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laboration과 Hybrid
등산, 아웃도어, 골프, 수영 등등의 한정된 스포츠 범위의 브랜드를 제외하면 국내 종합 스포츠 브랜드 시장의 굳건한 서열은 큰 틀에서 몇십 년째 변화가 없는 것 같다. 나이키와 아디다스를 투톱으로 푸마, 리복, 뉴발란스, 아식스 등의 브랜드가 포진하고 있고, 최근 뜨고 있는 언더 아머 정도의 브랜드가 전국의 번화가와 온라인 쇼핑 지도에서 춘추전국시대를 재현하고 있다.
출처 : EnCyber.com
물론 프로스펙스, 르까프 등의 국내 브랜드도 과거에 비해 세련된 이미지를 구축하려 부단히 노력하기는 했다. 프로스펙스는 한때 김연아를 CF 모델로 앞세우면서 젊은 느낌을 가져오는 데 성공했고, 당시 ‘워킹 슈즈’의 주류 대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르까프 또한 지금처럼 본격적인 레트로 열풍이 불기 직전부터 이서진을 CF 모델로 내세우고, 르까프의 과거 로고를 활용한 바이럴 복고 CF로 관심을 얻었다. 하지만 그 효과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고, 여전히 선호 연령대는 높은 편이다. 휠라는 레트로 열풍에 힘입어 지금 상승세를 보이고는 있지만,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그 효과가 그리 오래 가진 못할 것 같다. ‘레트로’는 휠라 브랜드 정체성의 극히 일부분이며, 지금의 유행이 지나가면 다시 외면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지금의 레트로 디자인들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기보다는 과거의 것을 다시 소환한 수준에 그친다.)
출처 : 르까프 홈페이지 http://www.lecaf.co.kr/
내가 중학생 때 유행했던 험멜과 카파 브랜드 역시 그 옛날의 명성을 되찾는 데에는 실패했다. 험멜은 이제 조기 축구회에서도 외면 받고 있고, 카파는 스트리트 브랜드 느낌에 더해 스스로 ‘헤리티지+레트로+유스 컬쳐’를 표방하며 야심찬 시도를 했지만, 국내에선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출시 당시 스포츠 온라인 쇼핑몰이 아닌 스트리트 브랜드 쇼핑몰 ‘무신사’에서 긍정적인 반응은 있었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데까지 가지는 못한 것 같다. 카파 브랜드의 역사가 올해로 102년째라는 점을 감안하면, 브랜드가 시간의 세례만으로 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출처 : mbc 무한도전
브랜드 정체성 측면에서 특히 언더 아머는 일명 ‘언더독 전략’을 통해 “무조건 우리가 최고야, 우리가 1등이야.” 라고 외치는 대신 1등인 나이키와의 차별점을 드러내는 전략을 취했다. 1등이 아닌 자들, 이미 성공한 자들이 아니라 성공하려 부단히 애쓰는 자들을 모델로 선정해서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과정과 열정을 브랜드 정체성으로 삼았다. 물론 그 중엔 스테판 커리처럼 지금에 와서 성공 대열에 오른 스포츠 스타도 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언더 아머에는 스테판 커리 시리즈 농구화 사일로가 생겼다. 마치 나이키의 조단 시리즈나 르브론 시리즈, 아디다스의 하든 시리즈 같은.) 언더 아머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굳건히 하기 위해 선택한 이런 방식의 스토리는 적어도 현재까지 잘 먹히고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언젠가 언더 아머가 나이키를 제치고 진짜 1등 브랜드가 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오히려 이런 언더독 전략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도 든다.
