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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Mar 24. 2019

다면체를 대하는 방식

진득하고 정성스럽게


올해 7월 전후로 출간될 에세이의 프롤로그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아무 노력 없이 이뤄지는 일들은 믿을 것이 못되었다.
나이 드는 일도 마찬가지여서, 스물아홉의 내가 서른이 되는 하루아침에 변한 것이라고는
한숨이 조금 더 깊어진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저 나이 드는 일만으로도, 자의적인 노력이 아닌 타의에 의한 흔들림 덕에 깨닫게 되는 사실은 있는 것 같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세상의 거의 모든 것들은 결국 다면체라는 것이다. 물건도 사람도, 그리고 삶도. 해서 어느 한 단면만으로 섣불리 단정 짓는 일은 시간이 지나면 늘 오판이 되어버렸다. 한땐 그런 일들이 익숙하지 않아서 자주 자책하고 쉽게 후회했다. 서른을 넘겨서야 결국 모든 건 다면체로 굴러간다는 걸 깨달은 후로는 그나마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2월 첫 주에 출간 계약을 하고 6주 동안 추가 원고를 더해, 이제 전체 원고는 얼추 정리가 됐다. 그동안 내 원고를 10번도 넘게 다시 읽어봐야 했는데, 그래서 이제는 거의 다 외워질 정도가 됐는데도 읽을 때마다 마음이 갈팡질팡한다.


나름대로는 좋다고 애정을 쏟았던 문장들이 문득 하잘것없어 보인다. 서른 내내 에세이 한 권을 내어보겠다며 정성을 들인 글들인데, 읽다 보면 ‘이런 걸 책으로 엮어서 돈을 받고 팔아도 되는 걸까’ 싶은 죄송스러움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울적해지면 박준 시인이라든가 한수희 작가, 소설가 미루야마 겐지의 에세이를 읽는다. 그러면 방금 전의 죄송스러움은 자괴감으로까지 심각해진다. 그래, 이 정도는 써야 책을 내는 건데. 내 글이 무슨. 


예전 같았으면 이쯤에서 우울의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쉬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들을 끄적이고 새우잠에 들었을 테지만 이제는 아니다. 결국 모든 건 다면체로 굴러가기 마련이니까. 글도 마찬가지라서, 하필 오늘 내 글의 드러난 면이 형편없었던 것이라고 여기면 그만이다. 다면체로 굴러가는 글을 며칠 내내 진득하게 살펴보면 또 어떤 날엔 마음에 쏙 들기도 할 것이다. 아무리 굴러도 이건 아니다 싶을 때, 그런 것들을 솎아낼 줄 아는 눈썰미와 강단만 있으면 될 일이다. 


여러 다면체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것은 아마도 사람이지 않을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아마 살아가는 내내 실감하게 될 것만 같다. ‘첫인상’이라는 단어는 있는데 ‘끝인상’이라는 단어가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상대방을 마주하는 한 면만을 겨우 알아차릴 뿐, 그 모든 면들을 익히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 몇십 년을 함께한 친구나 부부 사이는 물론이고 부모 자식 간에도 서로를 다 안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그러므로 모든 독자를 만족시키는 글을 써야겠다는 욕심은 일종의 정신적 자해 행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독자들 또한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다면체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내 글에 감동받고, 누군가는 시간낭비를 했다며 화를 낼 것이다. 심지어는 오늘 감동받았던 독자가 며칠 뒤엔 시큰둥해지거나, 발음 연습용으로도 못쓸 글이라고 여겼던 독자가 새삼스럽게 나의 어떤 문장에 밑줄을 긋게 될 수도 있다.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모든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써내는 것이다. 제멋대로 굴러가는 글이라는 다면체를 진득하고 정성스럽게 보살피면서. 그런 마음으로 다시 원고를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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