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쉬어가도 괜찮아
요즘은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을 여실히 실감하며 지낸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오후 1시쯤까지 공복 상태로 택배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일이 끝날 때쯤이면, 여전히 볼록한 내 배를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뱃가죽이 등짝에 붙어버린 게 아닐까...?’하는 인지부조화의 심정이 밀려든다. 그 덕분에, 점심이라고 해봐야 백화점 직원 식당의 뻔한 정식 메뉴인데도 매번 감탄하며 먹게 된다.
아직 내가 가진 단어가 얼마 되지 않던 어린 시절엔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도 별로 와 닿지 않았다. 그 시절에 엄마에게 자주 들었던 핀잔 중엔 “밥 먹기 전에 과자 먹으면 안 되지!”가 있었다. 과자는 언제 먹어도 맛있었고, 식사 전이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었으니까. 혼이 나면서도, 이미 입 속에서는 몇 조각의 과자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런 기억의 반복학습 때문일까. 이미 클 대로 다 커버린, 이제는 조금씩 늙어간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나이에 이르러서도 ‘역시 식사는 뜨끈한 밥에 국이나 찌개, 밑반찬이 있어야 제대 로지’라는 고정관념이 박혀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미래형 식사‘라며 마시는 액상 음식도 나오는 마당에.
아무튼 그런 고정관념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면 괜히 허기가 지고 마음이 허전했다. 2년 전, 살인적인 4job 스케줄을 감당해내며 지낼 땐 끼니 거르는 건 예삿일이었고, 기껏 먹어봤자 햄버거나 샌드위치를 5분 만에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게 다였다. 바쁜 만큼 돈은 벌었지만, 마땅히 휴식이어야 할 식사조차도 신경 곤두선 시간싸움이 되어버리고 나니 ‘이렇게 돈 벌어서 뭐하나..’하는 회의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을 잘 챙겨 먹어야지...
가끔, 햄버거나 샌드위치 먹을 시간조차도 없을 땐 편의점에서 씨리얼 바를 사 먹었다. 아몬드, 호두, 귀리 같은 갖가지 견과류를 꿀이나 초콜릿과 함께 버무려 굳힌 것. 가격도 저렴했고, 괜히 건강한 음식을 먹는 기분도 들었다. 그마저도 급히 걸어가며 정신없이 씹어 먹어야 했지만, 그래도 내게는 그저 술안주일 뿐이었던 견과류가 꽤 믿음직한 한 끼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바쁘던 시절이 끝나고, ‘적게 벌고 충분히 존재하자’는 마음으로 3년 간 근무했던 사교육 업계에서 발을 뺐다. (생각보다 너무 적게 번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라디오 작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부족한 재정을 메우려 새벽엔 택배 일을 하며 지낸다. 그리 크지 않은 냉장고에는 반찬거리들을 주기적으로 채워둔다. 대파, 마늘, 고추 같은 것들은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냉동 보관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 찌개를 끓이고, 고기와 채소를 볶고, 전기밥솥에 밥을 해 먹는다. 소박하긴 하지만, 비로소 ‘제대로 된 식사’를 하며 지내는 거다.
가끔은, 씨리얼 바를 먹는다.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서는 아니고, 그냥 맛있어서. 횡단보도 신호도 제대로 보지 못할 만큼 바쁘게 걸으며 허겁지겁 먹는 게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다. 그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견과류 하나하나의 맛과 식감을 느끼면서. 햇살 좋은 날 건물 옥상에서 먹기도 하고, 노을 지는 광안리 해변을 걸으면서 먹기도 했다. 금련산을 오르면서 먹기도 하고, 다이어트해보겠다고 아침이나 저녁 대신 먹기도 했다. 먹다 보니, 베어 물면 한입 가득한 맛과 향이 좋았다.
돌이켜 보면 그 바쁘고 치열했던 시절, 내 하루하루는 전력을 다해 달리는 마라톤 같았다. 매일 버거울 만큼 달리는 데도, 단거리 달리기는 아닌. 그렇다고 길고 긴 레이스 위에서 잠시 쉬어갈 수도 없는. 그 시절엔 한 끼 식사도 식사가 아니라, 마라톤 레이스 중간, 중간마다의 테이블에 있는 생수병을 들이붓는 것 같았다. 마시는 것도 아니고, 적시는 것도 아닌. 대충 들이붓고 가던 길을 마저 가야 하는. 2, 3시간 달리는 마라톤도 그렇게 달리고 나면 쓰러져 쉬어야 하는데, 몇십 년을 달려야 하는 인생을 그렇게 살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라톤처럼 오래 달려야 할 때가 있다면, 해변을 거닐듯 산책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단거리 달리기처럼 경쟁자를 제치며 내달려야 할 때가 있다면, 옆 사람과 손잡고 박자 맞춰 함께 뛰는 줄넘기를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마라톤이든 산책이든, 단거리 달리기든 줄넘기든, 먹을 땐 먹는 데 집중해야 하는 법이다. 복잡다단한 삶을 단순한 비유로 가두자면, 적어도 나는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제대로 된 식사’라는 거, 얼마나 잘 차려진 식사인지도 정말 중요하지만 얼마나 식사에 집중할 수 있는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상다리 휘어질 10첩 반상 아니라도, 설령 손바닥만 한 씨리얼 바 하나라도 집중해서 편안히 먹는다면 충분히 심신의 위로가 된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시원한 커피 한 잔과 씨리얼 바를 베어 무는 휴일의 낮. 지금 삶에 지친 누군가에게,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한입 가득 쉬어가도 되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시간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면, 내가 조금 느려지면 되는 거라고.
이 글은 칸투칸 8F 칼럼으로 최초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