앞서 언급한 10개가 넘는 브랜드들을 줄 세우고, 구분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다. 단순 판매량, 인지도, 브랜드 규모, 가치 등등. 그러나 가장 간단하게 소위 ‘있어 보이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는 통과 의례는 아마 Collaboration(이하 ‘콜라보’)일 것이다. 브랜드 정체성이 확실하고, 팔릴 만한 인지도를 지닌 브랜드라야 성공적인 콜라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업계 1, 2위인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콜라보는 두말 하면 입 아픈 일이다. 나이키는 자사의 프리미엄 라인인 ‘Nike lab'이나 한정 발매를 통해 꾸준하게 콜라보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최근 현황만 살펴보더라도 명품 브랜드 Givenchy의 디자이너 리카르도 티시(Riccardo Tisci), 피갈레(PIGALLE), 슈프림(Supreme), 오프 화이트(Off White) 등등 굵직한 브랜드와의 콜라보 제품을 출시해왔다. 심지어 나이키의 오프 화이트 콜라보 제품은 돈만 있어선 살 수도 없었다. 소수의 당첨자만이 구입할 수 있었고, 리셀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기도 한다.
아디다스는 스포츠 라인보다는 아디다스 오리지널 라인에서 특색 있는 콜라보를 진행하는데, 하이엔드 아웃도어 브랜드인 화이트 마운티니어링(White Mountaineering), 세계적인 가수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 애니메이션 드래곤볼 등등과 콜라보를 진행했다. 나이키와 아디다스 외에도 탄탄한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들은 꾸준히 나름의 콜라보 제품을 출시해왔는데, 대부분은 매우 성공적인 콜라보였다. 여기서 ’성공적‘이라는 의미는 대중의 폭넓은 관심을 얻거나, 매니아로부터 폭발적인 수요를 통해 발매 후 단기간에 품절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제품이란 게 그렇다. 평만 좋아서는 안 된다. 팔려야 의미가 있다.
리복 - 디스이즈네버댓(Thisisneverneverthat), 베이프(Bape), 베트멍(Vêtements) 외 다수
푸마 - 한 코펜하겐(Han Kjobenhavn), 방탄소년단(BTS), 라이풀(LIFUL) 외 다수
아식스 - 제이크루(J.Crew), 로니피그(ronniefieg) 외 다수
뉴발란스 - 대너(Danner), 제이크루(J.Crew), 웍스아웃(worksout) 외 다수
출처 : 무신사 스토어 http://store.musinsa.com
프로스펙스도 과거 제이 쿠(J KOO)와의 콜라보를 한 적이 있지만 일회성에 그쳤고, 그리 흥행하지도 못했다.(나도 방금 검색해보고 알았으니까.) 르까프도 국내 의류 브랜드인 소윙바운더리스(Sewing Boundaries)와의 콜라보를 진행했지만 마찬가지로 그리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무엇보다도 콜라보 자체가 브랜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거나, 입지를 굳히는 데에 그리 큰 기여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자사 내에서는 나름의 분석으로 성과를 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소비자 입장에선 별로 돈을 쓰고 싶지 않은 콜라보였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물론 해당 콜라보 제품에 만족하며 구입한 소비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취향을 무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재차 말하지만 대중적이거나 폭발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는 의미다.)
출처 : 아시아 경제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102609142173688
따라서 소비자 입장에서 그리 큰 효과는 없었다. 이렇듯, 아직 제대로 된 콜라보를 해내기에 부족한(또는 콜라보를 통해 발돋움하기에 부족한) 브랜드조차도 ‘콜라보’에 매달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콜라보 자체가 브랜드의 다음 단계로 향하는 통과 의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브랜드 간 콜라보를 통해 두 브랜드가 동시에 크는 경우도 있지만 한 쪽만 주목 받거나, 두 브랜드 모두 흐지부지 그들만의 콜라보로 식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좌우지간, 콜라보 정도는 해봐야지 그래도 나름 ‘브랜드다운 브랜드’라는 명함이라도 걸 수 있는 셈이다.
그런 이유로, 사실 요즘은 기회만 나면 웬만한 브랜드들이 모두 콜라보를 한다.(혹은 해낸다.) 그 콜라보의 내실이나 평가는 소비자의 몫이지만, 어쨌든 다들 서로 상부상조하며 그럴 듯한 품새를 갖추는 것이다. 이렇게 브랜드 외부적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브랜드 내부적으로 탄탄한 역사와 사일로, 헤리티지, 기술력을 갖춰야만 가능한 방식도 있다. 바로 Hybrid(이하 하이브리드) 제품의 출시다.
