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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Apr 09. 2019

ㅓ와 ㅜ 사이

그 거리에서 고민하는 동안

ㅓ 와 ㅜ 사이


무슨 이유에선지 우리 가족은 친가보다는 외가와 훨씬 더 가깝게 지내왔고, 이제 마흔을 넘긴 이모들과는 지금도 다들 한 동네에서 살갑게 지낸다. 엄마는 7남매 중 맏이인데다가 나이 스물에 나를 낳았다. 그러니 내가 태어났을 무렵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이던 네 명의 이모들과 두 명의 외삼촌들에게 나는 꽤 충격적인 등장이었을 것이다. 외가에선 집안의 첫 손자였으니 내가 자라면서 받았을 사랑이란 감히 가늠할 수도 없다.  


덕분이랄지 때문이랄지 아주 어릴 때부터 이모, 외삼촌들과 함께 자라다시피 하며 자연스레 반말로 대화를 하게 됐다. 막내 외삼촌과는 8살 차이가 나고 그 위로 9살 차이의 큰외삼촌, 띠동갑인 막내 이모 등등으로 올라간다. 사회에서 만났다고 생각하면 반말은 고사하고, 불편할 만큼 먼 나이 차이다. (실제로 08학번인 나는 대학에서 00학번을 만나 뵌 적도 없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의 합의 하에 나는 이모야, 삼촌아라고 부르며 반말을 할 수 있었다. “이모야, 내 라면 좀 끓이도.”라든가, “삼촌아,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는데.”라든가 하는 식으로. 


그런 방식의 대화는 부모 자식 간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엄마와도 반말로 대화했다. 장 보러 나서는 엄마에게 “엄마, 어디 가는데?” 라며 묻고, 하교하고 들어서는 현관에서는 “엄마, 내 학교 갔다 왔다.” 라며 귀가 인사를 건네는 식이었다. 어릴 때야 그게 어색하지 않았고 누가 나무라는 사람도 없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살다 보니 대학을 가고 군대를 다녀와서도 여전히 “엄마, 내 왔다.”라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요즘은 그래도 상대 높임법의 ‘해요체’ 정도로는 격상되어서 “엄마, 뭐 먹을래요?”라고 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반말인 듯 반말 아닌 반말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버지에게만큼은 그게 쉽지 않았다. 엄마와 띠동갑인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겨우 산수에 눈을 뜰 때쯤 이미 마흔이었으니까. 특히 장남이라는 이유로 호된 유교 예절을 교육받으며 유년기를 보낸 터라 더욱 아버지가 어려웠다. 어릴 땐 “아빠”라고 부르긴 했어도 “제가 심부름 다녀올게요.” 하는 식으로 ‘해요체’가 기본 옵션이었고, 가끔 나도 모르게 군대식 다.나.까 화법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왠지 제대 이후에는 호칭과 높임법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큰맘 먹고 어머니 아버지라고 불렀던 적도 있었는데, 아 그때 부모님의 당혹스럽고도 불편한 표정이란. 그냥 ‘아들놈이 이제 다 컸구나.’하면서 받아주시면 좋았을 텐데, 괜히 나까지 민망해서 귀가 빨개져버렸다. 후에 엄마는 슬그머니 내게 와서는 “빈아, 엄마는 그거 너무 어색하고 싫드라. 그냥 하던 대로 해라.”라며 부탁했고, 아부지도 “갑자기 그렇게 할 필요가 전혀 없어. 부모 자식 간에 예의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통하면 되는 기제.”라며 우회적으로 ‘아버지’를 거부하셨다. 


그 결과, 엄마는 여전히 엄마이고 아빠는 아부지가 되셨다. 그것도 똑 부러지는 정확한 발음의 아부지가 아니라 끝을 애매하게 흐리는 아부지. 아버지와 아부지, ㅓ 와 ㅜ 사이의 거리는 우리 부자에게 너무나도 멀었다.


지난주에는 아름이와 나, 그리고 친한 친구 둘 이렇게 넷이서 술을 마시다가 마지막 3차를 우리 집에서 마무리하게 됐다. 취기가 올라 별 것 아닌 이야기에도 과장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다 형제 이야기가 나왔는데, 친구 P는 연년생인 형에게 아주 깍듯이 대한다고 했다. 그냥 형 대우를 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누가 보면 직장 상사나 군대 선임을 대한다고 오해할 만큼 깍듯이 대한다고. 처음 그 이야길 들었을 땐 연년생들이 으레 겪는 형제간의 지독한 서열 싸움에서 철저히 밀린 것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눈이 살짝 풀린 P는 예상치 못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줬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시느라 조부모에게서 자랐다는 P형제. P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정정하시던 조부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한다.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병세는 생각보다 심각했고, P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조부께서 돌아가실까 두려운 마음에 울먹이며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때 겨우 1살 터울의 형이,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형이 병원 로비 의자에서 울고 있던 P에게 다가와 “울지 마라. 안 그래도 할아버지 힘드신데 니가 우는 모습 보이면 더 약해지시니까. 울지 말고, 가서 할아버지 손이라도 한 번 더 잡아보고 얼굴 더 보여드려라.”라고 했다고. 


결국 P의 조부께서는 얼마 가지 못해 불귀의 객이 되셨고 장례식장에서도 P는 얼이 나간 채로 울다 그쳤다를 반복했는데, P의 형만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의연하게 장손의 역할을 해냈단다. 그러다 발인과 화장까지 끝낸 뒤 마지막으로 납골당에 유골함을 안치하는 순간, 그제야 P의 형은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P는 ‘저게 진짜 형이고 어른이구나.’하는 존경심이 생겼고, 그 뒤로 연년생인 형을 깍듯이 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권위의 상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억지로 하는 존대가 아니라, 존경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대. P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한글 문법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높임법은 무릇 그런 방식으로 활용되어야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그나마도 아부지라는 호칭도 끝을 흐리고야 마는 나의 자식 된 태도를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아부지에 대한 내 존경이 모자랐던 걸까 하는 의구심과 죄송함. 혹시 아부지도 아버지라 불리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 건 아닐까 하는 초조함.


며칠 전에는 갑작스럽게 평택에서 방위산업체 근무를 하게 된 동생을 배웅하러 김해 본가에 갔다. 퇴근하고 집에 오신 아부지를 맞이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은 전혀 뜻밖에도 “아빠, 다녀오셨어요.”였다. 아무리 오랜만에 뵙기로서니 아부지도 아니고 아빠라니. 나이 서른을 넘겨 아빠라니. 


하지만 아부지는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우리 가족은 밥을 먹고 TV를 보며 이런저런 근황을 주고받았다. 나는 속으로 ‘아부지라고 다시 부를까.’ 생각도 했지만, 기왕에 아빠라고 불러버렸으니 오늘은 아빠로 쭉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날 아부지는, 아니 아빠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깊고 다정하셨다.   


아버지와 아부지 사이, ㅓ 와 ㅜ 사이의 거리에서 내가 어른이 되는 방법을 오해하는 동안 아부지는 내게 여전히 굳건한 존재로 남아계셨다. 심지어 길을 잃어 나도 모르게 아빠라고 불러도 아무렇지 않은 부모의 모습으로. 새삼 나이 서른을 넘기고도 나는 여전히 아부지에게 “빈아.”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아버지와 아부지와 아빠, 누구에게나 나는 그저 아들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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