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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Feb 27. 2018

어쩌다 보니, 신발

어쩌다 보니, 서른

신발이 좋았다


 가끔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가면 우리 가족 특유의 냄새가 나를 먼저 반긴다. 친구 자취방, 고시원, 무전여행을 하면서 신세 졌던 대학 선배와 군대 동기, 고등학교 동창의 집까지. 살아오면서 이러저러한 집을 겪어 보니, 집집마다의 고유한 냄새가 있는 것 같다. ‘가향(家香)’이면서 ‘가향(佳香)’이기도 한 그런 냄새가. 자주 오지 못해 기억이 가물가물한 본가의 도어록 비밀번호를 겨우 기억해내고서 현관문을 열면, 신발장에 가라앉아 있던 오래된 숯 냄새와 신발에 밴 가족의 체취가 별안간 흩어졌다. 내가 선물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의 신발들이 저마다의 상처와 역사를 몸에 새기고서 남겨져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신발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다고 뭐 요즘 말로 '스니커즈 콜렉터' 같은 류의 수집가적 관심은 아니었다. 그저 신발이 좋았다. 비싸고 좋은 신발에 대한 동경도 분명 한몫했을 거다. 신발을 아껴 신는 편은 아니었지만, 새 신발은 늘 구석구석 관찰을 끝낸 후에 착용했다. 특히 무슨 신기술이라도 적용된 신발이라면 그런 부분을 한참 뜯어보곤 했다. 브랜드는 나이키, 특히 쿠셔닝 기술에 관심이 많아서 에어 맥스, 줌 에어, 쿠쉴론, 루나론, 그리고 지금은 추억이 되어버린 샥스 시리즈까지 적어도 수학 과목보다는 더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다. 요즘 뜨는 리액트 폼도 관심이 가서 운동화를 사고 싶지만, 돈이 없어서 참고 있다.


 지금 돌이켜봐도 뭐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그 무의미한 관심 때문에 나는 우리 가족에게 유난히 신발 선물을 많이 했다. 대충 기억나는 것만 아버지, 어머니, 동생 합쳐서 17켤레 정도는 선물했던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오래 사귄 여자 친구에게도 이런저런 신발을 10켤레 정도, 매년 1켤레씩은 선물했다. 신발 선물하면 도망간다던데, 도망갈라치면 다시 새 신발로 잡아끈 셈이다.


신발을 선물한다는 건


 그러니까, 우리 가족과 여자 친구에게만 지난 10년 간 거의 30켤레가 넘는 신발을 선물한 셈이다. 몇 번의 실패를 거치며 한 사람에게 여러 번 신발을 선물하다 보면, 신발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발볼과 발등의 모양은 어떤지, 쿠션과 유연성 중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보통 발길이에 비해 딱 맞게 신는지, 크게 신는지, 어떤 디자인을 배제해야 할지 등등.


 사실 발이라는 게, 생각보다 더 은밀한 신체부위다. 한 여름이나 실내가 아니면 드러낼 일이 별로 없고, 드러낸다 해도 다른 사람의 발을 유심히 관찰할 기회는 거의 없다. 손을 허락하는 일보다 발을 허락하는 일이 더 내밀하고 섹슈얼하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일 터. 그러니 상대방의 발을 잘 알고 신발을 고를 수 있다는 건, 분명 꽤 가까운 사이라는 증거다. 누군가로부터 선물 받은 신발이 어디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쏙 마음에 든다면, 아마 그 사람은 당신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거나, 적어도 알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 사람이 틀림없다. 개인적으로 알면 알수록 신발은 정말 선물하기 까다로운 품목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중학생 때부터 이유 없이 신발을 좋아했던 날들이 벌써 15년째, 어쩌다 보니 나는 서른. 어쩌다 보니 별생각 없이 좋아하던 관심사가 내 인생의 절반을 차지해버렸다. 덕분에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가장 낮은 곳에 내 흔적들이 누워있다. 시집을 내고, 글을 쓰며, 생계를 고민하는 서른.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건, 다 내 신발이 이끈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고 괜한 억지를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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