출처 : http://blog.naver.com/dndb018/220790482755
하이브리드라는 단어는 원래 잡종, 혼성물(混成物)을 의미한다. ‘뭐야, 이 끔찍한 혼종은!?’이라는 말처럼 아무렇게나 막 섞는다고 다 성공적인 하이브리드는 아닐 테다. 하지만 애초에 브랜드 내부적으로 ‘하이브리드’할 수 있는 요소나 기술력, 제품군을 지니고 있는 것 자체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뭐라도 있어야 섞든지 말든지 하는 건데, 그 ‘뭐’가 아주 그럴 듯하고 멋진 것들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다시 한 번 나이키와 아디다스가 왜 업계 1, 2위 자리를 굳건하게 지킬 수 있는지, 하이브리드 제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획기적이고 성공적인 하이브리드로.
하이브리드 제품은 의류보다는 주로 신발에서 이뤄진다. 신발은 그 크기는 작지만 어퍼와 인솔, 미드솔과 아웃솔 등에 적용되는 다양한 기술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각각의 요소가 분할되어 하이브리드 될 가능성이 높다.
먼저 나이키 신발의 기술을 아주 크게 나눠보면 어퍼와 미드솔 쿠셔닝 기술로 나눌 수 있다. 어퍼의 경우 과거 메쉬 소재가 주를 이루던 시절이 막을 내리고 니트 재질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나이키에서는 플라이 니트(Fly knit)소재가 전방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니트 소재는 유연하고 가볍고 편안한 장점이 있지만 용도에 따라서는 발을 적절히 잡아주는 기능도 필요하기 때문에 중족부를 감싸는 플라이 와이어(Fly wire)소재가 사용되기도 한다. 그 밖에도 축구화에 사용되던 테이진(Teijin) 소재나 최근 출시된 르브론 XV에 사용된 용 비늘 같이 생긴 배틀 니트(Battle knit) 등등 세부적인 기술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라이프 스타일 신발과 러닝화에 적용되는 대표적인 기술은 플라이 니트(Fly knit)와 플라이 와이어(Fly wire)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미드솔 쿠셔닝 기술을 크게 분류하면 에어, 루나론, 쿠쉴론, 샥스, 그리고 최근 발표된 리액트 폼 정도가 있다. 8년 전 루나글라이드를 필두로 한 ‘루나 대란’ 시절 루나론의 명성은 이제 많이 가라앉았고, 샥스는 현재 국내에서 정식 발매되지 않는다. 에어 기술은 다시 세부적으로 에어 맥스, 에어 줌, 에어 180, 에어 270, 에어 360, 베이퍼 맥스 등등으로 나뉘는데 2018년 현재 가장 주력하고 있는 것은 베이퍼 맥스와 리액트 폼, 그리고 에어 270 정도라고 판단된다.
훌륭한 혼종의 예.출처 : 나이키 코리아 https://www.nike.com/kr/ko_kr/
나이키에서는 최근, 거의 20년 가까운 전통을 지닌 신발들의 어퍼 디자인과 최신 쿠셔닝 기술인 베이퍼 맥스 미드솔을 하이브리드한 제품을 줄기차게 발매하고 있다. ‘에어 베이퍼 맥스 97’ 이라든가 발매 예정인 ‘에어 베이퍼 맥스 플러스’ 가 바로 그 대표적인 하이브리드 제품이다. 그리고 이런 제품들은 거의 발매 직후 10분 이내에 온라인 쇼핑몰에서 품절되곤 한다.
