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과 사람

소박하고 다정한 마음의 출처

by 김경빈

내가 기억하는 첫 우리 집은 삼계동 여우농장이다. 지금은 삼계동 일대도 번화해 신도시가 되었지만 30년 전엔 초등학교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그중에서도 우리 집은 버스 종점 지나, 쓰레기 수거차도 오지 않는 곳에 있었다. 엄마와 외출하고 돌아올 땐 버스 종점에 내려 히치하이킹으로 남은 거리를 마저 달려 귀가했고, 생활 쓰레기는 앞마당에서 모닥불을 피워 태웠다. 늦은 밤 일렁이는 모닥불 뒤로 뱀 그림자가 유유히 지나기도 했다. 그때 엄마 나이는 겨우 스물다섯 내외. 가난도 가난이지만 그 시절이어서 가능했던 건가 싶기도 하다.


내가 대여섯 살쯤이었을 때 집에서 꽤 떨어진 곳에 아버지가 푸세식 화장실을 만들기 전까지 소변은 뒷산에, 대변은 신문지를 깔아 그 위에서 해결했다. 당시 어린 나는 새로 생긴 화장실이 너무 뿌듯해서, 집에 손님이 오면 꼭 화장실을 자랑했다고 한다. 여름이면 뒷산에서 졸졸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에 올챙이와 개구리가 가득했고, 겨울이면 엄마와 함께 집 뒤편 연탄난로까지 총총 걸어가 연탄을 갈았다. 봄가을에는 메뚜기, 여치, 나비 등등 곤충들이 집 주위 풀밭에 무성했다. 넓은 앞마당에는 칸칸이 우리 속에 여우 수백 마리가 줄지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내 기억엔 그 이미지가 없다. 가끔 자다 깬 새벽에 여우 울음을 들은 것이 전부다.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내동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삼계동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살았던 때의 기억은 내게 애틋하고 포근하고 청아한 느낌으로 남아있다. 부모의 고된 생계를 모르는 어린아이였기도 했지만 그 시절이라 가능했던 게 아닐까.


그 시절 아버지의 삶은 그저 추측으로 더듬을 수밖에 없다. 나는 앞마당의 여우를 기억하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이리저리 분주했을 아버지의 사정도 모른다. 어쩌다 아버지가 여우 목도리를 만들게 된 건지, 어쩌다 금호가든에 취직하고 또 어쩌다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의 별장에서 일을 하게 된 건지 모른다. 내게는 겨우 아키다견과 진돗개와 함께 뒹굴던 기억, 여름 땡볕에 아버지와 등목을 한 기억, 캐치볼인지 야구인지를 한 기억과 종종 함께 뒷산을 올랐던 기억들이 오래된 사진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몸통이 붉은 오토바이에 우리 가족 셋이 쪼르르 앉아 분식점에 갔던 기억도 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와 천호탕에 가서 때를 벗긴 기억도 있다. 어린 내 눈에는 종종 엄마를 울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원망스럽고 두렵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상처받고 상처 주면서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 시절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내가 8살이 되던 1997년에 우리 가족은 삼계동에서 내동으로 이사를 했고 늦둥이 동생 경인이가 태어났다. 이사한 집은 초등학교 담장 바로 앞에 있는 주택이었다. 그 주택에는 화장실도 있고 보일러도 있었다. 집 앞 전봇대에 쓰레기봉투를 내놓으면 정해진 날짜에 수거차가 가져갔다. 나는 올챙이와 개구리 대신 축구공과 겜보이를 가지고 놀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오토바이 대신 흰색 티코를 샀다. 초등학생인 내가 느끼기엔 뭔가, 확실히, 나아지는 중인 것 같았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고도 아버지는 한동안 새벽에 비락우유를 배달했다. 그즈음에 엄마는 갑상선에 문제가 심해져 자주 무기력하고 우울했다. 내가 무탈하게 학교를 다니는 동안, 두 사람은 무탈하기 위해 온 노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당시 우리 집에서 가장 행복한 건 동생 경인이었고, 우리 집을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 준 것도 경인이었다. 경인이가 웃으면 온 집안이 함께 웃었고 경인이가 울면 온 집안이 함께 다정해졌다. 돌이켜 보면 그런 시절이었다.


지난 추석엔 엄마가 아내에게 조개껍질 담은 유리병을 선물했다. 추석 전 주말에 아버지와 남해에 놀러 가서 주워온 것이라고 했다. 해변을 걷던 아버지가 예쁜 조개껍질을 보고서는 “우리 며느리 주면 좋아하겠네.” 하셨단다. 해변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엄마와 아버지는 허리를 굽혀 예쁜 조개껍질만 골라 주웠을 것이다. 추석 당일엔 수로왕릉에서 야무지게 생긴 도토리도 몇 알 주워오셨다. 이렇게 예쁜 건 보기 힘들 거라면서, 바지춤에 반질반질하게 닦은 도토리를 조개껍질 위에 같이 담아주셨다. 며느리 주겠다고 조개껍질과 도토리를 주워 온 부모님과 그걸 감동하며 받아드는 아내 사이에서 겸연쩍게 뿌듯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런 소박하고 다정한 마음은 어디에서 생겨나 어디까지 흘러가는 걸까. 그런 시절을 살면 그런 마음이 생기는 걸까. 부모님이 그런 시절을 살아낸 거라면 우리는 이런 시절을 살아가는 셈인데, 시절만 탓하기엔 어쩐지 무책임한 게 아닐까.

여러 번 봤던 드라마를 새삼 꼼꼼히 살펴보는 마음으로 과거를 되짚어본다. 다시 보니 어느 한 장면도 그저 그런 시절이어서 가능했던 일이 없다. 갓 스물에 엄마가 된 여자가 화장실도 보일러도 없는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런 시절이라고 더 수월했을 리가 없다. 띠동갑 아내와 갓난아기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여우 목도리를 만들고, 새벽마다 나서는 우유 배달이 그런 시절이어서 가능했을 리가 없다. 그런 시절이어서 내가 가난의 부끄러움과 고됨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자란 것도 아니다.


나는 시절이 아니라 사람 덕분에 용케도 자랐다. 그런 시절도 버티어 살아낸, 그런 사람 덕분에 다 자라서 이런 글을 쓴다. 고된 시절을 애틋하고 포근하고 청아하게 만들어 준 것도 결국 사람이었다고 힘주어 쓴다. 그 시절을 이끌고 여기까지 걸어온 사람 덕분이었다고.