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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Feb 13. 2018

반팔 티셔츠 귀신

내가 산 게 아니야. '그분'이...

*메인 사진 출처 : 내가 애정 하는 브랜드 #유니폼브릿지 홈페이지(http://uniformbridge.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0840)


 요즘 나한테 반팔 티셔츠 귀신이 붙은 것 같다. 뉴스에선 한파 예보가 매일 이어지고, 인스타그램엔 #얼었어 가 유행처럼 늘어나는 요즘에, 나는 막 반팔 티셔츠가 사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하다. 반팔 티셔츠가 없는 것도 아니고, 지금 입을 옷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애초에 반팔 티셔츠 귀신이 왜 찾아온 건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미 붙어버린 이 귀신을 떼어내기 힘든 이유만은 분명하다. 내 의지가 아니라 ‘그분’의 명령인 듯 자연스럽게 인터넷 쇼핑몰을 둘러보니, 우선 지금 반팔 티셔츠 값이 싸다. 국내 스트리트 브랜드들도 대부분 50% 이상씩 세일을 하고 있어서 3~4만 원짜리 티셔츠를 1만 원쯤에 살 수 있다. 기본 아이템이나 유행을 타지 않는 레터링 디자인, 와펜, 포켓 티셔츠는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 판단은 과연 나의 판단이었을까, 반팔 티셔츠 귀신 ‘그분’의 판단이었을까)


 그리고 왠지, 올여름엔 내 주머니 사정이 3~4만 원짜리 반팔 티셔츠를 맘껏 사기 어려울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것도 지금 반팔 티셔츠를 사야만 하는(!?) 큰 이유였다. 지금 당장 입을 겨울 외투는 충분하고, 봄에 입을 상의도 얼마 전 센텀 시티 신세계 백화점 h&m에서 70% 세일로 ‘겟’했다. 거기엔 질 좋은 h&m edition 라인이 있어서 가끔씩 꼭 찾아가 보곤 했는데, 11만 9천 원짜리 니트를 2만 9천 원에 사서 기분이 좋았다. 그렇다고 내가 9만 원을 버는 게 아니란 건 나도 알지만...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의 나는 인터넷으로 반팔 티셔츠 사는 게 좀 어려웠다. 사이즈 때문이다. 왕년에 나름 날씬했던 174/74 시절엔 그냥 고민 없이 L 사이즈면 됐는데, 174/89 키 작은 근육 돼지가 되고 나선 사이즈 고르기가 영 애매해졌다. 요즘엔 오버 핏이다, 세미 오버 핏이다, 하면서 브랜드마다 자기 고유의 사이즈 기준을 갖고 있어서, 여기선 M 사이즈가 저기선 XL 사이즈일 때도 있다. 작년 여름(174/84)에 입던 티셔츠들은 어깨나 가슴 폭이 작아져서 사이즈 기준이 될 ‘프로토 타입 티셔츠’가 없기도 했고.


 결국 며칠을 잠자리에 누워서 무신사 스토어와 29CM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반팔 티셔츠 귀신에 빙의된 채로 직접 서면으로 나섰다. 롱코트에 기모 청바지를 입고 한파를 가르며 반팔 티셔츠 사냥을 나선 미친 남자, 그게 나였다. 다행히 ZARA와 h&m에서 쏙 맘에 드는 티셔츠를 3장 샀다. 지출은 41,000원. 재질이나 디자인도 맘에 들었지만, 지금 내 몸에 맞는 사이즈의 '프로토 타입'을 구했다는 점이 기뻤다. 여름까지 살을 빼서(뺀다면) 배만 조금 들어가면 딱 좋을 것 같다.


 자, 이제 그 프로토 타입 덕분에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얼마든지 내 몸에 맞는 반팔 티셔츠를 살 수 있게 되었다. 서면에서 사 온 티셔츠를 방바닥에 펼쳐 두고 줄자로 어깨와 가슴, 소매 길이와 총장을 꼼꼼히 쟀다. 치수를 재면서 새삼 내 덩치가 커졌다는 생각에 한숨도 나왔지만, 아무튼 이제 정보와 숫자로만 점철된 인터넷 쇼핑몰 페이지에서 길을 잃지 않을 든든한 무기와 지도를 지닌 것 같은 든든함이 더 컸다. 나는 행동을 개시했다. 


다시 무신사 스토어와 29CM에 들어간다. 카테고리는 반팔 티셔츠, 정렬 기준은 낮은 가격부터. 

그런데, 그런데, 맘에 드는 옷들이 거의 다 품절이다.


 귀신한테 홀렸다 정신 차리면 이런 기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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