아디다스의 경우 나이키와 비슷한 니트 소재인 프라임 니트(Prime knit)소재로 대부분의 러닝화를 제작하고 있다. 두 브랜드 외에도 요즘은 거의 비슷한 니트 소재를 각자의 이름으로 부르며 사용 중인데, 개인적인 느낌으로 나이키의 플라이 니트가 유연하고 가볍지만 상대적으로 내구성이 약한 반면, 아디다스의 프라임 니트는 조금 더 촘촘하고 탄탄한 느낌이었다. 메쉬 소재를 사용한 중저가 러닝화도 있는데, 과거의 그물형 메쉬 소재가 아닌 엔지니어드 메쉬 소재를 사용해서 착용시 발에 느껴지는 이물감이 적고, 형태 보존이 탁월하다.
쿠셔닝 기술은 알파 바운스, 클라우드 폼, 스프링 블레이드, 그리고 최고 주력 쿠셔닝인 부스트 폼 등이 있다. 단, 스프링 블레이드는 현재 한국에서 발매되지 않는다. (해외 사이트를 통해 구입은 가능하다.) 현재는 알파 바운스와 부스트 폼이 주력 쿠셔닝인데, 아무래도 부스트 폼의 활용도가 훨씬 넓다. ‘울트라 부스트’라는 프리미엄 러닝화에 처음 적용된 데 이어 다운 그레이드 된 다수의 러닝화에도 적용되었고 농구화, 테니TM화는 물론 최상위 버전 축구화에도 얇은 부스트 폼이 장착되어 있다.
출처 : 아디다스 코리아 http://shop.adidas.co.kr
때문에 아디다스의 하이브리드 신발 역시 전통 있는 스니커즈에 최신의 기술인 부스트 폼을 하이브리드한 방식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슈퍼스타 부스트’다. 전체적인 외관은 슈퍼스타 그대로지만 단단한 고무 밑창 내부에 부스트 폼을 내장했다. 내장된 부스트 폼은 중족부 안쪽에서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디자인적인 하이브리드라기보다는 전통에 최신 기술을 더한 방식의 하이브리드라고 볼 수 있다. 발매 당시 반응이 폭발적이지는 않았다. 전반적으로 평이한 반응에, 몇몇의 ‘뭐야, 이 끔찍한 혼종은!?’ 같은 불호의 반응이 섞여 있었달까.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슈퍼스타 같은 스니커즈 계열은(물론 초창기엔 농구화로 발매된 신발이지만) 확실히 장시간 착용시 불편함이 있는데, 부스트 폼이 그걸 확실하게 해결해주니까.
아쉽게도, 아직까진 나이키와 아디다스를 제외한 다른 브랜드들은 이런 하이브리드에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아, 물론 자사 내의 고유한 쿠셔닝 기술을 여기저기 활용하긴 하지만 그걸 하이브리드라고 하지는 않는다. 신구(新舊)의 만남이랄까, 뭐 그런 시대 융합적인 시도라야 하는 거니까, 브랜드 역사가 짧으면 필연적으로 하이브리드에 불리하다. 그렇다고 역사가 길다고 무조건 유리한 것도 아니지만.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하이브리드에 시도한 브랜드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문장을 이렇게 바꿔야겠다. ‘나이키와 아디다스를 제외한 다른 브랜드들은 이런 성공적인 하이브리드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재차 말하지만, 하이브리드는 그냥 아무거나 섞는 게 아니다. 섞지 않아도 각각이 이미 소비자로부터 충분한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있는 것들이 만나야 한다. 나이키의 베이퍼 맥스와 에어 맥스 97처럼. 아디다스의 슈퍼스타와 부스트 폼처럼. 현대의 스포츠 브랜드가 성장하는 단계를 도식화한다면 이럴 것이다. 각 단계를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복잡한 스포츠 브랜드 시장에서 나름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1. 브랜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소비자에게 각인시킨다.
2. 확립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다른 브랜드와의 성공적인 콜라보에 시도한다.
3. 브랜드 자체적으로 갖춘 전통과 기술력, 아카이브를 활용해 하이브리드에 시도한다.
이 글은 칸투칸 8f에 최초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