도 기억하는 거 보니 그때 꽤나 신기했나 보다.
남자 형제만 있는 데다, 나와 엄마와는 서로의 옷에 대해 그리 관심이 없어서 더 신기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엄마가 딸을 샘내다니?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대학생 때 "너 이 옷 입고 오면 속이 부글부글 해(예뻐서), 이 옷 언제 안 입고 오나 그랬다니까"라고 말한 친구도 떠오른다. 이 친구의 말도 이해를 못 했다.
이상하다. 친한 친구 사이인데 내 옷차림에 왜 부글부글 하지? 이 정도 생각했나 보다.
아기들도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고 한다. 나 역시 예쁜 사람을 보는 거 좋아한다. 혹시 누가 신경 써서 입고 오면 꼭 아는 척을 해 준다. 오늘 예뻐 보이고 달라 보인다고.
예쁜 사람을 보거나, 누군가 예쁜 옷을 입어도 질투나 샘이 안 났다.
사회 초년병 시절, 나보다 두 살 많은 직장 동료 언니와 옷을 사러 갔다. 그날은 특별한 할인 행사날로 엄청나게 많은 옷들이 쌓여 있어 도무지 어떤 걸 골라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내 앞에 쌓여 있던 옷 중 괜찮아 보이는 바지 두 벌 골랐다.
대충 고르고 언니 쇼핑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언제 가냐고 하니 "너 혼자 예쁜 거 싹쓸이 했잖아"라며 내가 고른 바지와 똑같은 바지 두 벌을 고른다.
음.. 이 넓은 곳에 수만 수천벌의 예쁜 옷이 쌓여 있고, 돌아다니기 귀찮아서 내 눈앞에서만 골랐을 뿐인데.
내가 고른 게 예뻐 보였나 보다 그리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 어떤 프로젝트를 하러 해당 기업으로 출퇴근을 한 적이 있다. 이곳은 보안 때문에 외부와 차단된 곳에서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구내식당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우연히 대학 친구를 다시 만났다. 너무 반가워 서로 안부를 묻던 중, 난데없이 "다 (너) 쳐다보네, 나도 머리 자르지 말걸"이라고 말한다.
응? 사람들이 나 쳐다봤나? 그런데 웬 머리? 내 머리가 길어서 쳐다본 건가?
둔한 나는 친구의 뜬금없는 말을 이해를 못 했다.
결혼 후 친척 동생 한 명과 한 때 친하게 지냈다.
이런저런 수다를 제법 많이 떨었는데, 연예인 누가 참 예쁘더라 이야기만 하면 어디를 고쳤다고 이야기한다. 아, 그랬구나 하다가 매번 기승전 성형으로 끝나길래, 자연미인을 유달리 좋아하나 보다 했다. 그래도 고친다고 다 예쁜 거 아니기도 하고 나로서는 관심 없는 정보라서 그만 들었음 했다.
몇 해 후,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그 동생이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언니 코 수술한 코인줄 알았는데? 아니었어?"라고 한다. 그때 알았다. 연예인이 성형을 했다는 말이 알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예쁜 여자를 보면 그냥 습관적으로 고쳤다는 말을 해 온 것이다.
그리고 내 코에 대해서도 누가 예쁘다고 말했다면 "저 언니 코 성형했잖아"라고 말했겠구나도 싶기도 했다.
뭐, 내 코가 그 정도로 예쁜 코구나 하고 기분 좋게 들었다.
딱히 누군가를 부러워한 적이 없는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직접 겪어본 시기나 질투는 어이없게도 저 정도가 다다.
자매가 많은 집들 이야기 들으면 시트콤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옷이나 화장품뿐 아니라 남자친구, 남편, 아이 비교까지 장난 아니어서다.
나는 남자 형제 밖에 없었고, 일터에 가면 대부분 남자들이어서 그런가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나도 충분히 비교할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아무리 돌이켜 봐도 누군가를 보고 질투를 해 본 기억이 없다.
가지고 있는 게 많아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없는 것을 누군가 가지고 있을 때도 그랬다.
가지고 싶다면 노력해 보고,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와 좋겠다'로 끝났다.
내가 질투라는 걸 해 보지 않아서 직접적으로 받아본 질투도 많지 않았을 수 있다.
