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에게

사라진 무화과와 시멘트와 연필

선생님께

by 바지락

20.10.7

시끄러운 매미 소리에 찌는 태양으로 짜증이 가득하고 골이 울리는 여름을 아시나요? 수박 같이 텅 소리가 날 것 같은 머리를 어디라도 뇌이고 싶고 시원한 물비린내가 그리워지는 쟁쟁한 초여름에 글을 씁니다. 헤드폰 음향을 키우고 일렉 기타를 연신 튕겨대는 소리가 어울리는 날이에요

반쯤 기울여진 경사면에 지어져 반지하와 1층을 겸하는 작은 원룸이자 미술학원을 겸하는 직사각형 벽들에 둘러싸여 연필을 계속 깎았어요. 벽이라곤 그 너머밖에 없는 하얀 타일이 흑연으로 얼룩진 공간에,


자잘한 식당과 옷가게, 이발소 등을 품은 상가에 사각거리는 미술학원은 끄트머리 즈음 아무도 모르게 자리합니다. 건물 바깥에서는 볼 수도 없고 밖을 향한 창도 하나뿐인 곳. 그리고 그 곳의 아무도 복도를 뛰어다니며 계단을 빙빙 도는 아이들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네일 샵에서는 네일을, 미용실에서는 머리를 보기 바빴으니까요. 손님은 어느 곳에도 없었습니다. 유일한 외부인이었던 우리는 적어도 2개월동안 13시간을 그 네모난 방에서 보냈어요.

(놀랍게도 한 번도 손님을 본 적이 없어요. 옷가게 주인은 미장원에, 파스타집 주인은 옷가게에, 네일샵 주인은 파스타집에. 나선형 구조였어요. 한 방향으로 회전하는 믹서기에 기쁜 마음으로 휩쓸렸습니다.)

식사 시간 전에 아이들은 담을 넘습니다. 십 분 남짓한 쉬는 시간이 그들을 푸른 향으로 이끌었어요. 희미해진 종이 위 번진 물감보다 새로 단장해 색색들이 선명한 놀이터로요. 저도 함께 담을 넘었습니다. 돌아 가기엔 시간이 부족했거든요. 마치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았어요.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죠. 우리가 아니라면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시멘트 덩이였으니까요. 이리저리 찍혀 생명력이 담긴 발자국이 그를 살려냈습니다.

담은 생각보다 낮지도 높지도 않았습니다. 아파트 사람들이 버린 서랍장에서 멀쩡한 부분을 찾아 딛고 올라가 아래로 뛰어들어야 해요. 조금씩 금이 간 플라스틱 의자를 버티던 다리는 그제서야 너른 숨을 쉽니다.

담에서 뛰어내리는 느낌은, 빨려 들어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립니다. 누군가 끌어당기는 듯 다리를 잡고 아래로 빠져버려요. 싱크홀에 다리를 넣어 보면 이런 느낌일까요. 인력이 도무지 놓아 주지 않아 아려 오는 뒷꿈치를 뒤로 하고 놓칠세라 아이들을 향해 뛰었어요.

얇은 잉크 펜으로 흘려 쓴 당신의 편지를 방금 또 읽었습니다. 주제 정물은 큼직하게, 형태는 정확히, 어둠 부분에서는 보색을 넣어주는걸 기억하라는 짧은 카드를요.
담에서 떨어졌던 날은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어요. 얇고 꽤나 평평한 제 발보다 골반은 더 넓었으니까요. 리본 모양으로 허리를 둘러 묶은 앞치마의 매듭은 조금 아팠습니다. 저는 안도의 숨을 쉬었고 아이들은 걱정을 들이마셨어요. 발이 그날은 아리지 않았습니다. 시험에 익숙해지는 법을 저는 아직도 알지 못해요.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고 페인트가 벗겨져 나오던 담에서 내려올 때 만큼이요. 몇 번을 뛰어내려도 생경한 뒷꿈치의 감각이 두려워요. 복숭아뼈와 뒷 다릿살이 바르르 떨릴 만큼 뼈를 울리는 시큼함에 겁이 납니다.

아래 무엇이 버티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지켜보는 이를 두고 훌쩍 뛰기엔 너무 커 버렸습니다. 그 낮은 담 끝에 운동화 밑창이 깜박이는 필라멘트처럼 아슬아슬해요. 담을 볼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처음으로 그 담에 발자국을 새긴 어른. 망설임 없이 그 위를 발던 조금 때가 탄 하얀 운동화. 선생님의 얇은 신발 밑창도 그곳에 남아 있을까요? 작은 학원 안을 가득 메우던 무화과 향을 기억하시나요. 반으로 갈라 맛보려 껍질채 집어들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촉감에 입으로 털어 넣어 버렸어요.

담을 향해 고함을 질러 대는 아저씨에게 무언가를 일러 주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어요. 하얀 북박이 장에서 꺼내던 새까만 기타 케이스와 그날 이후로 한번도 보지 못한 울렁이는 여름의 무화과 조각 맛이 입술에서 달싹거립니다. 무화과를 닮았어요. 답장도 보내지 못하는 편지를 두고 가신, 혓바닥 끝에 아주 조금 눈을 감고 고민해야 떠오르는 깨알 같은 씨의 감각을 남기고 사라진 무화과요. 저는 오늘도 여름의 노래를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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