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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Oct 15. 2019

서러웠던 일이 이해될 때

당신도 힘들었겠습니다.

서러웠던 일이 이해될 때


돌이켜보면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유난히 선명한 장면들이 있다. 행복한 장면과 서러운 장면, 또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 기억이란 결국 매 순간 편집되는 과거의 단편집 같은 것이어서 당시엔 중차대했던 일이 이제와 별 일 아닌 게 되기도 하고, 흘려보냈다고 생각한 순간이 오래 뇌리에 박혀 사람을 울게 만들기도 한다. 


어릴 적에는 부모님께 혼나는 것이 일상이었다. 자질구레한 거짓말을 그야말로 밥 먹듯이 했고, 끼니보다 훨씬 더 자주 혼이 났다. 해야 할 숙제를 미루는 것쯤 대수롭지 않을 정도가 되면 30일 치 방학 일기를 하루 만에 쓰는 일에도 요령이 생겼다. 무슨 일이든 일상적인 영역에 포함되면 내성이 생긴다. 혼날 때의 그 무거운 공기와 막다른 골목에서 포위된 듯한 갑갑함만 견디고 나면, 다시 그러려니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순간들은 진즉에 기억에서 지워졌다. 아예 사라진 건 아니고 뭐랄까, 거뭇한 연필 자욱이 묻어있는 지우개로 지운 자리처럼 뭔가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한데 그 자세한 내용은 더 이상 식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무튼 일상적으로 혼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선명하게 남아있는 장면들이 있다. 특별히 볼펜으로 적어둔 기록인 양 시간의 지우개로도 지워지지 않은 장면들. 내동초등학교 담벼락 바로 옆, 한아름 문구사와 새내동 태권도 도장이 있던 건물 뒤 주택 1층에 살 때였다. 화창한 주말 아침이었고 봄이나 가을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출근하시고 동생은 아마 3살쯤, 그렇다면 나는 11살쯤이었겠다. 좁고 기다란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엄마를 돕고 싶은 마음에 청소기를 돌리겠다고 나섰다. 엄마는 밝게 웃으면서 우리 아들밖에 없다고 말했다. 칭찬에 신이 나 나름대로는 열심히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데, 곧 엄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니는 청소기를 돌릴 거면 꼼꼼하게 제대로 하든가, 아니면 한다고 말을 하지를 말든가! 뭐하는데 지금!?” 화장실 발판 주위를 대충 에둘러 휘적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달려온 엄마는 사납게 청소기를 빼앗았다. 그 따위로 할 거면 가서 동생이나 보라고 했고, 나는 아마 시무룩한 표정으로 동생에게 갔으리라.  


또 하루는 방에 누워 있는 엄마를 보다가 “엄마! 내가 라면 끓여줄게!” 한 적이 있다. 모로 누운 엄마는 희미하게 웃는 표정으로 고맙다고, 우리 아들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때가 12살쯤이었던 것 같은데 혼자 라면 끓이기는 첫 도전이었다. 늘 엄마가 서있던 좁고 기다란 주방 구석의 가스레인지 앞에 섰다. 라면 봉지 뒷면에 적힌 대로 500ml 정도 물을 받는 것까진 좋았는데, 들뜬 마음에 끓지도 않은 물에 면부터 냅다 넣어버렸다. 소리를 듣고 방에서 나온 엄마는 금세 사납게 돌변해서 “할 줄 모르면 한다고 하지를 말든가, 이게 뭐하는 짓이야!”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날 라면을 먹었는지 어땠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당시엔 일상적으로 혼나는 일의 연장선일 뿐이었는데, 서른을 넘긴 지금까지 선명한 걸 보면 어린 마음에도 서러움이 컸나 보다. 거짓말을 하거나 숙제를 미룬 것과는 달랐으니까. 우울증이나 갑상샘 항진증 같은 단어는 전혀 몰랐지만, 무기력해 보이는 엄마에게 힘이 되고 싶어서 나섰던 일이었으니까. 선한 의도가 서툰 행동 탓에 뭉개져버렸으니까.  


이십 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런 기억들을 떠올릴 때마다 괜히 서럽고 울컥했다. 10년도 더 지난 일, 따지고 보면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인데도 그랬다. 당시의 어린 나에게만 감정이입이 됐다. 이십 대 후반 즈음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고, 지금은 다시 마음이 쓸쓸하다. 엄마가 나이 스물에 나를 낳았으니, 지금 내가 그 시절의 엄마 또래쯤이 되었다. 이제는 그 시절의 엄마가 안쓰럽고 가엾다. 이십 대 젊은 날들을 아들 둘 키우느라 다 보내고, 몸도 마음도 성치 않았던 겨우 서른 즈음의 엄마가. 대낮에도 어둑했던 안방에 혼자 모로 누워 엄마 혼자 떠올렸다 지우기를 반복했을 그 많은 상념들이. 


부모도 사람이고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과 그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늘 다 채워지지 않는 간극이 있다. 사랑을 온전히 해내기에 사람은 너무나 부족하니까.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미워지는 날도 있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주체하기 어려운 분노, 후회할 걸 뻔히 알면서도 뱉게 되는 모진 말들, 진심이 아니어야 하는데 진심이고 말았던 원망들. 자식 몰래 방에서 혼자 하는 후회는 체벌 후 멍든 자리에 연고를 발라주던 손길을 닮았을 것이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에게 준 상처를 자기 마음의 빚으로 간직하고 살아간다. 완전한 상환은 불가능하고, 오직 갚는 과정만이 유의미한 빚이다. 서러웠던 일들이 이해될 때 조금이나마 빚을 갚은 기분이 든다. 누군가의 불완전함을 이해할 때 사람은 조금 더 완전해진다. 결코 완전해질 수 없으나 언제나 조금 더 완전해질 수 있는 존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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