어쩔 때는 내가 생각해도 희한해서 사람이 기본적으로 가져할 감정 중 몇 가지를 덜 가지고 있나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아이 키울 때도 다른 집을 부러워해 본 적이 거의 없으니.
외모 이야기로 돌아오자.
딱히 외모에는 관심이 없으나 (이상한 소리같기도 하다. 예쁜 옷 좋아하는 것만 봐도 관심 많아 보이는데 관심이 없다니? 그런데 관심이 없는 게 맞다. 옷은 우표수집 같은 것이라, 언젠가 이 주제로 글을 쓸 것 같다.) 다른 것에는 욕심이 많다. 새롭게 배우는 걸 은근히 즐기는 것이 그 예이다. 아마 그래서 책을 즐겨 하나는 것일 수도 있다. 책은 매번 새로움을 안겨다 주니까.
션 태어나고 일도 많고 하다 보니 정신없이 살아서 세수도 못하고 지쳐 잠든 날이 많다 보니 외모관리는 커녕, 어느 날 이렇게 살다가는 피부가 썩겠다 싶은 적은 있었다. 대략 삼십 대 중반부터는 외모는 아예 잊고 살았나 보다.
TV에서 그리 아름다웠던 연예인들의 나이 듦을 지켜보면서 진짜 美에 눈을 뜨기 시작해서이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 젊음을 붙들려는 분 보다, 지혜를 장착한 주름진 얼굴이 너무 예뻐 보이더니 젊고 탱탱한 이십 대의 풋풋한 아름다움까지도 초월해 보이기 시작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저런 거구나'를 무의식 중에 깨닫기 시작했다.
점차 남녀를 떠나서 아름다운 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자처럼 보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특히 아름다운 할아버지들이 참 많다. )
그때 외모에 대한 관심을 아예 버렸던 것 같다.
어쩌면 앞으로 올'나이 듦'에 대한 백신주사를 놓은 것일 수 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너무 움켜쥐고 살면 잃었을 때 상실감이 크다.
얼마 전 친척분이 오랜만에 귀국을 하셨다. 대략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뵙게 된 것 같다.
그 사이 나는 오십이 되었고 이분은 예순 중반이 되었으며 손주가 태어났다.
가족들 모여 외식을 하게 되어서 사무실에 즐겨 입고 가던 블랙 원피스 입고 갔다.
나를 보시더니 연신 예쁘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면서 "나도 예전에 그랬는데..(젊었는데)"하며 아쉬워하신다.
내가 예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당신의 과거가 그리운 것이었다.
아직도 곧고 가는 다리가 예쁘다고 말씀드렸더니 함박웃음 지어 보이신다.
나도 농담 삼아 나 스스로에 대해 '동급최강'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리 말해 놓고 쭈글 해져서 치사하게 조건을 하나 더 붙인다.
일반인 중 동급최강.
그런데 진짜 동급최강이 되고 싶은 건 '내면의 아름다움, 내면의 향기'다.
우아한 척, 고상한 척, 지혜로운 척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이와 익숙해지는 건 매년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을 보기보다 훨씬 더 젊은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나이를 싫어한다. 마음은 여전히 이십 대, 삼십 대이고 싶은데 거울 속 나와 내 나이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과거를 그리워한다. 좀 더 젊었고 좀 더 기회가 많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내면이 아름다우려면, 타고나지 않은 이상 '세월'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면에 집중하면 나이 드는 것이 반가워진다.
나보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으면, 나는 '아니요!'다.
그동안 충분히 열심히 살았고, 내 선택에 대해 충분히 책임을 졌고, 충분히 행복했다.
나는 '오늘'이 좋다.
오늘 실수를 해도, 실패를 해도 이것이 좋은 거름이 된다는 것도 배웠다.
그리고 오늘 충실히 보냈건 아니었건, 미련이 없다. '내일'이 또 오니까.
내일이 안 와도 좋다. 오늘까지 제법 내면의 향기를 채워왔으니까.
일찌감치 저리 생각해서 그런가,
이전 사진 보면 지금보다 훨씬 젊고 예쁘지만 '"나도 예전에..." 이런 생각해 본 적이 없다.
20대, 30대, 40대를 봐도 그저 예뻐 보이지 부럽거나 하지 않다.
반면, 나이 불문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을 보면 부럽다.
어디서 저런 '아름다움'을 가졌는지 가까이 있으면 그 향기가 조금이라도 묻을 수 있을까 그리 생각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