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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Oct 15. 2019

저렇게 혹은 그렇게 말고, 이렇게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

저렇게 혹은 그렇게 말고, 이렇게 


1989년 10월의 마지막 날, 스물의 엄마와 서른둘의 아버지 사이에 내가 태어났다. 나를 처음 대면했던 순간을 기억하는 방식부터 두 사람은 달랐다. 엄마는 (여느 엄마들이 하는 말처럼) 신생아였는데도 이목구비가 참 잘생겼다고 기억하고, 아버지는 자신과 너무나 닮은 외모에 덜컥 겁이 났다고 회상한다. 참으로 우리 아버지다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유년기와 사춘기를 지나오는 동안에도 엄마와 아버지는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매일 부딪히는 엄마는 자주 애정을 표현하는 동시에 자주 회초리를 들었다. 회초리는 효자손이었다가 TV 리모컨, 죽비이기도 했으나 거의 대부분은 파리채 손잡이였다. 물론 이유 없는 회초리는 없었다. 나는 구몬이나 눈높이 같은 방문 학습지를 자주 미뤘고, 편식이 지독했고, 너무 자질구레해서 오히려 화가 나는 거짓말을 밥 먹듯 했다. 매번 맞을 때마다 아팠지만 이제 와서는 그때의 고통이나 멍 자국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럴 만했다는 인정도 인정이지만, 어느덧 그 시절의 엄마보다 더 나이 들어버린 덕분이다. 감히 기억 속 스물몇 살의 엄마를 보듬어줄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된 것이다. 


반면 아버지는 웬만해선 화를 내지 않으셨다. 기본적인 예의범절에는 엄격했지만 그 외의 것들에는 너그러운 편이었다. 어쩌면 매번 훈육의 기회를 선수 치는 엄마 때문이었을까. 만약 그렇다 해도 분명 훈육의 단계는 나뉘었다. 일단 엄마 선에서 해결이 안 되거나 ‘이번 일은 아주 보통 일이 아니란다.’라는 심각성을 보여줘야 할 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좀 있다 아빠 오시면 가서 솔직하게 다 말해. 네 입으로!”


얼마 가지 않아 아버지 등장하시고, 3자 대면 구도에서 나는 울먹이며 고해성사를 한다. 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데리고 나간다. 가까운 학교 운동장이나 뒷산으로 가서 또 한 10분을 말없이 걷는다. 열에 다섯 정도는 그것이 아버지 방식의 훈육이었다. 나머지 다섯의 셋 정도는 말로 다그친 후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내셨고, 둘 정도는 산에서 직접 꺾은 야생 나뭇가지 회초리로 신명 나게 체벌을 하는 정도. 아, 그날 그 뒷산에는 왜 그리도 헐벗은 나무가 많았는지. 마른 나뭇가지들은 왜 다들 손 닿는 높이에 뻗어 있었는지. 매일의 잔잔한 타격보다는 묵직한 카운터 한 방이 더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법이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아버지보다 훨씬 덩치가 커진 지금도 아버지는 경외의 대상이다.


내가 아플 때도 두 사람의 방식은 달랐다. 엄마는 우선 먹을 것을 준비했다. 흰 죽이나 김치국밥, 시래깃국 같은 것들이었다. 기름기 없이 뜨끈하고 개운한 것들. 배즙이나 도라지즙을 데워주기도 했고 휘휘 저어 뭉근하게 끓여낸 우유에 꿀을 타서 주기도 했다. 물론 병원도 다녀왔다. 주사를 맞고 처방받은 알약을 챙겨 먹기도 했으나 내 잔병치레가 호전되는 데에는 엄마의 정성 어린 음식이 더 큰 몫을 했다. 편안한 이부자리를 챙겨주고 얼음이 담긴 비닐봉지를 감싼 수건을 이마에 올려주기도 했다.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보면 참 많이 사랑받고 자랐다는 감사함이 든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약손을 해주셨다. 배나 등에 손바닥을 대고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체기가 있을 때에는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리고, 감기몸살 기운이 있을 때에는 시계방향으로 둥글게 쓰다듬었다. 손바닥을 피부에 완전히 밀착시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띄운 것도 아닌 적당한 거리감이 묘한 안정감을 줬다. 내 배와 아버지의 손바닥 사이에 체온을 머금은 공기가 계속 드나들었다. 굳은살 때문에 거친 아버지의 손바닥이 내 피부를 슥슥 스치고 지나가면 호흡이 가라앉고 긴장이 풀렸다. 부드러운 손바닥이 아니라서 더 좋았다. 언젠가 할머니께서 내게 약손을 해주셨을 때 꼭 아버지의 약손과 느낌이 비슷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아버지에게는 약손 해줄 사람이 없겠다. 글을 쓰며 따듯했던 기분이 문득 쓸쓸해졌다.


예나 지금이나 엄마는 마땅히 그럴 법한 실용적인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준다. 글쟁이가 되겠다는 아들의 선언 앞에서는 응원과 함께 밥벌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도 건넸다. 피로가 쌓였다고 하면 영양제를 챙겨 먹으라고 말하고, 책이 나왔다고 하면 이모와 지인들을 동원해 몇 권씩 책을 산다. 부산 나올 때마다 밑반찬을 한가득 챙겨 온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는 온전히 당신만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주신다. 글쟁이 되겠다고 했더니, 다 늙어 직접 쓴 시 몇 편 있다면 그것 참 낭만적인 일이 아니겠냐고 말하신다. 고민이 많을 땐 해결책을 찾는 대화를 나누는 대신 함께 목욕탕에 가서 땀을 빼고 때를 벗긴다. 얼마 전엔 통화를 하다가 “제 책 읽어보셨어요?” 물었더니 “마음 끌릴 때 아껴 읽고 있지. 첫 책은 3분의 1쯤 읽었고 이번 책은 아껴두고 있다.”하셨다. 첫 책은 2017년에 드렸고, 이번 책도 드린 지 몇 주나 지났는데. 그래도 막 서운하진 않다. ‘마음 끌릴 때’ 아버지가 내 책을 펼쳐 얼마나 집중해서 읽을 것인지 눈에 선하기 때문에. 


이렇게나 서로 다른 탓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해소되지 못한 불만이 여전하지만 그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서 나는 이렇게 자랐다. ‘이렇게’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한 문장으로 표현하긴 어렵다. 하지만 어쨌거나 엄마와 아버지가 아니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지금의 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게 자라, 소중한 사람들을 곁에 두고 이런 글을 쓴다. 저렇게 혹은 그렇게 말고, 이렇게 자라서 다행스럽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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