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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Jun 05. 2019

스스로 구해야 할 때

그래야만 할 때가 온다. 

스스로 구해야 할 때


나이 차이가 많이 날수록, 상대방의 무지나 실수를 지적하는 일은 어렵다. 선의와 호의로 똘똘 무장한 표정을 하고,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얘기를 해도 어쩐지 심기를 건드리는 것만 같다. 차라리 눈곱이 꼈다거나, 바지 지퍼가 열렸다거나 하는 정도라면 좀 민망하더라도 어떻게든 알려드리겠는데 상식에 관해서라면 영 곤란하다. 특히 나이뿐만 아니라 직위로도 한참 윗사람이라면. 


며칠 전, 늦은 집들이 겸 아름이의 친구들이 찾아와 밤까지 수다를 떨었다. (우리는 대학 동기라 서로 다 아는 사이다.) 캡슐 커피 회사, 의류 회사, 물류 회사 등등. 친구들은 모두 직장인이었고, 나만 프리랜서라 현장감 있는 직장인의 비화를 엿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당연히 행복이나 만족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스트레스와 황당함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당시에는 괴로웠지만 지나고서야 겨우 웃을 수 있는, 웃픈 이야기들. 몇 편의 블랙코미디 시트콤이 이어졌다. 


그러다 ‘나이도 많고 직위도 높은데 몰상식하고 게다가 허세까지 갖춘’ 상사 시리즈가 시작됐다. 그런 완벽한(!?) 캐릭터가 있을까 싶은데, 과연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았다.


C의 회사에는 장기 근속자가 많았다. 기본 6,7년부터 15년 이상 근속까지. 그러다 보니 고스펙보다는 풍부한 현장 경험으로 승진한 상사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그중 C의 부서에 새로 온 부서장은 영어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오히려 별스러울 정도로 영어 단어를 섞어 사용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하루는 신입사원에게 부서장이 친히 다가가 업무지시를 했다고 한다. 블라블라 영어 단어를 섞어가면서. 그러던 중,


“이거는 말로 설명하면 너무 디피컬트하니까, 여기 엑썰사이즈 보고 해봐요.”


응? 디피컬트는 알겠는데 거기서 엑썰사이즈가 왜 나와? 부서장이 자리를 뜨고 옆자리에 앉아 있던 C가 신입사원이 받아든 출력물을 보는데, 번뜩 눈에 들어온 단어는 ‘ex.' 맞다. example의 ex였다. 물론 exercise도 ex로 시작하기는 하지만 부서장님, 그게,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요, 사실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친구인 C는 물론이고 신입사원도 그 ex가 엑썰사이즈가 아니라 이그잼플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잘못이라면 모두의 잘못이고, 잘못이 아니라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상황. 


최근 이직한 친구 J는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에피소드를 풀어놨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지금 직장이 아니라 이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라는 것 정도. 한창 사회적으로 미투 운동이 이슈가 되기 시작했던 즈음, 당시 J의 부서는 퇴근 후 거하게 회식을 치렀다. 한 잔, 네 잔, 세 병, 여섯 병. 늘어가는 소주병만큼 분위기도 시끌벅적한 와중에 부서장이 던진 한 마디.


“나도 요새 유행하는 미투 운동의 주인공이 되고 싶네. 내가 또 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거든.” (부서장은 마흔 중반의 여성이었다고 한다.)


취중에도 순간 싸해진 분위기. 바쁘게 굴러가는 눈동자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미투 운동이 뭔지나 알고 하는 말일까. 몇 초의 정적을 깨고 친구 J가 뻔뻔하게 외친 말.


“좋습니다! 건배 한 잔 하시죠. 우리 부장님의 미투를 위하여!(위하여!!)


가까스로 정적은 깨지고, 부서장의 미투 발언은 묻혔고, 회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건배사를 외치던 부서장의 득의양양한 표정이란. 안타깝게도 누구도 그 부서장에게 “부서장님, 미투 운동의 주인공이 된다는 말씀이, 그러니까 부서장님은 그런 의도가 아니셨겠지만, 그게...” 하면서 말해주지 못했다. 역시나 잘못이라면 모두의 잘못이고, 잘못이 아니라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상황.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신입사원에게 프로페셔널한 모습이고 싶은 마음은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래, 술기운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그럴 때 옆에서 누가 지적을 하고 제대로 알려주면, 다시 배우고 고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이 들수록, 직위가 높아질수록 주변에서 진심어린 직언을 해주는 사람들이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그들이라고 말해주고 싶지 않았겠냐마는, 입장 바꿔 그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쉽겠는가. 양쪽 모두의 입장이 이해된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나는 이제 겨우 서른 초반인데도 대학 후배들은 내게 깍듯하다. 인간관계에서 일정 거리 이상을 확보하려는 매정한 내 성격 탓이겠지. 이유야 어쨌든, 아마 그 후배들도 나의 무지나 실수를 목격했을 때 바로 지적하기가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뒤집어 말하면, 벌써 나는 다른 사람의 직언을 구하기보다 스스로를 구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가는 중인 것이다. 친구들의 웃기고도 안쓰럽고 경악스러운 에피소드를 들으며, 어떤 분야에서든 나이 들수록 학습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실감했다.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제대로 배우려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스스로 구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허투루 배우고 함부로 나섰다간 내가 바보인 걸, 나만 모르는 상황이 내게도 닥칠 수 있다. 10년 뒤, 20년 뒤의 그런 나를 상상해보다가 치가 떨리고 한숨이 푹푹 나왔다. 말이든 글이든, 여러 번 곱씹어야겠다. C의 부서장님은 엑썰사이즈에서 이그잼플로 넘어갈 수 있을까. J의 부서장님은 미투 운동의 주인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부디, 제발, 그럴 수 있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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