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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Mar 27. 2019

허물어진 마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허물어진 마음을


어쩌다 보니 20살 이후 11년이나 모교 캠퍼스를 배회하곤 한다. 11년이라니. 분명 하나하나의 날들을 세어보면 11년이 맞긴 한데 쉽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더해야 할 숫자를 곱해버린 기분.


신입생 때만 해도 정문 맞은편이 주된 상권이어서, 그 골목골목에서 대학생들은 마시고 취하고 토악질을 해댔다. 3,500원짜리 희멀건 돼지국밥도 푸짐한 두루치기 정식도 다 쓰러져가는 건물의 수미식당, 수복식당도 그 일대에 있었다. 당구장도 술집도 PC방도 죄다 정문 맞은편 골목에 펼쳐져 있었다.  


어느덧 세월은 11년이나 흘러 캠퍼스 내외로 참 많이도 변했다. 유채꽃밭이었던 자리에는 새 건물이 들어서고 육중했던 정문의 문주도 철거되었다. 주된 상권이었던 곳의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쪽문 방향에 길게 이어져있던 가정집들이 새로운 간판을 달고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 벽돌 담벼락이 있던 자리엔 시야가 트인 철제 울타리가 세워지고, 맥주를 마시며 바람이 나무의 마음을 흔드는 소릴 듣던 솔밭에서는 이제 더 이상 술을 마실 수가 없다. 솔밭이라는 이름도 노르웨이의 숲으로 개명되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개명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겉멋으로 읽은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나라면 캠퍼스의 가장 푸른 장소를 그렇게 쓸쓸한 이름으로 짓지 않을 것 같은데.


아무튼 참 많이도 허물어지고, 다시 지어졌다는 뜻이다.


졸업을 앞두고 있던 2015년, 2016년 즈음엔 골목마다 유난히 허물어지는 건물이 많았다. 별생각 없이 길을 걷다가 문득 헛헛한 기운이 느껴져 주위를 살펴보면, 건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지저분한 터만 휑뎅그렁했다. 화장실이나 부엌, 거실 따위를 구분하던 벽만이 겨우 잘린 발목을 드러낼 뿐이었다. 가정집이었던 어떤 곳은 건물에 비해서 터가 넓어 놀랐고, 술집이었던 또 다른 곳은 이렇게나 좁은 터에서 우리가 모여 취했던 거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허물어진 것 앞에서는 괜히 멈춰 서서 멀쩡했던 때를 곱씹어보게 된다. 그러다가는 그 건물에서 오래 살았을 누군가의 마음까지 떠올려보곤 했다. 허물어진 마음을.


건물은 필요 때문에 허물고 다시 짓는다지만 사람의 마음은 무엇 때문에 허물고 또 짓는 걸까.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준다고 말할 때, 그건 마음의 평수를 허락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기왕에 내어준 자리에 들어선 사람을 덩그러니 내버려 둘 수는 없어서 우리는 그를 위한 집을 짓는다. 아늑하고 튼튼하게, 그래서 내 마음에 안심하고 머무를 수 있도록 마음의 집을 짓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허물어질 때, 사람은 휑뎅그렁한 자신의 빈터를 마주한다. 튼튼한 마음일수록 허물어지는 소리가 요란한 법이다. 허망한 마음의 빈터를 수습하다가 떠난 이가 버려두고 간 흔적들 때문에 울기도 하고, 그래도 빈집보다는 빈터가 낫지 않느냐는 자기 위안도 한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여느 골목들처럼 마음의 풍경에도 허물어지고 다시 지어지는 일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알게 된다. 만남과 헤어짐의 인사말이 다를 바 없이 안녕이라는 것을. 짓는 일만큼이나 허물어지는 일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허물어진 마음을 보듬는 방법은 결국 다시 짓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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