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에세이
'버티기'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하니 언젠가 비슷한 글을 쓴 적이 있었던 것 같아서 찾아보니 <우리는 모두 각자의 별에서 빛난다>, <멘털의 연금술>에서 언급을 했다. 리뷰를 쓸 때 나의 경험이나 감정을 꽤 녹아 넣을 때가 있다. 작년에서 올해 '버티기의 힘'을 느껴서 아마도 책을 읽으며 공감하는 내용이 있어서 리뷰에도 적었던 것 같다.
(두 리뷰 모두 읽을 만한 글 같아서 링크)
https://blog.naver.com/jykang73/222732003027
https://blog.naver.com/jykang73/222526690018
40대 초중반이었을 때 어느 날 주위를 둘러보니, 그렇지 않아도 많지 않았던 현장에서 발로 뛰는 여성 컨설턴트가 거의 사라졌다. IT컨설팅 회사들이 주기적으로 흥망성쇠를 하기도 하고, 남녀를 떠나서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면 PM급을 제외하면 현장에서 떠나는 경향이 커서다. 다른 기업체로 가기도 하고, 컨설팅 회사의 파트너 이상으로 올라가서 프로젝트를 직접 한다기보다 관리자로 역할을 바꾼다. 경험이 많고 일을 잘하는 사람들일수록 현장에 남아 계속 컨설팅을 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어지고 그 자리를 다음 후배들로 채우게 된다.
컨설턴트들의 삶이 꽤나 고달파서 여자 컨설턴트들은 가정, 특히 육아와 병행하기에는 최악의 직업이다 보니 현장에 남는 경우는 정말 희귀하다.
나 역시 어떤 길로 가야 하나 기로에서 결정한 것은 '동업자와 공동법인을 내고 현장에서 계속 일하는 것'이라는 낯선 길을 걷기로 했다. 영업도, 경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순진하게도 '실력' 하나만을 가지고 시장에 뛰어들었다. 대형 컨설팅사, SI업체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진심과 실력'이고 이게 곧 '영업'이다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회사를 운영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생각이 순진함을 넘어서서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을 안다. 회사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일에 몰입하는 것이 '게으름의 일종'임을 알고 있어서 마음이 어지러울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사업, 경영, 확장을 생각하기보다 '일 자체'만 생각하는 것이 훨씬 편해서다.
그래도 운이 좋아서 계속 프로젝트 계약이 성사되어 왔고, 프로젝트를 할 때는 소수 인력으로 존재감을 제법 드러냈고, 고객들의 피드백이 좋아서 '순진함의 승리'가 된 셈이라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감탄을 한다. 포도주 한 잔에도 얼마나 감탄을 하며 마시던지 마치 라면광고를 보듯 나도 조르바에게 포도주 한 잔 달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얼마 전부터 나 역시 일상에서 '감탄'을 자꾸 하고 있다. 그중 '일에서 버티기'에 대한 감탄은 그 빈도수가 점점 잦아진다.
남들이 가는 길로 가지 않고 현장에서 일하는 길로 간 것은 재미는 있으나 고충도 있다. 가장 큰 고충은 일 하는데 절대시간을 많이 빼앗긴다는 점과 일하지 않을 때(퇴근 후, 주말)도 의식의 흐름 속에 '일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중간 나타나는 소소한 '성취', '재미'가 마약 같다.
여성 컨설턴트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후 다시 7,8년이 흘렸다. 컨설팅 경력도 쌓일 만큼 쌓였고 나이도 제법 들었다. 이제는 프로젝트를 바라볼 때 문제점이 바로 보인다. 이걸 남들은 '촉'이 발달된 것 같다고들 한다.
'좀 이상한데'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부를 들여다보면 어김없이 증거들이 드러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다시 시사점과 해결방안을 정리해서 고객사 임원과 프로젝트 관계자들에게 전달을 하면 공감을 하시며 중요한 안건으로 수용해 주신다.
