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저 주어지는 성장은 없다.
그저 그런 중키에 불과하지만 내게도 성장통의 기억은 있다. 학교의 최고 선배로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으스대던 초등학교 6학년 때. 축구를 하거나 떡볶이를 사 먹을 땐 모르다가도 책상머리에 가만히 앉아 수업을 들을 때면 자꾸 무릎이나 정강이, 팔꿈치가 저릿했다. 당시만 해도 ‘이렇게 아프다가 훌쩍 키가 크는 거겠지.’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어지간히도 공부하기 싫은가 보다.’ 라며 혀를 찰뿐이었다.
성장통은 잠자리에 들면 유난히 심해졌는데, 이리저리 뒤척이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곤 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키가 커진 셈인데, 아침마다 자란 키를 실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중학교에 입학해보니 나는 키순으로 매긴 번호 중 33번이었다. 당시 한 반의 정원이 38명쯤이었으니 평균을 충분히 웃돌고도 남을 만큼 장신이었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마지막 성장통이자 마지막 성장이었지만.
군대에 가면 키가 큰다더라, 하는 기대도 예비군 8년을 마무리하며 함께 고이 접어 던졌다. 이제 다만 더 작아지지는 않길 바랄 뿐. 요즘은 무릎이나 정강이, 팔꿈치가 아프면 일단 병원부터 가본다. 그 좋아하던 축구도 내키지가 않는다. 한마디로, 성장통이 아니면 어떤 통증도 달갑지 않다는 입장인데 아무리 엄포를 놓아도 어차피 성장통은 찾아올 일이 없다. 심지어 11년을 만난 아름이는 이제 “너는 키가 큰 게 안 어울려. 지금이 딱이야.”라며 위로인지 조롱인지 모를 말을 한다.
아무 노력 없이도 키가 자라던 시절. 그저 찾아오는 통증을 견디기만 하면 어른이 될 것 같던 그 시절. 서른이 넘고 이제 성장을 위한 통증조차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근육의 성장을 위해서 무거운 덤벨과 바벨을 들며 근육에 상처를 내는 것처럼, 성장을 원한다면 나서서 성장통을 구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요즘은 글쓰기의 성장통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주 빠진다. 좋게 말해 안정적으로 내 스타일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쓰다 보니 영 심심하고 나태한 글이 되는 것만 같아서. 한 번 자란 키는 특별한 계기나 사고가 없는 한 줄어들지 않지만, 머릿속 이미지와 분위기를 활자로 재현해내는 일은 조금만 방심해도 서툴게 된다.
나서서 훌륭한 작가의 좋은 문장을 읽고, 왜 나는 이런 문장을 쓰지 못하는가 저릿한 성장통을 견디고, 슬쩍 그의 기술을 훔쳐오는 일. 훌쩍 낯선 곳으로 떠나버리고, 그럴 여유가 없다면 처음 보는 골목을 헤매고, 그럴 수도 없다면 침대에 드러누워 내 마음 속이라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녀보는 일. 귀퉁이가 많이도 접힌 시집을 꺼내 읽고, 다시 내가 쓴 시를 꺼내 읽은 뒤 긴 한숨을 쉬어보는 일. 그러고도 생각했던 것만큼 성장통이 심하지 않으면 혹시 다 커버린 걸까, 겨우 이게 다인가 불안해하다가 며칠을 더 반복하는 일.
요즘은 성장통을 구하느라 마음이 바쁘다. 하룻밤 사이에 훌쩍 자라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렇게 자란 내 키가 겨우 요만큼이니까. 글만은, 글의 성장만은 조금 느리더라도 오래 멈추지 않기를. 수시로 아프더라도 언제나 견뎌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