<레버리지>에서는 이를 '일의 복리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오래 일할수록 일을 덜하게 된다는 것인데, 정말 실감하고 있다. '버티기'는 '일의 복리의 법칙'으로 이어진다.
최든 들어서 새로운 사업 모형에 대한 제안도 받게 되었다. 2년 전 첫 번째 변화의 기회가 있었으나 외부 환경 변화로 흐지부지 되었고 지금 다시 또 비슷한 기회가 왔다. 실제로 구체화하기까지는 고비가 많을 테고 다시 어느 단계에서 벽에 부딪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제안은 우리가 먼저 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의의가 크다.
설사 이번 제안이 현실화되지 않아도 우리 입장에서는 바뀌는 것이 없으므로 본전인 셈이다.
(궁금하다. 과연 '현실화'될 것인지, 그리고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인지)
그런데 이 기회가 그냥 온 것이 아니다. 프로젝트를 할 때 우리를 지켜본 결과 우리 회사의 가치를 인정받아서였다.
일을 대충 했다면, 일을 포기했다면, 이런 제안 자체를 받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버티기'가 가져다준 선물이다.
'버티기'의 의미는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대충 하면서 시간만 때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힘든 상황이 와도 극복하고 이겨낸 '버티기'를 말한다.
컨설팅 생활을 오래 했다. 초중후반으로 나눠봤을 때 나에게 찾아온 '기회'의 종류는 달랐다.
초반은 소위 말하는 스카우트 제의라면 후반으로 갈수록 '사업'의 기회고 그 형태는 점차 다양해져 가고 있다.
은퇴를 한 많은 분들을 지켜보며 어느 날 갑자기 일을 관두고 나서 공허함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을 많이 봤다.
평생 버티기를 하신 분들이다. 그런데 버티기의 끝에 오는 공허함은 그리 반갑지가 않았다. 나의 일터에서의 버티기는 어느 날 하루아침에 칼 같이 싹둑 잘라내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non 파이어족을 꿈꾼다>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지금도 '어렴풋한 바람'이 계속 생기고 있다. 막연히 '이러면 어떨까'로 시작해서 생각을 조금씩 얹어보고 실천도 해 보면서 한두 가지는 구체적인 꿈이 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지금 하고 있는 취미생활을 더 발전시켜서 서서히 나의 일을 줄이고 그 자리를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일은 어느 날 단칼에 완전히 끊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일하는 것에서 경험을 나누고 공유하는 형태로 바꾸려고 한다. <클린 애자일, Clean Agile>을 읽었을 때 70대 노장이 쓴 책이라는 것을 알고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는 70대 IT현직 종사자의 책은 없다. 미국보다 IT역사도 짧지만 사회 구조상 그 나이까지 현장에 남아있지 않아서가 가장 큰 이유다. '나의 경험을 나누는 것도 또 하나의 사회 환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더 나이가 들었을 때 IT경험을 나눌 수 있을까'가 지금의 '어렴풋한 바람' 중 하나다.
<멘털의 연금술> 리뷰에서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다.
"언젠가 아들에게 해 준 말이 있다. 우리는 항상 씨를 뿌리는 데 그 열매가 몇 년 후 열리는지는 모른다. 어떤 건 내일 열릴 수도 있지만, 어떤 건 40년, 50년 후에 열릴 수도 있다. 그런데 중간에 열매가 안 열린다고 해서 물 주기를 포기하면 가장 달콤한 50년짜리 열매가 죽어버릴 수 있다고.
사실 이 말은 내가 살면서 느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받은 기회가 난데없는 '행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가만 돌이켜 보면 10년 전 내가 했던 노력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경험을 해서이다. 그 행운은 '버티기'를 하지 않았다면 나에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
지금까지 버티기를 해 오는 동안 큰 산은 제법 다 넘겼다.
어지간한 일에는 내성이 생겼고, 일의 복리의 법칙도 간간히 누리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의 버티기는 새로운 형태의 장벽을 넘어서야 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나이'가 될 수도 있겠다.
나도 궁금하다. 당장 내년,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